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 문을 연 미술 실험실
투명성과 개방성을 시도하는 전시 공간이 인사동에 개관했다. 윤재갑 관장을 필두로 ‘아튠즈’가 기획한 ‘그라운드서울’이다. 개관전은 뱅크시 측의 공식 인증을 받은 ‘리얼 뱅크시’다.
인사동에 지하 4층, 지상 5층 총 9개 층에 연면적 5,000㎡의 전시 공간이 있다. 이전에 ‘아라아트센터’로 운영될 때는 대체로 대관해 대학생들의 과제전이 주로 열렸다. 이곳이 기획 전시 중심의 그라운드서울(Ground Seoul)로 탈바꿈했다. 모체는 아트 컴퍼니 ‘아튠즈(Artunes)’다. 윤재갑 관장을 필두로 예술계 인사들이 만든 회사로, 이 건물을 5년간 임대해 그라운드서울을 운영한다. 윤재갑 관장은 인터뷰를 의뢰받은 처음부터 자신이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 하길 강력히 원했다. 이곳이 관장 개인의 갤러리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그라운드서울은 일부 한국 갤러리가 오너와 패밀리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에서 벗어나 수평성, 투명성, 개방성 등을 강조한다. 그라운드서울이 전시를 기획하면 VC들, 언론사 등이 공동 투자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해산한다.
그 첫 번째 전시가 5월 10일부터 10월 20일까지 열리는 <REAL BANKSY : Banksy is NOWHERE(리얼 뱅크시)>다. 뱅크시가 설립한 페스트 컨트롤(Pest Control)의 인증을 받은 세계 최초의 전시다. 페스트 컨트롤은 뱅크시의 작품을 판매하거나 진품 여부를 판정하는 기관이다. 전시는 뱅크시 작품 29점을 비롯해 관련 아카이브 총 130여 점을 선보인다. 뱅크시는 개인 소유가 아닌 대중 공유를 지향하고, 자본주의에 적대감을 품어왔다. 그렇기에 윤재갑 관장은 뱅크시를 “아티스트 오브 더 아티스트”라며 그라운드서울도 일종의 한국 미술계의 대안이 되길 희망했다.
윤재갑 관장은 인도와 중국에서 수학하고 2012년부터 2024년까지 상하이 하우 아트뮤지엄(How Art Museum) 관장, 2011년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 선정 위원 등을 역임했다. 잘못된 일부 미술계 관습의 전복을 준비 중인 그를 공사가 한창인 그라운드서울에서 만났다.
그라운드서울이 들어선 이곳은 아라아트센터가 있던 자리다.
인사동에서 가장 큰 전시 공간이지만, 이전엔 대관을 주로 했다. 우린 기획 전시 중심으로 이끌 것이다.
며칠 전 통화에서부터 일부 갤러리와 달리 투명하고 열린 형태라고 강조했다.
한국엔 오너와 패밀리 중심인 갤러리가 너무 많다. 2000년대 초반에 30여 개 한국 갤러리가 베이징에 진출했지만 현지화에 많이 실패했다. 다른 해외 갤러리가 현지인과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지분 협력을 추진할 때 한국 갤러리는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 오너십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당시엔 단점이 됐다. 우리는 아트 컴퍼니를 설립해 전시를 기획하고, 여기에 관심 있는 이들의 투자를 받아 진행한다. 그라운드서울은 <리얼 뱅크시>처럼 티켓을 파는 기획 전시와 지상층에 작품을 파는 갤러리를 함께 운영한다.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서다. 이 모든 것은 나뿐 아니라 최석환 대표, 류승훈 부대표, 유창원 이사 등 멤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개국공신인가?
그렇다.(웃음) 오너십을 갖기보다 이들과 함께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운영할 것이다. 뱅크시 전시도 VC들이나 언론사, 우리가 공동 투자했고, 이익을 공정하게 나눈 뒤 깨끗하게 해산한다. 전시 수익금이 관장의 주머닛돈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 이런 방식의 갤러리가 어느 정도 있나?
글쎄. 우리가 진일보한 갤러리 시스템이다. 그래서 아까부터 내가 아닌 ‘팀’을 강조한 것이다. 아튠즈는 개인 회사가 아니고, 그라운드서울도 마찬가지다.
아튠즈’는 아트를 튜닝한다는 뜻이다. 그라운드서울이라 이름 지은 이유는?
그라운드는 마당이란 뜻이다. 한국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마당이지 않나. 판소리도 ‘판소리 한마당’ 이렇게 부르고.(웃음) 이곳도 ‘서울 예술 한마당’이 되고자 한다.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는 열린 공간.
인사동에 이렇게 크고 열린 건물이 있다니 놀랐다. 지하 4층과 지상 5층이 하나로 연결된 느낌이다.
볼수록 놀라운 공간이다. 지하 4층부터 지하 1층까지 뚫려 있다. 지상층의 통창을 막고 있는 가벽도 허물 거다. 최초의 건축 의도도 ‘빛을 들이는 공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완공 후엔 지하 4층부터 지상까지 빛을 통해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 천장과 벽이 다 막힌 기존 전시장은 스포트라이트 형태의 인공조명을 켜야 한다. 빛보다는 어둠이 지배한다. 이곳은 자연광을 적극적으로 들이는 열린 공간이다. 상쾌하다 할 때의 ‘상(爽)’과 어울리는 공간이다. 이 한자는 대문에 창살이 여러 개 있는 모양이다. 최근 내가 북촌 한옥으로 이사했는데, 그곳 창살 무늬로 비치는 빛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 의미에서 집 이름을 ‘상가’라고 지으려고 했다가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웃음)
건축설계에 관심이 커 보인다.
이렇게 멋진 건물을 누가 지었을까 알아보니 이솜건축이었다. 우리나라는 건물주나 상호는 있어도 건축 사무소 이름은 잊히곤 해서 추적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라운드서울이 공식 개관하면 건축가의 이름과 명예를 되살릴 거다. 개인적으로 워낙 건축설계에 관심이 많다. 부산에 자리한 ‘F1963’도 조병수 건축가와 의견을 나눴고, 관장으로서 12년간 함께한 상하이 하우 아트 뮤지엄 역시 설계부터 관여했다. 그간 봐온 좋은 미술관, 건축 요소를 끌어오려 애쓴 기억이 난다.
그라운드서울의 개관전으로 뱅크시를 선택한 이유는?
‘소유가 아닌 공유’라는 우리의 지향성이 뱅크시와 겹친다. 뱅크시 작품은 미술관에 갇히거나 개인이 소유하지 않고 거리에서 대중과 함께한다. 자본이 아니라 미학적으로만 소유할 수 있다. 현재 글로벌 자본주의는 첨예하게 소유를 강조한다. 누구의 작품인지, 그걸 습득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 주체가 도드라진다. 심지어 자본 있는 컬렉터는 스타가 된다. 하지만 뱅크시는 익명성을 내세우며 주체를 삭제해버렸다. 예술가란 주체가 사라지니 컬렉터도 사라졌다. 공유 시스템이 작동되는 거다. 그는 무라카미 다카시나 데미안 허스트만큼 혹은 그보다 중요한 작가가 됐다. 자본의 시대에 자본주의를 완전히 적대하는 작가가 아티스트 오브 더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대단한 인물이다.
익명을 중시하는 아티스트와 소통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윤재갑 관장은 이 과정을 주도한 유창원 이사에게 답변을 부탁했다.) 유창원 전 세계적으로 뱅크시 전시가 빈번하지만 작가가 완전히 허가한 건 없었다. 지금까지 뱅크시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전시는 본인이 영국에서 연 <컷 앤 런(Cut & Run)>뿐이었다. 뱅크시의 공식 작품 보증 기관 ‘페스트 컨트롤’이 인증하는 최초의 전시가 그라운드서울에서 열리는 거다.
왜 다른 갤러리는 페스트 컨트롤에 의뢰하지 않았을까?
유창원 상업 전시 얘기가 쉽지 않다. 뱅크시는 자본주의를 적대시해왔으니까. 그의 <컷 앤 런>도 무료였다. 그런데 우리가 인증을 받았으니 고무적인 일이다.
페스트 컨트롤과 조율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유창원 한국 전시 시장에서 ‘포토 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력하는 중이다.(웃음)
뱅크시의 작품 29점, 관련 영화와 영상을 포함해 130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뱅크시와 결을 같이하는 카우스와 오베이의 작품 30점도 포함한다. 뱅크시 작품의 선택 기준은?
유창원 페스트 컨트롤 측에서 한국 관람객에게 선보이고 싶은 것들을 추려서 보내온 작품들이다. 왜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가늠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관장으로서 전시 구성을 어떻게 보나?
꼭 리얼(Real) 뱅크시여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간의 전시는 페이크(Fake) 뱅크시 논란이 있었다. 모조품 논란이 인 것이다.
다른 갤러리는 뱅크시 측과 교류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 전시를 열었을까?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순 없지만, 찾아보면 여러 방식이 있을 거다. 뱅크시가 상업적인 활동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판화 에디션을 판매, 유통도 하고. 재미난 일화를 얘기하면, 영국의 한 거리에서 노점상이 그림을 판 적 있다. 8시간 정도 후에 뱅크시가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작품이라며 그날의 수익을 올렸다. 누군가 단돈 몇 유로에 뱅크시 그림을 산 것이다. 그렇게 작품이 유통돼 전시되기도 한다.
전시 <리얼 뱅크시>의 의미는?
자본주의 미술 시장에 대한 뱅크시의 적대감, 거부감은 미술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미술계는 마켓 위주거나 제도 미술, 미술관 시스템 쪽으로만 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에 대한 자기비판과 반성의 담론이 조금이라도 형성됐으면 한다.
3·4·5층에 자리할 갤러리는 어떻게 운영되나?
국내외 큐레이터를 초빙해 전시를 기획할 거다. 남미 미술전을 열고 싶으면 그 분야 전문 큐레이터를 찾아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고 함께 기획한다. 한마디로 ‘전 세계 큐레이터 연합 갤러리’라고 불러도 좋겠다. 요즘 큰 미술관의 전시가 점점 재미없어지는 것도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갤러리의 첫 전시도 정해졌나?
고미술이 아니라 현대미술을 선보일 것이다. 첫 번째는 <Move, Sound, Image>다. 세상은 인간과 자연, 인간이 만든 사물로 구성된다.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흘러가며 공간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달라진다. 모든 것이 순간이다. 우주는 계속 팽창하지 않나. 컨템퍼러리 미술도 우주처럼 팽창하는 그 순간에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새로운 것들이 생성된다. 순간적이고 우발적이며 생성론적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엮고 또 엮어나가는 것이 컨템퍼러리적 행위라고 한다면 현대미술의 핵심은 움직이고 생성되는 ‘무브’, 그러면서 발생하는 ‘사운드’와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전시에는 중국의 장딩(Zhang Ding), 일본의 하시구치 린타로(Lintalow Hashiguchi)가 참여한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졸업 후, 중국 중앙미술학원 중국 미술사 진수 수료, 인도 타고르대학 인도 미술사 석사를 마쳤다. 어떤 점이 청년 윤재갑을 아시아 미술계로 이끌었나?
한국 미술엔 극무채색이 있다. 수묵화를 보라. 반대로 단청, 오방색 같은 극채색도 있다. 전자는 중국 유교, 후자는 인도 불교에서 왔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한국에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 문화의 뿌리를 역추적하며 중국과 인도에 가야 한다고 여겼다.
중국에서 미술관장도 역임했다. 아시아 미술 전문가로서 동양 미술계의 흐름을 읽는다면?
한국에선 나를 중국통, 인도통, 아시아통으로 얘기하는데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죽의 장막이 열릴 당시 해외의 현대미술을 중국에 소개할 전문 큐레이터가 드물었다. 내가 운 좋게 그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중국에서 난 국제 미술 전문가로 불렸다. 중국 미술은 현지인이 훨씬 더 잘 알 것이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독일, 한국, 라틴 미술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겠다.(웃음) 큐레이터로서 한국 미술의 흐름을 어떻게 보나?
1989년 이후 글로벌리즘이 형성됐다. 전 지구가 하나의 시장이 된 거다. 이때부터 세계적으로 아트 마켓이 팽창하고 비엔날레 시스템이 여럿 생겨났다. 광주 비엔날레도 1995년 시작됐다. 하지만 글로벌리즘 아래 자본은 일부 국가에만 집중됐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진 거다. 한국 미술 마켓이 1조를 넘었다고 하지만, 많은 돈이 외국 갤러리와 외국 작가에게 흘러간다. 한국 미술의 양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이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뱅크시 이후 그라운드서울의 전시 방향은?
그라운드서울이 대중의 신뢰를 얻길 바란다. 한국 미술계에 도움이 되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다. (VK)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