‘기생수: 더 그레이’, 연상호 유니버스는 어떻게 기생수를 삼켰나
‘오른쪽이’와 ‘하이디’.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기생수>와 연상호 감독의 <기생수: 더 그레이>는 기생생물에게 붙여준 이름에서부터 차이를 논할 수 있다. 원작에서 기생생물은 주인공 이즈미 신이치의 뇌를 공략하려다가 오른쪽 팔에 붙어 기생한다. 그래서 그는 ‘오른쪽이(ミギー)’가 된다. 연상호 감독의 기생생물은 뇌를 공략할 수 있었지만, 주인공 정수인(전소니)이 거의 죽어가던 상황이라 뇌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래서 숙주인 정수인이 위기에 처할 때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때 정수인의 자아는 무의식 저편에 잠들어 있다. 그래서 이 기생생물에게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따온 ‘하이디’란 이름이 붙는다. 원작과는 다른 각색이지만, 이 작품이 처음부터 스핀오프로 기획되었다는 점에서는 그럴듯한 설정이다. 뇌를 차지하지 못하고 오른팔에 기생한 기생수가 있다면, 신체 다른 부위에 기생한 또 다른 변종 기생수도 있을 법하다는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중인격’과 다름없는 공생 방식이 연상호 감독의 유니버스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설정이다.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매체의 성격과 관계없이 그가 줄곧 붙잡아온 주제는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다.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서울역>(2016) 등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암울한 탐구를 해왔다면, <부산행>(2016), <반도>(2020), <정이>(2023) 등 실사영화에서는 인간이 물리적 변화를 통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상황을 스펙터클로 강조했다. 이런 경향은 연출과 각본 등으로 참여한 <지옥>(2021), <괴이>(2022), <선산>(2024) 등의 OTT 시리즈로도 이어진다. 그러니 <기생수>라는 작품을 원작으로 선택했을 때, ‘오른쪽이’가 ‘하이디’가 되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 하이디는 숙주의 선택을 따라가며 인간의 본질을 알아간다. 이전 작품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연상호 감독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중요했을 것이다.
‘주제’를 더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열거해도 <기생수: 더 그레이>는 영락없는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다. ‘변종’을 허락하지 않는 인간 조직에 대한 고찰은 <부산행>에서 명확하게 드러낸 바 있고, 이런 조직을 신봉하는 광신도적인 사람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단면은 <지옥>에서 보여주었다.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기생수와 믿음을 지배하는 <지옥>의 ‘새진리회’가 크게 다르다고 볼 수도 없을 듯하다(심지어 극 중 교회의 이름이 ‘새진교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생수: 더 그레이>가 연상호 감독의 실사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과 더 맞닿아 있는 듯 느껴졌다. 표정의 변화를 묘사하는 연출 때문이다.
설정상 기생수에게 점령당한 인간은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수 없다.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도 이 부분은 몇몇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된다.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에도 표정이 사라진 대표적인 인물이 있었다. <돼지의 왕>의 철이, <사이비>의 성철우, <서울역>의 석규 등이다. 철이는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의 영웅이고, 성철우는 사이비 교회의 목사임에도 마을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며, 석규는 좀비로 아수라장이 된 서울에서 사라진 딸을 찾는 아비다. 이 작품들의 묘미는 바로 그들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에 있었다. 인간이 좀비가 될 때, 기생수가 숙주의 얼굴을 뭉개고 정체를 드러낼 때, 연상호 감독은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때와 비교할 때 <기생수: 더 그레이>는 지향하는 그림체와 방향이 다르다. 기생수가 숙주의 용기를 받아들일 때, 또 다른 기생수가 숙주의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낄 때, 그들의 표정이 어딘가 인간처럼 변한다. 즉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의 뇌를 점령해서 결국 인간과 닮아가는 부분이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 가장 다채로운 표정을 볼 수 있는 장면인 것이다. 말하자면 ‘역방향’의 연출이라고 할까? 유명한 원작을 자신의 유니버스에 녹여내는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방향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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