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 이주명, 한선화, 신승호의 ‘진짜’ 코미디
영화 <파일럿>에서 코미디의 세계를 주행한 조정석, 이주명, 한선화, 신승호. 함께했기에 가능한 비행운에 대하여.
그는 자연인이다, 조정석
시대의 희극지왕, 생활 연기의 달인. 언론에서 소개한 조정석의 수식어다. 다소 안일하지만 조정석 배우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이 수식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퀴즈를 낸다고 해도 대부분 세 번 안에 그의 이름을 댈 것이다. <보그> 촬영 스튜디오에 들어선 현실의 조정석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유쾌한 이익준 선생이나 벌써 12년 전 캐릭터 ‘납뜩이’가 떠오른다. 부산스럽기보다는 친절하고 밝으며 뭔가 단단한 기운을 가진 사람.
조정석은 대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 중 하나인 코미디물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조정석)이 갑자기 해고되면서 여장을 해 재취업하는 소동을 다룬다. ‘코미디의 정석이 이륙합니다’라는 영화 캐치프레이즈가 말해주듯 조정석이 전면에 드러난다. 제작 발표회 역시 로빈 윌리엄스가 여장을 하고 연기한 추억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언급하며 조정석의 변신에 초점을 맞췄다. 조정석은 게스트나 <헤드윅> 공연 등을 통해 파격 분장에선 다년간의 경험을 축적해왔다. 그렇기에 외모뿐 아니라 연기력을 바탕으로 뼛속까지 여장 코미디를 완성할 것이다. <파일럿>을 연출한 김한결 감독도 “그의 변신과 유머는 외면뿐 아니라 내면도 반영되었죠”라고 말했다. 조정석은 자연스러움이 여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정미라는 캐릭터의 내외면이 설득력이 있어야 관객이 받아들이죠. 얼굴에 테이프를 수십 번이고 붙였다 떼면서 어느 정도 선까지 가야 과하지 않을지 스태프들과 많이 고민했어요. 목소리 톤도 가식적인 하이 톤이 아니라 어떤 음역대에서 소리를 낼지 연구했습니다.” 그의 여장은 단순히 웃기려는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설득력을 위한 매체다.
그는 <파일럿> 시나리오를 받고 사흘 만에 출연을 약속했다. 연락까지 그렇게 걸린 것이지 실은 하루 만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스포일러라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영화의 주제도 굉장히 좋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잘못을 저지른 친구가 어떻게든 재취업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무엇보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잖아요. 슬픈 드라마를 보면 너무 슬프고, 스릴러를 보면 소름 끼치게 빠져들고, 모두 재미의 범주에 들어가죠. 그런 재미를 이 작품에서 발견했어요.”
속전속결은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자신의 감과 안목을 어느 정도 신뢰할까. “내 마음이 동해야 움직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이 이 작품 잘될 것 같다고 권해도 소용없죠.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전적으로 내 선택을 믿고 작품에 몰두해요.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받아들입니다. 거절한 작품이 크게 흥행해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만약 선택이 미흡했던 거라면 ‘다음에는 좀 더 현명해져야지’ 하며 나를 쇄신할 따름이죠.”
이런 태도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조금씩 형성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라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죠.” 그는 남들보다 철이 조금 빨리 들었다고 했는데, 그 연유를 묻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흘리듯이 지난 일을 언급했다. 그는 20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조카도 떠나보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컸고, 제게 무언가를 남겼습니다. 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고, 실패를 배움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도 그중 하나죠.”
이번 작품 또한 선택했으니 전적으로 밀고 나갔다.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은 ‘톤 앤 매너’다. “어떤 작품이든 톤 앤 매너를 가장 신경 써요. 이 영화가 지닌 색채랄까요.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오랜 고심 끝에 결정하는데, 당연히 배우도 이를 체득하고 연기해야 합니다. <파일럿>의 톤 앤 매너는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아니라는 것이 포인트죠.”
김한결 감독이 꼽은 명장면도 극 중 정우가 죄책감과 해방감, 위트, 간절함으로 도심을 달리는 장면이다. 살면서도 그저 웃기기만 하고 슬프기만 한 상황보다는 ‘웃프’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만나기 마련이다. 조정석은 복합적인 감정을 연기하는 방법으로 ‘머리는 키우되 연기할 때는 단순하게’를 강조한다. “텍스트에 표현된 캐릭터는 안에 잘 담아두고 머리는 계속 키웁니다. 이 인물의 전사는 어땠을지 확장해 가늠하고 연기할 때는 하나의 감정으로 임해요. 내가 키운 전사가 자연스럽게 감정에 담길 거라 여깁니다. 연기할 때 이런저런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죠.”
또한 연기할 때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다. “상황마다 1%의 가능성을 떠올리죠. 예를 들어 사람이 슬픈데 웃을 수 있지 않나, 왜 계속 눈물을 흘려야 하지, 자문하죠. 배역을 준비할 때면 틀을 벗어나 확장하려고 노력해요.”
그에게 생활 연기의 달인이란 수식어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생활 연기란 무엇일까요?” 우린 서로 고심하다가 조정석이 대답했다. “자연스럽다가 핵심 아닐까요?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잖아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연기에 묻어나면 그것을 생활 연기라고 불러주지 않나 싶어요.”
‘자연스럽다’. 조정석과 대화하면 빈번히 나오는 단어다. 그에게 유쾌한 이미지를 뒤엎을 강력한 캐릭터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도 “왜 없겠어요. 배우는 자신의 다른 면을 끌어내는 새로운 작품을 늘 기다리지만, 갈급해하지 않으려고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조정석다워요”라고 답한다.
조정석은 이 길로 들어선 것도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함께한 신원호 감독은 조정석을 두고 “일반인을 지향하지만 어쩔 수 없는 끼 때문에 이 직업에 임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라고 표현한 적 있다. 조정석의 표현에 따르면 ‘기타 치는 삼수생’이었던 그는 교회에서 열린 문화의 밤을 통해 놀이처럼 연기를 해봤고, 1년 후 한 번 더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고, 그렇게 대학 연극과까지 입학했다. 입학식 날 정문에 서서 ‘유명한 연기자가 되겠다’가 아니라 ‘공부할 곳이 생겼으니 제대로 해보자’가 다였다. 한마디로 대학 생활에 집중하자였는데, 자연스럽게 오디션 기회가 주어지고 뮤지컬로 데뷔하고, 공연하면서 돈을 버니 더 열심히 했고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자연스럽게 흘러왔을지언정 매 순간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다는 것. “스스로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다들 끼가 많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요. 자연스럽게 이 분야에 온 것도 내 안의 끼 때문일 수 있죠. 어쨌든 제가 순간순간 열심히 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난 6월에는 <헤드윅>의 다섯 번째 시즌을 마쳤다. 2006년 만 25세의 조정석이 처음 헤드윅으로 무대에 섰을 때, 40대가 돼서 이 배역을 다시 연기하고 싶었다. “20대의 헤드윅이 재기 발랄하고 ‘땐땐한’ 목소리라면, 얼마 전에 40대의 내가 한 헤드윅은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농익으면서도 연륜이 담겼죠. 분명 익숙하지만 새로웠어요.” 그가 어릴 적부터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 길에 들어섰지만 정말 치열하게 임해왔거든요. 그만큼 이 분야에 대한 열정이 컸기에, 얼른 세월이 흘러 경험치를 쌓고, 그것이 연기에 담기길 바랐죠. 그런데 시간은 정말 빠르더군요.(웃음)”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운명적인 불안과 욕심, 이주명
처음은 어렵고 떨려서 기억에 남는 법이다. 처음 공항을 찾고 탑승 수속 끝에 인생 첫 비행기 티켓을 받게 됐을 때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다면 당연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를 마치고 비로소 비행기에 탑승해 자리를 잡은 뒤 이륙하고, 환승도 해보고, 끝내 착륙해서 입국 심사를 받고 목적지의 중력을 확실히 느낄 때까지, 그 모든 과정은 온전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많은 사람 앞에 서면 원래 조금 떠는 편이에요. 그런데 아무래도 첫 영화 제작 보고회라 더욱 떨리고 설레고 복잡한 심정이었죠.” <파일럿> 제작 보고회 현장에서 긴장감이 역력해 보였던 배우 이주명에게 그날의 기분을 물었다. 첫 영화로 참석한 첫 공식 석상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니까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같은 걸 이룬 느낌이었어요. 극장의 큰 스크린에 내가 나온다는 것에 대한 설렘?” 이주명이 <파일럿>에서 연기한 윤슬기는 비행기 기장이다. 보통 비행기에서 일하는 여성이라 하면 승무원을 떠올리기 쉽다는 점에서 그런 관성을 부수는 인물처럼 보인다. 심지어 ‘쿨하고 당찬 파일럿’이라는 압축된 설명이 그런 기대감을 부추긴다. 그리고 제작 보고회에서 이주명은 자신이 윤슬기와 65% 정도 닮았다고 말했다. 적지 않지만 압도적인 것도 아닌 65%의 닮음이란 어떤 것일까?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의견을 말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보이나 봐요. 슬기는 정말 그런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남들이 보는 관점의 저를 받아들이면서 슬기를 연기했죠. 슬기를 갑옷처럼 입고 실제의 나는 아니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내가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주명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여길까?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이라 헤아릴까? “원한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잖아요. 저도 곰곰이 돌아봤어요. 왜 다들 그렇게 봐주시는 걸까? 사실 저는 고민도, 생각도 많은 사람인데 옛날부터 그런 사람이 멋있다고 느꼈나 봐요. 그런데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남들에게 널리 드러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아무리 수줍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트레이닝을 하고 또 하면서 스스로 추구했던 바가 조금씩 입혀진 게 아닐까요?”
어쩌면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지승완 때문이 아닐까? 이주명이 연기한 지승완은 생각이 명확하고 세상에 해박했으며 주관이 확실하고 신념이 강하다. 주변에 있다면 고민이 있을 때 찾아가 상담을 받고 싶은 인생 선배 같은 인물이다. 그만큼 배우의 경력 안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 만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길게 활동한 배우는 아니지만 그 작품과 승완이를 사랑해주신 분이 많았기에 저를 통해 그런 애정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싶어요. 저도 승완이가 정말 멋있게 보였거든요. 실제로 승완이를 연기하며 스스로 뭔가 조금 바뀐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여러모로 배운 게 많죠. 그래서 승완이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자신과 닮은 인물을 만나는 반가움도 있지만 살아보지 못한 인생과 인격을 경험해보는 흥미로움이 연기에 빠져드는 궁극의 이유가 되는 배우들이 있다. 이주명도 그런 흥미를 탐닉하는 배우처럼 보인다. “해보지 못한 역할을 가끔씩 혼자 상상해요.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에요.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할까? 저 사람은 왜 그럴까?’ 그래서 경험해보지 못한 장르에서 연기해보면 재밌겠다 싶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이주명이 출연한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유니폼을 입는 역할이라는 것. <스물다섯 스물 하나>에서는 교복을,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서는 경찰복을, 그리고 <파일럿>에서는 항공기 기장복을 입는 역할이다. 이는 유니폼을 통해 어느 정도는 명확하게 읽히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장점이 있다. “제복을 입었을 때 자연스럽게 갖춰지는 게 확실히 있긴 해요. 제복에서 느껴지는 힘이 있으니까 조금 더 당당해지는 면이 있고, 확실히 도움이 돼요. 그래도 내면을 먼저 갖춰야겠죠. ‘나는 파일럿이야’라는 준비가 됐을 때 그런 외형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인생은 우연에서 필연으로 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주명은 수많은 우연에서 잉태된 물음표를 따라 배우라는 필연적 인생에 다다랐다. 친한 사진가의 우연한 제안으로 모델이 됐다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고, 그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물론 하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서는 재능을 인정받아야만 지속 가능한 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안이 있어요. 어쩌면 욕심이라고 할까요?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렇겠죠? 늘 고민이에요. 연기할 때도, 배우로서 공식 석상에 설 때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더 괜찮은 연기를 할 수 있지 않나? 스스로 채찍질도 했다가 뒤늦게 위로도 하고,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조율하죠.”
운명의 실재 여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결국 믿음의 여부로 갈리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믿음은 특정한 경험을 통해 강화된다. 문득 궁금했다. 우연한 계기를 거쳐 배우라는 삶에 당도한 이주명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을 선천적으로 결정된 경로라고 받아들이진 않는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 경험이, 예전에 했던 생각이 다 도움이 됐다는 걸 알았죠. 그때만 해도 연기를 하겠다는 생각을 못했지만 사람을 궁금해했다는 게 애초에 이 일을 할 운명이었나 보다 떠올리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역시 배우가 될 운명이었어.(웃음) 이렇게 긍정적으로 접근하면 현재가 힘들어도 결국 이것도 뭔가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요.” 그렇다면 ‘리틀 전지현’이라는 별명 앞에서도 마냥 긍정적일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어지간히 부담스러운 일 아닐까? “일단 ‘감히 내가?’ 이런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고맙고 좋죠. 그래서 선배님처럼 연기도 잘해야지 다짐도 하고, 좀 더 자신을 가꾸고 애쓰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요.” 역시 뭐든 마음먹고 다스리기 나름이다. 그리고 가진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이주명의 서글서글한 매력을 다시 느꼈다. 역시 사람들이 잘못 본 게 아니다. 민용준 영화 칼럼니스트
나를 지키는 선화적 사고, 한선화
한선화가 연기를 잘한다고 명확하게 느낀 작품은 2021년 작 <강릉>이었다. 영화는 잊었지만 한선화의 대사는 분명히 기억난다. 결혼 신고식이랍시고 남자 친구를 바닷물에 담금질하는 폭력배 동료들에게 “이 끝나면 자가 살아는 있어?”라고 사투리로 툭 내뱉는 장면. 강릉에 정말 그런 여자가 거주 중이고, 왠지 저 결혼의 끝은 해피 엔딩은 아닐 거란 애석한 예감까지 드는 연기였다. 한선화는 “매우 작은 역할이었는데 기억하다니 놀랍군요”라며 고마워했다. 한선화는 그즈음 <술꾼도시여자들(술도녀)>을 만났다. 나는 1회를 보고 추억에 젖어 대학 시절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도 저렇게 밤거리를 적셨는데 말이지.” 대중의 공감을 산 그 작품은 시즌 2까지 제작됐고, 한선화는 배우로서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시즌 2가 끝난 것도 벌써 2년 전이지만 최근까지도 그녀의 인터뷰에는 <술도녀> 이야기가 나올 만큼 잔향이 여전하다.
영화 <파일럿>이 반가운 이유 중 하나도 그녀의 코믹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그> 촬영장 한쪽에는 기술 시사를 하고 온 제작 스태프들이 “선화는 역시 연기를 잘해”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코미디 연기는 경중을 지키기 무척 어렵다. 자칫하면 도를 넘고 어쩌면 혐오스러워진다. 한선화는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력’에 특유의 신박한 말투로 매끄럽게 해냈을 거다. 함께 출연한 배우 조정석은 “선화는 톡톡 튀는 발랄한 에너지와 톤으로 매 장면을 인상적으로 만들었죠”라고 전했다. 김한결 감독은 “코미디의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라고 회상했다. 게다가 즉흥적인 애드리브를 완벽한 타이밍에 터뜨려 촬영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고. 웃음바다라니. 아주 복고적인 표현이지만 그만큼 한선화의 코미디가 현장을 즐겁게 했음이다. 사실 감독이 놀란 한선화의 애드리브는 사전에 여러 버전으로 준비된 것이다. “애드리브는 적재적소에 맞게 쓰여야 시너지를 내잖아요. 그러지 않으면 날아가버리는 말일 뿐이죠. 시퀀스에 어울리는 애드리브를 여러 경우의 수로 준비해갔어요. 다른 배우도 마찬가지지만 사전 준비를 많이 해요.”
한선화는 “코미디 연기를 아직 잘 모른다”고 재차 말했다. “<술도녀> 덕분에 제가 코미디를 잘한다고 여기는 분이 많아요. 하지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는 선뜻 답할 수 없어요. 코미디는 무척 어려운 장르잖아요. 제가 해낼 수 있었던 건 저를 믿어준 감독님, 동료들 덕분이죠. 김한결 감독님은 배우가 어떻게 하는지 일단 먼저 지켜본 뒤에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제 의견도 유연하게 받아줬어요. 그러다 보니 배우로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죠.” 그럼에도 겸손한 그녀가 언급한 자신의 장점은 있다. “코미디물을 촬영하면서 느꼈는데 제가 순간적으로 몸을 적절히 쓰는 유연성은 있더라고요.(웃음)”
한선화가 <파일럿>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조정석과 호흡을 맞추는’ 배역이기 때문이다. 파일럿(한정우)의 동생인 뷰티 유튜버 한정미 역을 맡았다. “조정석 선배님은 누구나 함께하고픈 배우죠. 마트에서 첫 촬영 이후 매 신마다 그의 연기 호흡과 현장을 대하는 태도까지 하나하나 존경스러웠어요.” 한선화는 함께 출연한 신승호, 이주명 배우와는 부딪치는 장면이 많이 없었지만, 언젠가 작품에서 재회하고 싶어 했다. “영화 현장은 사람들의 에너지가 모이는 곳이잖아요. 서로의 기운이 어긋나지 않게 배려하고 즐겁게 촬영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어요. 이들 덕분에 실컷 웃을 수 있는 작품이 완성됐죠.”
사실 한선화는 <술도녀>와 2023년 작 <달짝지근해: 7510>이 흥행해서 그렇지, 연기를 해온 지난 12년 동안 짝사랑하고 외면받는 역할을 주로 해왔다. 하나의 이미지가 강해지면 비슷한 역할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속상할지 몰라요. 하지만 매번 짝사랑하는 역할이라도 글 쓴 작가가 바뀌고 디테일한 상황과 감정이 다르잖아요. 설사 비슷하더라도 내가 다르게 연기하면 된다고 마음먹었어요. 그걸 알아봐주는 분이 있었기에 <술도녀>도 만나고 <파일럿>도 촬영할 수 있었죠.”
아이돌을 은퇴하고 본격적으로 배우를 시작한 한선화가 선입견을 딛고 역할의 비중에 상관없이 꾸준히 활동해온 원동력은 이런 ‘선화식 태도’ 덕분일 거다.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원래 성격이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라면서 좋게 받아들여요. 비슷한 역할이면 내가 다르게 하면 되고,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찾아가서 오디션을 보면 되고요. 그게 저예요.” 한선화는 연기를 해오면서 한 번도 지친 적 없다고 단언했다.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진짜 원동력은 대본과 역할 덕분이죠. 비슷해 보여도 저한테는 늘 새롭고 설렜어요. 이번에는 어떻게 만들어볼까란 욕심도 나고요. 잘해야 사람들이 나를 한 번 더 보고 싶을 테니까요.” 사회 경험치만큼 내공이 보인다고 말하자 한선화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일상에선 나약해요.(웃음)”
일반인도 마찬가지지만, 드러나는 직업을 가진 배우들은 조용히 자신을 다질 시간이 필요하다. 한선화는 걸으면서 ‘셀프 돌봄’을 한다. “몸을 움직이면 마음이 차분해지더라고요.” 등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만큼 산을 좋아하고 평소엔 주로 한강을 걷는다. 중요한 결정을 앞둘 때도 한선화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운동화를 신는다.
걸으며 자주 떠오르는 고민은 ‘다음 작품’이다. “과연 나를 어디에서 불러줄까, 어떤 작품을 만날까. 이런 고민은 제 삶과 같이 간다고 여기기에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최선을 다하려 해요.” 그래서 한선화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 “현실에 충실하고 싶어요. 10대에는 방학 때 어떻게 놀고 성인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떠올렸죠. 하지만 데뷔한 뒤에, 개인적인 목표보다는 소속사와 팀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달성할 것들이 생겼어요. 나만의 특별한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마주하는 기회를 잘 붙잡는 것이 중요했죠. 그러다 보니 미처 생각은 못했지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고요. 경험에 비춰볼 때, 굳이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기보단 현재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해내다 보면 다음 목표가 자연스럽게 생기고 좋은 방향으로 갈 거라 믿어요.” 그럼에도 배우로서 도달하고 싶은 최종 지향점은 있지 않을까. “어디든 어울리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한선화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매번 주연의 삶을 살겠어요. 재미있는 단역도 가리지 않을 거예요. 편식 없이 적재적소란 단어가 떠오르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행복을 찾아서, 신승호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 중저음의 무게감 있는 음성으로 조성하는 위압감. <D.P.>의 황장수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긴장감을 조성한다. <D.P.>는 탈영병을 추적하는 특수 보직을 제목으로 내건 작품이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조직에 만연한 폭력적인 내부 부조리에서 비롯되는 일탈을 추적한다는 건 끝내 그 일탈의 근원지로 돌아가고 짚는 일이 된다. 그런 폭력성을 대변하는 황장수를 연기하는 배우는 그 위압감을 온몸으로 대변해야만 했다. “조금 낡은 용어 같지만 ‘남자 냄새 나는 배우’를 찾았는데 신승호 배우를 발견했어요. 그 나이대의 배우 중에서 그렇게 피지컬이 확실한 배우를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확실히 눈에 띄었죠. 무엇보다도 굉장히 예의가 바른 편이었어요.” <D.P.>를 연출한 한준희 감독은 배우 신승호의 첫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의외로 긴장을 안 하더라고요. <D.P.> 첫 촬영이 정해인 배우한테 신발을 던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신이라 꽤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긴장한 티가 전혀 안 났어요.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신승호에게 한준희 감독의 말을 전하자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멋쩍게 웃다가 차분히 말했다. “<D.P.> 촬영할 때 정말 매 순간 너무 긴장했어요.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상대 배우에게 신발도 던지고, 몸에 올라타서 ‘로열젤리’라고 하면서 얼굴에 침도 뱉으려 하고, 막 뺨 때리고, 그런 걸 연기했으니까 엄청나게 긴장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니 다행이에요.” 알고 보면 포커페이스 아닐까? “오히려 완전히 다 드러나는 스타일이에요. 표정을 못 숨긴다는 의미이기보단 웃고 싶을 때 잘 웃고, 슬플 때 슬퍼하고, 이렇게 감정대로 표현하는 게 편해요. 그럴 때 일의 능률도 오르고요.”
최근 <파일럿> 제작 보고회에서 신승호는 ‘자신이 연기한 무거운 캐릭터와 다른 성격’이라고 밝혔다. 한준희 감독에 따르면 실제로 ‘평소 굉장히 위트 있는 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코미디 장르를 좋아한다’고 말한 신승호에게 <파일럿>에서 연기한 서현석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줄 기회 아니었을까? “사실 ‘항마력이 달리는’ 장면이 꽤 있어요.(웃음) 실제로 제가 쓰지 않는 말을 대사로 해야 하는 순간들?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를 통해 그런 시도를 해보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었어요. 약간 능글맞은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부분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려는 과정에서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연기의 사전적 정의는 “배우가 배역의 인물, 성격, 행동 따위를 표현해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표현하는 일이지, 그 인물이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인식은 꼭 당연하게만 형성되지 않는 법이다. 대중은 배우가 연기한 인물로 배우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배우의 첫인상이란 대체로 그 배우가 처음으로 강력하게 인식시킨 인물의 면면에 가깝기 마련이다. 결국 배우가 그것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물을 강력하게 인식시키는 연기를 해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기는 혼자 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면에서 형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신승호 배우가 일컫는 형님이란 바로 <파일럿>의 주연배우 조정석이다. 신승호가 <파일럿>을 촬영하며 ‘항마력이 달리는’ 기분을 느꼈던 건 극 중 여자인 척하는 조정석에게 반하고 추파를 던지는 인물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을 이겨내는 뻔뻔함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조정석은 든든하게 기댈 수 있는 동료였다. “뭔가 더 나와야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물어봤어요. ‘형님,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러면 까마득한 후배인 제게 항상 진지하게 아이디어를 제안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제안을 무작정 받아들이기보다 정말 괜찮다고 느껴지면 시도하라는 거예요. 사실 오래전부터 선배와 함께하고 싶었어요. 현장에서 보고 듣는 것이 가장 좋은 훈련이니까요. 배우 말고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렇게 여겼고요.”
신승호는 학창 시절부터 축구 선수로 11년을 지내왔다. “대학에 진학할 즈음부터 축구와 멀어졌어요. 축구 자체보다는 선수로 살아갈 삶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특별히 다른 무엇이 되고 싶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축구는 그만둬야겠더라고요.”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크게 대들었고, 서로 말이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길로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신승호는 배우로서 행복할까? “조금 과장하면 특혜 같은 직업이에요. 작품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어떤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배워야 하는 게 있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성장해요. 예를 들어 <파일럿>에서 비행기 기장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뭐든 새롭게 아는 부분이 생기죠. 평소 경험해볼 수 없던 것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게 큰 장점 같아요.” 그렇다면 신승호가 배우로서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은 건 뭘까?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신승호는 ‘다크 히어로’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크 히어로가 멋있으니까? 아니면 액션 연기를 하고 싶어서? “사실 복잡한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상반되는 양면성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험이 궁금하더라고요. 얘가 영웅인지, 악당인지, 확실하게 구별이 안 되는 인물이 있잖아요. 그래서 멋진 캐릭터는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게 궁금해요. 일단 해보지 못한 걸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고요.”
돌아보니 <환혼>에서 연기한 세자 고원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위치상 근엄한 권위를 가진 인물이지만 마냥 권위에 기대지 않고, 뛰어난 무예와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만 때때로 우스꽝스럽고 백치미 넘치는 복잡한 면모를 가졌다. 사실 대본에 없었지만 신승호에게 역할을 주고 싶었던 PD와 작가가 뒤늦게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진짜 감사했죠. 그냥 쓱 언급만 할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서 제게 주셨고 심지어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전적으로 맡기셨어요. 그래서 진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음대로 다 했어요. 그래서 가끔은 연기가 아니라 제가 보이기도 했어요.”
신승호는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리즈 시절 이미지를 쓰고 있다. 배우 같은 유명인은 보통 자기 사진을 쓰는 게 일반적이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 언제부터 썼는지 잘 모르겠어요. 연기 시작할 즈음이었나? 그만큼 오래된 건데, 디카프리오의 리즈 시절은 제 또래 세대가 직접 볼 수 없는 모습이었잖아요. 예를 들면 <타이타닉> 같은 영화가 개봉할 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그런데 그냥 멋있더라고요.” 만약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쓰는 후배 배우를 본다면 어떨까? “왜 그랬는지 묻고 싶겠죠. 난데없는 이유라도 들으면 배우로서 살아가는 삶에 큰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겠고요.”
신승호와 이야기할 때는 바리톤 같은 안정된 음성에서 어떤 기대감이 감지된다. 지금 이 순간도 그가 바라는 내일을 위한 기약일 것이다. 민용준 영화 칼럼니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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