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부인 시대의 책 읽기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책과 출판의 변화가 사회 트렌드에 대한 바로미터 역할을 하던 시절은 끝났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19세 이상 성인 독서율은 43%(1년간 1권 이상 읽은 인구), 이들의 평균 독서량은 3.9권이라고 한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독서 인구를 두고 우리 사회 저변의 심리와 욕망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10년 전인 2013년 통계 속의 독서율 71.4%, 평균 독서량 9.2권과 비교하면 한숨과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 인구 절벽, 고물가 등 국가적 과제가 산적한데 책이 대수냐고 할 사람도 많겠지만 말이다. 책과 출판은 이제 후순위가 되었다. 그러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한심한 심정도 조금은 이해해주시길.
친한 출판 평론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제 책 안 팔린다는 얘기 좀 그만하려고요. 징징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독자들은 오히려 ‘다들 안 읽으니까 나도 읽을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차라리 다들 책을 읽는다고 하면 뒤처지지 않으려고 더 책을 읽지 않겠어요?” 이건 무슨 정신 승리법인가 싶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미디어와 공론장에서 특정 이슈를 더 많이 접할수록 그 이슈에 둔감해져서 행동에 나서지 않는 ‘마취적 역기능’이라는 사회학 개념도 있으니까.
그러나 기현상도 있다. <한겨레신문>은 6월 마지막 주에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소식을 전하며 이런 제목을 달았다. “책은 죽었다고?…서울국제도서전 ‘n차 관람’ 15만 인파 몰렸다.” 정부 지원 철회에도 지난해 13만을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성과가 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일 리는 없다. 반짝 흥행이 지속적 추세가 되려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다만 기자가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기사에서는 두 가지 뚜렷한 흐름이 눈에 잡혔다
첫째, 흔히 MZ세대라고 부르는 2030세대의 독서율이 바닥인 것과는 달리 도서전을 찾는 젊은이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행사를 좋아하고 ‘팝업 스토어’를 즐겨 찾는 경향이 도서전에서도 나타났다는 것인데, 그들은 이제 책을 지식의 묵중한 금고보다는 일상의 즐길 거리로 대하는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을 ‘굿즈’로 보는 현상은 일찌감치 나타난 경향이기는 하다. 내용보다는 표지와 장정에 공들인 <어린 왕자> 같은 가벼운 소품 책자나 굿즈 사은품까지 딸려오는 책 말이다. 도서전의 20대 여성들이 저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는 데 열심이었던 것도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책은 이제 읽는 것이 아니다. 읽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무 시니컬한가? 그러나 둘째, 다른 흐름도 있다. SNS나 사회적 관계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이 관계의 부담보다는 혼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SNS에서 너무나 많은 부정적 경험을 한 이들에게는 진정한 혼자 됨의 시간과 개인의 가치를 맛보게 해주는 독서 경험이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경향은 사실 하나로 보인다. 자기만의 책과 소품을 들고 개인의 진정한 만족을 누리려는 모습 말이다. 과연 그렇다. 최근의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10여 년 전의 책과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어떤 변화가 감지된다. 그것은 ‘자기 계발’에서 ‘자기 배려’로의 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여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문성훈 교수도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그의 설명은 이렇다. “‘자기 배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각자 자신을 보살피고 돌보는 것을 말하며, 내 삶의 주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반면 ‘자기 계발’은 특정한 삶을 성공한 삶으로 전제하고 이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어 그 삶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자기 계발에서는 성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이미 정해져 있기에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 자신을 배려하는 사람에게 삶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할 창작품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자기 배려’는 원래 미셸 푸코가 쓴 말로, 그는 자기 삶을 거의 예술 창작품과 같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예(Art)를 닦고 연마하는 ‘실존의 미학’을 자기 배려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의 베스트셀러나 도서전의 젊은이들에게서 보는 자기 배려의 태도가 과연 ‘실존의 미학’을 추구하려는 시도일까?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최근 베스트셀러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책이다. 아이브 멤버 장원영이 읽었다고 소개한 후 3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서점가에는 쇼펜하우어 붐이 일었고, 비슷비슷하게 급조한 책이 여럿 나왔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을 가진 다른 책도 있다. ‘노’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를 권하는 <세이노의 가르침>을 비롯해 <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와 같은 책이다. 나에 대한, 나를 위한, 나를 말하는 책이다. 요즘은 ‘필사본’ 책이 여럿 나와서 고전 명구를 직접 손으로 쓰면서 휴식과 자기 위안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트렌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향에 대해 섣불리 긍정이나 부정의 가치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독서 경향에서 우리 사회의 어떤 징후를 짚어볼 필요는 있다. 바로 ‘나르시시즘’이라는 경향이다. 요즘의 나르시시즘이 과거와 다른 점은 개인의 내면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요되었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는 무한 경쟁의 조건을 한편에, 소비주의적 쾌락을 다른 편에 숨기고서 개인의 연대를 방해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몰입을 칭송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여성 철학자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 식단 조절을 시작하든, 환경 보호에 나서든 이러한 자기 향상의 부름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것은 반사회적 원리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나르시시즘의 이상을 추구하는 길에서 나는 무한히 고통받으며, 타자들은 나의 성공을 인증할 관객으로 격하된다.”
자기 배려는 책을 통해서든 일상의 실천을 통해서든 우리가 추구할 만한 태도다. 그러나 혹시 그것이 나의 무의식에 강요된 나르시시즘은 아닌가? 진정한 자기 배려는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말한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우리는 좀 더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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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안희곤('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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