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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로이드의 시대, 진짜 사랑으로 하드 보디를 이룬 여자들,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4.07.05

스테로이드의 시대, 진짜 사랑으로 하드 보디를 이룬 여자들, ‘러브 라이즈 블리딩’

헬스클럽 직원인 루(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새로운 회원님이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잭키(케이티 오브라이언). 보디빌딩 대회를 준비 중인 그녀의 몸은 근육으로 가득 차 있다. 서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두 여자는 그날 이후 섹스와 스테로이드 주사를 나누며 지낸다. 어느 날 루의 언니 베스가 남편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울부짖는 루를 바라보던 잭키의 분노 게이지는 한계치를 넘어서고, 그녀는 베스의 남편을 죽인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던 루는 잭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아버지 랭스턴(에드 해리스)의 범죄를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루의 뜻대로 되는 일은 없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헬스클럽 벽에 붙은 경구로 시작한다. “포기는 루저들이나 하는 것”, “고통은 몸에서 나약함이 빠져나간다는 뜻”. 문장 사이로 보이는 건 ‘쇠질’에 매진 중인 사람들의 근육이다. 때는 1980년대 후반, 당시 미국은 전 세계에 미국적 가치와 반공주의를 내세웠고, 할리우드는 <람보> <다이하드> <리썰 웨폰> <로보캅> 등의 영화로 발을 맞추며 강한 남성상을 강조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하드 보디’에 열망하며 스테로이드를 주입하고 총 쏘기에 열광하던 시대의 풍경은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려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발목을 잡는 세상에 대한 요약이다. 루의 마을은 사격장을 운영하면서 몰래 총기 밀매로 돈을 버는 아버지가 지배하고 있다. 그런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형부는 걸핏하면 아내를 때린다. 이미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된 이유를 아버지에게서 찾은 루는 언니가 걱정돼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다. 게다가 주인공 루는 한눈에 보기에도 깡마른 사람이고, 레즈비언이라서 조롱을 받는다. 그녀와 만난 잭키는 전혀 여성스럽지 않은 몸 때문에 고향에서 ‘괴물’ 취급을 받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들은 첫눈에 서로가 버텨온 시간을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제목 그대로 사랑은 피를 부른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루’가 자신과 연인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이야기다. 이 결심은 곧 루가 세상 밖으로 향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두 여성이 팀을 이룬 범죄 영화는 많지만, 영화 팬이라면 오히려 크리스찬 슬레이터와 패트리샤 아퀘트가 주연을 맡았던 1993년 작 <트루 로맨스>가 떠오를 것이다. 일본 액션 영화에 경도된 남성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가 더 큰 범죄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을 연출한 로즈 글래스 감독이 배우들에게 참고 작품으로 알려준 <올리버 스톤의 킬러>(1995)가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 작품 또한 불우한 가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이 연인과 함께 탈출해 각종 범죄 행각을 벌이는 이야기다(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쿠엔틴 타란티노가 각본을 썼던 작품이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그 두 편의 장르적 특징과 매력을 참조하면서도 남녀가 아닌 두 여성의 러브 스토리를 통해 신선한 감각을 불어넣는다.

영화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가차 없다. 잭키는 운동과 약으로 키워낸 근육을 총동원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버린다. (이건 괜한 묘사가 아니다.) 그들이 나누는 섹스의 기쁨과 슬픔을 보여주는 묘사도 그만큼 적나라하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인물의 상처와 열망을 보여줄 때도 과감하다. 스테로이드를 몸에 주입하면서 잭키는 근육이 폭발하는 듯한 환영에 빠진다. 누구도 제압할 수 없는 가장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런 식으로 찾아온다. 로즈 글래스 감독은 그런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줄 때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다. 잭키의 근육은 폭발 직전의 상황까지 부풀어 오르고, 최후의 결전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다. 이를 놓고 감각적이거나 스타일리시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인물의 바람과 열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결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런 연출의 힘을 또 한 번 발견할 것이다. 무덤덤하지만 감동적인, 잔인하지만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장면이다. 특히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일 듯하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이다. 7월 10일 개봉.

    강병진(대중문화 저널리스트)
    사진
    ㈜키노라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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