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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채우고 치유받는 여행을 하다

2024.05.10

LA에서 채우고 치유받는 여행을 하다

도시에서 잃어버린 꿈을 도시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모든 문화가 별처럼 반짝이는 곳,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트레킹을 하며 바라본 할리우드 사인.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10년을 보냈다. 누군가 그 세월에 대한 소감을 묻는다면 ‘내 나이 31세, 로또 외의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라고 답할 준비가 서서히 되어가는 중이었다. 도시는 같은 걸 욕망해야만 굴러가는 곳일까? 체념에 가까운 심정으로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꿈꾸는 자들의 도시’라는 예쁘장한 수식어를 의심하는 한편 기대를 건 채.

로스앤젤레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바삭하게 말린 이불에 코를 박고 싶은 날씨였다. 이제 막 서울의 혹독한 겨울을 지나온 탓인지, 로스앤젤레스의 온화한 공기가 낯설기보다는 반갑게만 느껴졌다.

곧바로 차를 타고 다운타운에 위치한 목시(Moxy) 호텔로 향했다. 객실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작은 방의 크기에 잠시 실망했다. 화장실과 침대, 그리고 캐리어를 펼쳐놓을 수 있는 공간 정도가 전부. 탁 트인 로스앤젤레스 뷰를 감상할 수 있는 전면 유리창이 아니었다면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방 사이즈의 의도를 알아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선 숙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 이상 크기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실내에서의 시간을 최소화하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날씨 때문만도 아니었다.

영화를 바탕으로 미술과 음악, 패션, 미식까지 모든 문화를 게걸스럽게 폭식할 수 있는 곳이 로스앤젤레스다. 공식적인 뮤지엄의 개수만 100개 이상, 각종 갤러리와 문화 공간은 따로 수치화하기 힘들 정도로 지척에 널려 있다. 랜드마크만 콕 짚어도 아쉽진 않지만 취향을 곤두세워 테마를 확실히 잡고 간다면 도시의 해상도는 더욱 높아진다. 지금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미술만 봐도 그렇다. 단순히 작품 감상뿐 아니라 도시가 문화 공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발길 닿는 곳마다 감각할 수 있다.

그랜드 애비뉴의 더 브로드 뮤지엄.

처음 향한 곳은 그랜드 애비뉴(Grand Avenue)의 ‘더 브로드 뮤지엄(The Broad Museum)’. 건너편 커다란 나무 밑에서 이스터 에그 파티가 한창인 유치원생들의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기분 좋게 들어섰다. 그 유명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바로 옆 블록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제프 쿤스와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등 한때 현대미술계를 주름잡던 스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소장품만큼 매력적인 건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외관이다. 메인 전시장에 입장하면 유명 건축가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Diller Scofidio+Renfro)가 굳이 구멍을 만든 이유를 알 수 있다. 뮤지엄 곳곳은 천장을 뚫고 들어온 로스앤젤레스의 햇빛으로 달궈진다. 비교적 차가운 화이트 큐브를 거닐다 은총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맞이하는 순간, 몇 시간이고 머물고 싶은 아늑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무료라는 점도 한몫을 단단히 하지만.

백색의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손길로 탄생한 게티 뮤지엄.

더 브로드 뮤지엄이 산책하다 가볍게 들르기 좋은 곳이라면, ‘게티 뮤지엄’은 제법 엄숙한 마음을 갖춰도 좋을 곳이다. 석유 재벌 진 폴 게티(Jean Paul Getty)와 그의 손자 마크 게티(Mark Getty)가 설립한, 게티 이미지의 그 게티 맞다. 로스앤젤레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브렌트우드 언덕에 홀로 우뚝 선 뮤지엄은 전용 트램 없이는 갈 수 없다. 굽이굽이 언덕을 타고 올라가면 비로소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의 손길로 탄생한 게티 뮤지엄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색의 건축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새하얀 컬러로 지은 거대한 건축물은 신전과 다를 것 없는 장엄함을 뽐낸다. 산꼭대기에 지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규모와 타일의 인치까지 치밀한 계산 아래 이뤄낸 기하학적 형태는 장장 12년 동안 1조3,000억원을 들여 완성한 결과다. 집주인의 편집증적 강박이 느껴지는 건물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나뉘어 그가 생전 수집한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예술품으로 가득하다.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각 시대의 작품을 고이 모셔둔 곳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자신의 작품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고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도 존재한다. 스트리트 아트와 그래피티를 감상할 수 있는 다운타운의 ‘아트 디스트릭트(Arts District)’다. 그러니까, 동네 전체가 미술관인 셈이다. 투어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이곳을 산책하면 이들만의 또 다른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아티스트의 비밀스러운 사인, 새로운 그림으로 덮이고 지워진 담벼락의 역사, 스프레이 캔과 프리핸드의 미묘한 차이 등 앞선 미술관에선 느낄 수 없던 새로운 감각을 안겨준다.

스트리트 아트를 감상할 수 있는 아트 디스트릭트.

미술이라는 같은 테마 아래서도 도시는 이렇게나 다층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각자 어울리는 자리에 기가 막히게 놓인 작품과 공간의 잔상을 머릿속에서 연결하고 덧대다 보면 생각에 새로운 길 하나가 트인 느낌이 든다. 그건 다른 테마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러니까 로스앤젤레스에서 잔뜩 심각해진 표정으로 이번 전시는 어떻고, 이 음악은 별로고, 이 음식은 간을 잘못했다 따위의 평가를 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로스앤젤레스의 가치는 다양한 문화를 통째로 경험했다는 것 자체에 있다. 무엇보다 당신이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특히 ‘그래미 뮤지엄’이나 ‘아카데미 뮤지엄’은 박물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 세계인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곳, 우리가 지금 즐기는 음악과 영화의 시작을 음미할 수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그랜드 센트럴 마켓.

좀 더 생생한 현재의 역사는 약 100년 전 문을 연 ‘그랜드 센트럴 마켓(Grand Central Market)’과 ‘디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The Original Farmers Market)’에서 절감하게 된다. 두 곳 모두 식재료와 맛깔스러운 먹거리를 파는 시장, 쉽게 말해 한국의 전통 시장과 비슷한 곳이다. 다른 점이라면 가게 앞을 비롯한 곳곳에 작정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 로컬과 관광객 불문하고 이곳을 찾은 이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몸을 맞대며 어우러질 수밖에 없다. 그저 빈자리를 찾아 주문한 음료를 홀짝이다 보면 옆에 앉은 사람이 TV를 보며 말을 거는 식이다. “저기 오타니 나온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즐기는 이들은 로스앤젤레스 곳곳을 활기로 채운다.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서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베니스 해변만 가도 그렇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와 야자수, 노래방 배경 화면으로만 보았던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발걸음마다 샘솟는다. 모두가 일제히 바다를 바라보는 대신 누군가는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누군가는 음악에 맞춰 롤러스케이트를 탄다. 잠옷을 입은 채 조깅을 하는 이도, 잔뜩 차려입은 채 모랫바닥에 주저앉아 기타를 연습하는 이도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켜니 저 멀리서 스케이트보드를 탄 남자가 화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오랜 친구처럼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보인다.

이런 허물없음은 숙소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로컬과 관광객을 아우른다. 앞서 말한 목시 호텔은 방의 크기를 최소화한 대신 로비를 비롯한 공용 공간에 힘을 썼다.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바, 로컬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커피숍, 사막을 컨셉으로 잡은 인테리어 등 함께할 수 있는 공간에 재미를 심어뒀다. 목시 호텔이 젊고 활기찬 분위기를 표방한다면 같은 건물에 위치한 AC 호텔은 우아하고 절제된 미감을 지녔다. 매력적인 포인트는 두 호텔 투숙객이 각 시설을 상호 이용 가능하다는 점. 진짜 묘미는 같은 건물 8층에 자리한 ‘Level 8’이다. 로컬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이곳은 한 층을 여덟 공간으로 나누었다. 각 공간은 재즈 바, 루프톱 수영장, 성당 등 다양한 문화와 나라에서 받은 영감으로 꾸몄다. 룸의 목적도 다이닝과 바, 엔터테인먼트까지 제각각이다. 첫 번째 룸을 시작으로 각 방에 숨겨진 비밀의 문을 열면 그다음 공간이 펼쳐진다. 게임하듯 누비며 각 공간의 컨셉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관광 못지않게 객실에서의 시간도 중요하다면 컬버시티에 위치한 하얏트의 ‘더 샤이(The Shay)’가 정답이다. 비교적 넓은 공간과 포근한 인테리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거대한 벽난로와 소파, 식탁 등으로 거실처럼 꾸며놓은 로비도 마찬가지. 곳곳에 걸어놓은 로컬 아티스트의 작품은 공간에 정을 더 붙이게 만든다.

바이닐 디스트릭트의 풍경.

‘꿈꾸는 자들의 도시’라는 수식어에 결국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건 사람들 때문이었다. 대화한 몇 안 되는 사람들 모두 자신만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할리우드 사인 트레킹을 함께 하던 가이드의 또 다른 직업은 코미디언이었고, 아트 디스트릭트에서 아트 투어를 담당한 가이드의 본업은 예술가였다. 더 브로드 뮤지엄에서 만난 도슨트 역시 퇴근 후에는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같이하는 시간을 대충 흘려보내지도 않았다. 물론 로스앤젤레스에서 발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진짜 얼굴은 어떨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날 정말 놀라게 한 건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본인이 품은 꿈과 열정을 격의 없이 꺼내 보일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는 도시가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가꿔내야만 가능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쯤 되니 못 이기는 척 영화 <라라랜드>의 대사를 하나 끌어와야겠다. 주인공 미아는 세바스찬에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 있어. 자신이 잊은 걸 상기시켜주니까”라고 말한다. 다시 돌아온 나의 도시 서울에서 내가 잊은 건 무얼까 고민하며 그들의 반짝이던 눈빛을 떠올렸다. (VK)

사진
장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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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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