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시’ 건강한 원칙주의자들이 주는 쾌적함
ENA 월화 드라마 <크래시>의 한 장면. 경찰서 주차장에서 접촉 사고가 벌어진다. 후진하던 서장(백현진)의 차가 TCI(교통범죄수사팀) 경위(이민기)의 자전거를 쳤다. 서장은 자기 과실이 아니라고 펄펄 뛰면서 주변에 동의를 구한다. 교통계와 TCI 경찰들은 난처해서 눈길을 피하고 헛기침을 해대지만 굳이 지목당하면 할 말은 다 한다. 이만저만해서 서장의 과실이 10분의 7이라느니, 8이라느니, 8.5라느니. 결국 융통성 없는 경위가 보험사에 전화를 걸어버리면서 상황이 종료된다. 곁가지로 삽입된 에피소드지만 <크래시>의 매력을 잘 요약하는 장면이다.
<크래시>는 분명 범죄 드라마다. 스릴도 있다. 하지만 안전한 느낌을 준다. 극 초반 TCI에는 매회 새로운 사건이 주어진다. 무연고 노인을 이용한 보험 사기, 귀신 소동을 가장한 레커 사기, 뺑소니 등이다. 이를 해결하는 데 과학, 법률, 상식이 동원되어서 교양 예능 프로그램처럼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본업에 충실한 원칙주의자들을 보는 쾌감이 있다.
드라마의 중심인 TCI는 경찰에서 소외된 조직이다. 사무실도 창고 같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면면은 듬직하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정채만 팀장(허성태), 택시 기사의 딸 민소희 반장(곽선영), 사고 트라우마로 운전을 하지 않는 차연호 경위, 백미러만 봐도 차종을 맞힐 수 있는 차량 덕후 우동기(이호철) 등이다. 그들은 누가 뭐라건 자기 일에 사명감이 있다.
TCI 선배들은 출세욕과 거리가 멀다. 팀장은 상사 아들의 사고를 덮어주지 않아서 미운털이 박혔다. 차연호는 보험 조사관 시절 내부 고발을 했다. 경찰대 출신 민 반장은 핵심 부서로 옮겨준다는 구 남친 이태주(오의식)의 제안을 거부한다. “실력이 아니라 호의로 자리를 얻으면 신세를 갚기 위해 부정한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게는 못 산다”는 이유다.
한국 드라마에서 구태에 저항하는 캐릭터는 흔히 껄렁하고 자아도취적인 돈키호테, 외로운 아웃사이더, 비장한 정의의 사도, 인정머리 없는 이성주의자처럼 돌출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크래시>에서 인물들의 서사는 충분히 극적이되 성격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들은 조직에서 눈치도 보고, 자기들끼리 단합도 하고, 농담도 잘 한다. 범죄 피해자뿐 아니라 안타까운 실수로 가해자가 된 사람들에게도 넉넉히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감정에 치우쳐 원칙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건, 사고, 병폐는 대단히 치밀한 음모나 괴력에 의해 발생하는 게 아니다.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의해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기도 하고 수습되기도 한다. 그런데 미디어가 주목하는 건 주로 문제가 터져서 폐허가 된 곳들이다. 그러니 세상이 온통 썩어빠진 것 같고 대명천지 믿을 놈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인간적이고 성실한 경찰들을 심상하게 그리는 이 드라마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고 위안이 되는 이유다.
극 중반부터는 차 경위의 과거 차량 사고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유학을 앞둔 상황에서 차량 인명 사고를 냈다. 그 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이 사건에 부잣집 망나니들과 경찰 고위 간부들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관련자들을 협박해오면서 드라마의 분위기는 자못 심각해진다. 원칙 대 비원칙의 구도가 확장되면서 잘 빌드업된 캐릭터들이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여성 캐릭터의 매력도 주목할 점이다. <크래시>의 투 톱은 곽선영과 이민기인데, 곽선영의 민 반장이 격투에 능한 행동파라면 이민기의 차 경위는 허약한 브레인이다. 차 경위가 범인을 쫓다가 놓쳐서 경찰서 내의 웃음거리가 되자 민 반장은 그에게 무술을 가르친다. 성별이 도치된 상황이지만 그게 유행을 의식한 무리한 설정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배우의 고유한 매력이 크게 작용한다. 민 반장은 배우 곽선영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보여준 군인 캐릭터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싸움 잘하고 털털하고 리더십도 있지만 외모, 말투, 태도 따위로 센 척하지 않는다. 여성 사회인이 굳이 남성성을 흉내 내지 않고도 능력 있고 강인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한 캐릭터다. 그는 TCI를 무시하는 강력 팀에 대들기도 하고, 보고 체계를 무너뜨린 차 경위에게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일견 허술해 보일 정도로 인간적인 인물이다. 곽선영은 그런 감정이 비이성적으로 비치지 않도록 통제력 있고 유연한 연기를 보여준다. 상대역 이민기는 서늘함과 꺼벙함 사이를 오가는 묘한 배우다. AI처럼 무덤덤한 표정 뒤에 비밀을 숨긴 인물, 그러나 마냥 신비롭기엔 몸이 부실한 차 경위는 그 극단의 요소가 공존하는 캐릭터다.
제작진이 범죄 묘사의 윤리를 고민한 흔적도 엿보인다. 차량이 다른 범죄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자주 살인, 강간 등 중범죄를 추적하게 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상흔을 클로즈업하고 피해자를 전시하고 강간 장면을 길게 묘사하는 식의 선정적인 연출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초반의 기조는 그랬다. 그 사려 깊은 연출이 메시지에 신뢰를 더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반부의 변조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과연 이 드라마는 끝까지 쾌적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범죄물이 관객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관음증에 기대지 않고 확보할 수 있는 스릴은 어디까지일까?
5월 13일 방송을 시작한 <크래시>는 6회 시청률 5%를 달성하며 순항 중이다. 본방은 월·화 오후 10시 ENA, 스트리밍 채널은 디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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