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창의적인 자가 복제만이 살아남는다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도처에 콘텐츠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시작한 포털 사이트의 뉴스 서비스와 블로그의 활성화부터 2005년 출발한 유튜브, 인스타그램(2010), 틱톡(2016) 등 새로운 플랫폼이 생겨날 때마다 콘텐츠의 범주는 확장되어 요즘의 영상 콘텐츠 범람에 이르렀다. 누군가 그랬듯이 아이들은 콘텐츠를 보며 자라고 어른들은 콘텐츠를 보며 잠드는 세상이 왔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디즈니 만화가, 예술 영화는 요약본 클립이, 다큐는 브이로그가, 인터뷰는 ‘술방’이, 엄마의 손맛은 꿀조합과 초간단 레시피 릴스가 대신한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구분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 경계마저 흐릿해져서 생산 과잉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다양한 플랫폼의 출현 앞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콘텐츠를 만들어온 나에게도 콘텐츠라는 단어가 이토록 당연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넘치는 콘텐츠 속에서 유일하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랄까. 영상의 세계는 무한 증식하다 못해 이제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고, 하나의 콘텐츠는 수십 개의 버전(시간별 요약본, 특정 인물에 포커싱한 편집본, 릴스와 쇼츠 등등)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복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의식적으로 바라볼 부분은 동영상 콘텐츠가 빠진 ‘복제’의 늪이다. 한때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Use)’라고 불리던, 하나의 콘텐츠를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에 추가 활용하며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던 마케팅 방식이 라이브, 스트리밍, 릴스 등 플랫폼 기술의 진화와 함께 기존 콘텐츠의 자기 복제를 세포분열처럼 빠르고 효과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금요일 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풀 버전으로 본 <나 혼자 산다>를, 며칠 뒤 스마트폰으로 요약본을 다시 보며 낄낄거리고, 다음 날 출근길에는 특정 발언에 드라마틱한 자막과 배경음을 덧입힌 쇼츠와 릴스를 보며 해당 장면과 대사를 암기하듯 되뇌는 나··· 유일한 위안은 그런 사람이 나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해당 콘텐츠에는 이미 ‘몇 번째 보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댓글이 주르르 달려 있으니까.
이 정도면 복제되는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도플갱어 콘텐츠를 낱낱이 소비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싶다. 16부작 드라마를 1분짜리 짤, 15분짜리 리뷰, 1시간 요약본으로 보고는 콘텐츠를 독파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여 다음 날 친구나 동료와의 대화에 동참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약본을 봤을 뿐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내가 해당 콘텐츠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덕분에 어떤 주제 앞에서도 던질 수 있는 든든한 한마디가 생겼지만 도파민이 넘쳐나는 신나고 흥분되는 순간만을 위해 짧고 굵은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러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든다. 그러나 시대를 역행할 수는 없다. 오늘도 언젠가 본 듯한 콘텐츠를 다시 한번 변함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콘텐츠 제작자로서 팀원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웰메이드 콘텐츠면 충분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해당 콘텐츠를 재해석한 서너 가지 버전의 콘텐츠를 기본적으로 더 제작해야 한다. 단순히 짜깁기하거나 축소하는 수준이 아니라 콘텐츠 형식에 따라 언어와 뉘앙스가 다르니 뇌에도 쉽게 과부하가 찾아온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전환은 본래 이렇게 산만하고 세속적인 가운데 이루어지는 법이다. 콘텐츠의 복제는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앤디 워홀은 일찌감치 예술의 복제라는 화두를 던지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미술은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미술은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의 주장처럼 수많은 문제점이 제기된 대량생산 시대는 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꾸며 꿋꿋하게 전진해왔다. 과거의 예술품이 그러했듯 한동안 콘텐츠 역시 소수의 전유물이었으나 기술 발전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게 되었다.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고, 덕분에 소비자는 콘텐츠에 담긴 스토리텔링뿐 아니라 콘텐츠의 틀과 흐름까지 취사선택하게 됐다. (그러면서 개인이 쥘 수 있는 원본의 아우라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고전 영화와 ‘술방’ 중 무엇이 더 작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현재로서는 무의미한 논쟁이다. “원작만 아우라를 가질 수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 역시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쇼츠를 보고 찾아본 원본 영상은 흐름이 느슨하기 일쑤이며 본래 방송에서는 그냥 맥락에 휩쓸려 지나가는 말도 짧은 클립으로 편집해보면 재미있는 놀릴 거리와 즐길 거리가 된다. 게다가 빛나는 위용을 자랑하던 지상파 방송국 또한 그런 흐름이 싫지 않은 눈치다. SBS 간판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 역시 ‘예능맛ZIP’이라는 유튜브 콘텐츠를 통해 부흥기를 맞이했다. 콘텐츠의 홍수가 아무리 거세도 창의적인 자가 복제는 끝내 살아남는다.(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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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태경('어반북스' 편집장)
- 사진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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