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일 수 있는 옷, 앤더슨 앤드 셰퍼드를 만나다
좋은 옷이란 무엇일까? 새빌 로에서 탄생한 ‘앤더슨 앤드 셰퍼드’를 20년째 이끌고 있는 안다 롤랜드는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옷”이라고 말한다.
1906년 창립된 앤더슨 앤드 셰퍼드는 복식사의 흐름을 바꾼 브랜드다. 갑옷을 연상시키는 원단, 각지고 과장된 어깨로 대표되는 브리티시 테일러링에서 벗어나 ‘유연한 실루엣의 수트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것이 바로 이들이니까. ‘원조 멋쟁이’인 윈저 공이 즐겨 입었던 수트도 앤더스 앤드 셰퍼드의 것이었다. 암홀은 높고, 가슴 부근에 드레이프가 잡힌(흔히 드레이프 컷이라 부른다) 윈저 공의 수트는 브랜드의 상징적인 디자인이 됐다. 알렉산더 맥퀸이 처음으로 테일러링을 배운 곳도 앤더슨 앤드 셰퍼드다.
테일러링 브랜드는 다소 폐쇄적일 것이라는 인식과 반대로, 안다는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2022년 6월부터 웨일스 보너와 협업을 이어오고 있는 것도 다양한 오디언스에게 테일러링의 멋을 알리기 위함이다. 미국의 주요 도시는 물론, 홍콩과 서울에서도 트렁크 쇼를 개최하며 바쁜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 안다 롤랜드를 직접 만났다.
<보그>처럼 여성복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와의 대화가 익숙하지 않을 것 같다. 주로 남성 매거진과 인터뷰를 할 것 같은데.
때에 따라 다르다. 최근에는 <데일리 메일>과 여성들이 전통 남성 의복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6~7년 전부터 여성을 위한 테일러링이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여성복 컬렉션을 선보이는 브랜드 역시 테일러링에 집중한 룩을 점점 더 많이 선보이고 있고. 과거에는 소수의 도전적인 여성만이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 에디 슬리먼의 슬림 테일러링, 톰 포드의 관능적인 수트 등을 입었다. 지금은 절대다수의 여성이 이런 수트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서울에서 여는 다섯 번째 트렁크 쇼다. 4년 연속으로 서울을 방문하고 있는데, 앤더슨 앤드 셰퍼드가 이토록 서울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서울의 고객층, 그리고 트렁크 쇼가 열리는 유니페어와의 파트너십 때문이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아니다. 우리 같은 비스포크 테일러는 늘 고객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서울이 남성복과 그루밍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10년간 내가 피티 우오모에서 본 ‘베스트 드레서’는 전부 아시아 출신이었다. 수트를 입어도 답답한 인상을 주지 않고, 훌륭한 소재를 활용해 클래식과 캐주얼을 섞는 솜씨가 무척 뛰어나다. 얼마 전에는 수트를 입고 멧 갈라에 참석한 K-팝 그룹을 봤다. 이런 시도가 계속된다면, 젊은 남성들도 수트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될 거다.
비스포크 수트를 맞추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테일러와 고객 사이에 대화도 필요하다. 고객이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문을 열고 들어가 완성된 수트를 받을 때까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15분, 20분 만에 모든 대화를 마치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회색 수트를 구매하러 와서 2시간 동안 원단만 고르는 이들도 있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는 모든 것을 고객에게 맞춘다. 처음 만난 고객과는 긴 대화를 나누는 편이다. 우리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파악해야 하고, 그는 수트가 제작되는 과정과 원단을 이해해야 하니까. 런던 매장에 들어서면, 고객은 가장 먼저 원단 전문가를 만난다. 이후 팬츠 커터, 코트 커터와 대화를 나눈 뒤 라이닝과 버튼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트리머(Trimmer)를 만난다. 한국에서 열리는 트렁크 쇼에는 코트 커터와 팬츠 커터가 1명씩 동행한다.
원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잠시 여성복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여성복에서는 아직 원단에 관해 탐구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원단 활용법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른 원단의 변화 정도와 특징에서 그렇다고 본다.
한 벌의 맞춤 수트가 완성되기까지 평균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나?
일이 너무 바쁘지 않을 때는 평균 8주가 걸린다. 일이 바쁠 때는 추가적으로 4주 정도의 시간을 둔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와 오랜 기간 관계를 이어온 고객의 경우에는 모든 부분이 빠르게 진행된다. 그의 신체적 특성을 아는 커터와 테일러가 있으니까.
앤더슨 앤드 셰퍼드는 가장 오래된 새빌 로 출신 테일러링 브랜드 중 하나다. 한 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검증을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새빌 로와 테일러링이 수명을 다했다’는 식의 비관적인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뿐 아니라, 모든 테일러링 브랜드는 고객과 협력 관계를 쌓아나간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 지점에서 새빌 로가 종말을 맞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앤더슨 앤드 셰퍼드는 품질 면에서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최근 <비즈니스 오브 패션>과 <보그 비즈니스> 등 다양한 매체가 기성 제품의 품질 하락 현상에 관한 기사를 싣지 않았나. 특정 브랜드의 빈티지 백이 최근 출시된 백보다 만듦새가 좋다는 내용이었다. 맞춤 전문인 우리는 지금도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며, 커터나 재단사 역시 최소 4~5년의 훈련 기간을 거친다.
지속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키워드가 된 점도 주효했다. 테일러링 브랜드들은 예로부터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자르고 남은 원단을 모아 재활용해왔기 때문이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수트는 제작 과정에서 폐기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브랜드를 찾는 소비자가 늘어난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에 근무한 지 20년이 넘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브랜드를 이끌어가며 동시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듯한데.
테일러링 브랜드들은 트렌드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고객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트렌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우리 매장을 방문하는 이들 모두 ‘트렌드 메이커’다. 좋은 예시가 25년째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고객인 스타일리스트 조지 코르티나(George Cortina)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아이템, 그리고 그가 제안하는 아이디어 자체가 트렌드나 다름없다.
패션 비즈니스란 변화 없이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처럼 긴 역사를 지닌 브랜드의 경우에는 ‘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 같은데. 외부에서 바라봤을 때는 그 변화가 타협이나 절충처럼 보일 수 있지 않나. 당신이 CEO가 된 뒤, 앤더슨 앤드 셰퍼드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새빌 로를 떠나 그 옆 클리퍼드 거리로 이사를 간 것과 젊은 테일러를 양성하게 된 것도 큰 변화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에는 언제나 6~7명의 견습생이 있다. 여성 테일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최근 2명의 여성 견습생도 입사했다. 레디 투 웨어 매장을 새로이 오픈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참고로 지금 레디 투 웨어 매장의 디렉터 역시 여성이다! 급진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분명 조금씩 변하고 있다.
사르토리얼, 테일러링, 비스포크… 일반 소비자에게는 굉장히 어렵게 다가오는 단어들이다. 이런 인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레티켓>과도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매장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다양한 나이대의 고객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후 에디터와 테일러링 브랜드가 마냥 어렵고 접근 불가능할 것이라는 대중의 선입견에 대해 한참을 토론했다.
사실 맞춤 수트를 소비하는 젊은 고객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있었다. 그러한 실상과는 다르게, 테일러링 브랜드를 향한 시선은 바뀌지 않았지만! 앤더슨 앤드 셰퍼드뿐 아니라 비슷한 테일러링 브랜드들 역시 예전부터 이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리 매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윈저 공, 찰스 3세와 같은 귀족, 그리고 저니의 브라이언 페리 같은 록 스타까지, 앤더슨 앤드 셰퍼드는 오랫동안 좋은 취향을 지닌 이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그들과 교류하며 찾아낸 공통점이나 특징이 있는지 궁금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윈저 공은 우리 고객이 아니었다. 그의 전담 테일러였던 프레데릭 스콜트(Frederick Scholte)의 유일한 제자가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퍼 앤더슨(Per Anderson)이었을 뿐이다. 우리 고객들은 각기 다른 취향과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이라면,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수트를 즐겨 입는다는 것이다.
다시 여성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마를레네 디트리히나 프랜 레보위츠 같은 여성들이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고객이었다. 프랜 레보위츠의 연락을 처음 받았을 때는 ‘우리는 여성복을 만들지 않는다’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던 걸로 아는데. 지금은 그 입장이 바뀌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여성 고객을 늘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고객층이 다양해지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최근 이어진 웨일스 보너와의 협업 덕분에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앤더슨 앤드 셰퍼드를 찾고 있다. 하지만 여성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한 마케팅을 하는 건 아니다. 제대로 된 여성복을 선보이려면 새로운 테일러를 고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브랜드의 특기인 드레이프 컷에만 집중하고 싶다.
대신 여성 고객이 매장을 방문하면,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재킷이 기성 재킷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한다. 철저히 남성을 위해 만든 재킷을 여성이 입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100년이 넘도록 정식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인 적이 없는 샤넬도 마찬가지다. 샤넬의 백이나 재킷을 멋스럽게 소화하는 남성이 수없이 많은 것처럼, 테일러드 재킷을 입은 여성만이 자아낼 수 있는 멋이 분명히 있다.
웨일스 보너를 먼저 언급해서 말인데, 둘 사이의 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
먼저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가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매장을 방문했다. 몇 달 뒤, 그녀가 우리에게 정식으로 연락했고, 컬렉션에서 선보일 룩을 함께 만들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때 당시 첫 웨일스 보너 삼바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식에 어린 테일러들이 엄청나게 흥분했다. 나 역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고. 이후 그레이스는 여러 번 매장을 방문했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우리 역시 수트를 맞추러 온 고객을 대하듯, 그녀의 아이디어에 잘 어울리는 원단과 라이닝을 추천했다. 피팅 세션도 함께 진행했다.
지금의 패션 시장은 기성복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두가 비스포크 수트를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오래 입으면 입을수록 멋스러운 게 비스포크 수트다. 누군가의 몸에 완벽하게 맞는 기성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개인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해 완성한 맞춤 수트는 시간이 흐르며 온전한 ‘내 것’이 된다.
갑자기 생긴 궁금증인데, 오늘 입은 수트는 앤더슨 앤드 셰퍼드 제품인가?
막스마라의 제품이다. 무엇보다 편안해서 해외 일정이 있을 때는 대부분 막스마라를 선택한다. 옷에 알맞은 원단을 선택하는 솜씨도 늘 뛰어나고.
마지막 질문이다. 개인 인스타그램에서 폴 뉴먼, 스티브 맥퀸, 게리 쿠퍼 등 다양한 스타일 아이콘의 이미지를 봤다. 안다 롤랜드가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은?
앤더슨 앤드 셰퍼드의 고객이기도 했던 게리 쿠퍼. 현재 활동하는 여성 스타 중에서는 언제나 자연스러운 룩을 선보이는 케이트 블란쳇을 꼽고 싶다.
- 포토그래퍼
- 신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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