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낭만이 없는 곳에서 찾아낸 낭만의 짜릿함
tvN 드라마 <졸업>의 주인공은 상당히 문제적이고 불편하다. 서혜진(정려원)은 대치동 유명 학원의 대표 강사다. 그게 뭐 어때서?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최치열(정경호) 같은 일타강사도 로맨스의 주인공이지 않았나. 최치열은 ‘일타’라는 자존심을 뿜어내는 캐릭터였다. 서혜진은 오히려 자존심 따위도 없는 인물이라 문제적이다. 그녀는 후배 강사에게 “학부모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상담 노하우를 전수한다. 학원생뿐 아니라 학부모의 멘탈까지 케어하며 그들이 다른 학원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녀의 업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시험문제의 오류를 알고도 지적하지 못하는 학생을 대신해 직접 교사와 대면하기까지 한다. “의인과 활유, 역설과 반어 같은 걸 개념적으로 구분 짓는 데 목매는 문제는 수능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전 아이들에게 이 개념어들을 성실히 가르쳐왔습니다. 어디까지나 여전히 이걸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존재하시니까요.” 이 장면에서 그녀가 학원 강사가 아니라 이제 막 학교에 부임한 신임 교사로서 기존 교사들의 낡은 교육관에 대항하는 상황이었다면, 응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교사와 맞서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원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많은 학생이 그녀에게 수업을 듣기를 원한다. 원생 수에 따라 그녀는 돈을 번다. 그녀 덕분에 학원도 돈을 번다. 이런 캐릭터의 입장에서 로맨스에 이입하는 건, 불편한 일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이유도 그런 불편함과 불쾌감 때문이다.
<졸업>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에게 대치동은 낯선 곳이 아니다. 그의 전작 중 하나인 <아내의 자격>(2012)도 대치동이 무대였다. <아내의 자격> 속 대치동은 “아이 공부만 잘 시키면 아내가 불륜에 빠져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학원가 중심의 이야기인 <졸업>의 대치동은 불륜을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틈이 없는 곳이다. 학부모, 학생, 강사, 교사 모두 치열하다. 경쟁 학원의 강사는 물론이고, 같은 학원의 동료도 언제든 총질을 할 수 있다. 학원장들은 지금의 스타 강사를 극진히 모시는 동시에 새로운 스타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대치동 밖의 강사들이 ‘일타’를 꿈꾸며 대치동 입성을 준비할 때, 학교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공격하는 교사가 있고,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 사이를 오가며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운다. <졸업>은 주요 인물들의 서사를 진행하는 틈틈이 그런 대치동의 풍경을 고정된 풀 샷으로 세밀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졸업>은 여기에서 낭만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아왔던 제자. 그녀 덕분에 8등급으로 출발해 명문대 입학에 성공했던 신화의 주인공. 이준호(위하준)에게 대학 입학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승리의 기억이고, 그것을 만들어준 서혜진은 인생의 스승이다. 이 사랑은 납득할 수 있다. 이준호와 서혜진은 서로에게 처음으로 짜릿했던 기억이다.
함께 경험했던 짜릿함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곳이 낭만을 찾을 수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졸업>을 연출한 안판석 감독에게는 제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원래 알던 연하의 남성을 문득 사랑하게 된 여성도 낯설지 않다. <밀회>의 오혜원(김희애)이 이선재(유아인)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선재를 통해 음악을 다시 사랑하게 된 동시에 재벌가 뒤치다꺼리에서 벗어날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손예진)가 20년 가까이 봐온 친구의 동생 서준희(정해인)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가 그녀의 회사와 같은 건물로 출근하면서부터였다. 애써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불합리한 부분도 눈감으며 버티던 곳의 온도와 냄새가 그로 인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졸업>의 서혜진도 비슷한 이유로 제자였던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서혜진의 학원에 강사로 취업한 이준호는 그녀가 더 이상 과거의 선생님이 아니어서 당황한다. “예전에 선생님은 저 그렇게 안 가르치셨어요.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즐겁게 해주셨어요. 내 감상이 곧 문제의 정답일 때, 기분이 날아가게끔 만들어주셨고 그래서 교과서가 생략한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었어요.” 이제 몇 백 명의 수강생을 거느리는 거물이 된 서혜진은 “우리가 예상 문제 적중률을 높이는 것 말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해주면 되냐”고 반문한다. 그랬던 서혜진이 4화에서는 이준호를 가르쳤던 그 시절의 방식으로 강의를 하게 된다. 애써 준비한 강의 이벤트가 실패한 상황에도 이준호를 통해 용기를 얻은 덕분이다. “당신을 선생님으로 부를 수가 없다”고 했던 고등학교 교사의 말이 계속 신경 쓰이는 지금 자신을 선생님으로 인정해주는 제자는 어떤 의미일까. <밀회>의 오혜원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 모두 사랑을 통해 얻은 힘으로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려 했다. <졸업>의 서혜진도 로맨스를 통해 대치동 학원가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게 분명하다. 낭만이 없는 곳에서 생겨난 낭만은 그만큼 폭발력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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