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소울 헤어 살롱을 찾아서_보그 미장원 특집
2024년 대한민국에 있는 미용실은 약 11만3,000곳. 1933년 최초의 조선인 미용사 오엽주가 종로 화신미용부에서 신여성에게 내린 미용의 씨앗은 명동 미스코리아의 대모, 청담 여배우의 유행 스타일 메이커, 그리고 마침내 국경을 넘어 글로벌 K-팝 트렌드세터로 이어진다. 화학과 물리, 스승과 제자, 장인 정신과 서비스 정신이 교차하는 이 특별한 공간을 관통하는 〈보그〉의 미용 장인 이야기.
전국에 있는 미용실은 약 11만3,000곳. 당신은 어느 미용실에 다니고 있나? 나만의 소울 헤어 살롱을 찾아나선 〈보그〉의 헤어 기행.
나는 미용실을 좋아한다. 특유의 기묘함이 흥미롭다. 예뻐지려고 가는 곳인데 가운을 입고 커트보만 두르면 전에 없이 못생겨진다든지, 초면인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앉아 우주인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공유하기도 한다. 소음이 가득하고 곤욕스러운 냄새가 나는 와중에도 권하는 커피는 꼭 맛보게 되는 재밌는 곳이다.
미용실에 대한 첫 기억은 1980년대 초반, 어머니의 동네 친구가 운영하던 작은 가게였다. 머리카락을 꼬부려준 ‘불고데기’가 젖은 수건에 닿으면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치~’ 하고 지져지는 소리가 났는데 미취학 아동에게는 굉장한 ‘고자극’ 공감각이었다. 더 이상 불고데기를 쓰지 않는 시대가 됐을 즈음 이사한 동네에는 마샬 헤어 살롱의 프랜차이즈가 있었다. ‘미스코리아=신데렐라’이던 시절이라 마샬이라는 간판만으로도 손님이 몰리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단정한 학생 단발을 기대했지만, 나에게 미용실은 방학 동안 앞머리 펌을 하거나 갈색 매니큐어를 입히며 잠깐의 일탈을 즐길 수 있는 놀이터였다. 주민등록증을 갖게 된 후엔 본격적으로 대학가 미용실을 투어했다. 힙합에 어울리는 컬러 브리지, 블루 블랙 염색, 이대 앞 은하 미용실의 짧은 보브를 귀 뒤로 넘겨 올리비에 헤어핀으로 고정하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이다.
미용실이 이전만큼 흥미롭지 않아진 건 취직을 하고부터. 잡지 에디터가 되자 셀럽 촬영, 뷰티 노하우 취재, 헤어 룩북 작업 등 다양한 일거리로 여러 청담동 미용실을 드나들게 됐다. 화학과 물리, 도제의 엄격함과 아티스트의 창의력, 장인 정신과 서비스 정신이 교차하는 뷰티 비즈니스 공간을 진심으로 리스펙하지만, 거기 앉아 내 머리를 하는 건 재밌지 않았다. 주차가 쉽고, 여배우의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내 머리를 직접 맡아주며, 카페 못지않은 커피 메뉴판을 갖춘 곳··· 부족한 것이 없는데 재미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나의 무감한 소울을 흔드는 미용실이 나타났다.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 건 <보그> 디지털팀 이소미 에디터. 볼륨 가득한 헤어 컬을 하고 나풀나풀 걷는 그녀는 ‘서울의 몇 대 히피 펌 미용실’을 도장 깨기 하고 있었다. “영등포에 히피 펌 성지가 있대요. 같이 가실래요?” 슬슬 도파민이 돌았다. “일로 마주하는 살롱에는 발길이 잘 가지 않아요. 깨끗하고 환한 인테리어와 송구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응대 등 모든 것이 어쩐지 멋쩍고 어색하게 느껴져서요. 선배는 어때요?” 그래, 미용실은 스타일 이상의 감정적 편안함을 제공해야 하는 곳이지. 그래야 또 가고 싶거든. 아주 개인적인 느낌이라 딱 꼬집어 표현하긴 어렵지만.
날씨 좋은 평일 오전, 휴가를 낸 그녀와 함께 방문한 드보라 미용실에서 두 명의 원장님, 은진과 미숙을 만났다. 오래된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지금 거주하는 동네에 가게를 차렸다. 드보라의 뜻을 물으니 “크리스천이던 전 주인이 쓰던 이름과 간판인데 성경에 나오는 사람이래요. 저는 이걸 그대로 써도 될지 점을 보러 갔지만. 웃기죠!” 그녀들은 빠른 손으로 머리를 만지면서 동시에 유쾌하게 수다도 떨고, 틈틈이 가게 앞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언니고 동생이고 고객이에요.” 우리가 머무는 3시간 동안 머리를 하지 않고 잠시 앉았다 나간 동네 주민만 얼추 네다섯 명, 그중 절반 이상이 먹을 걸 손에 들고 있었다. 열무김치 나눔을 해주신 ‘언니’의 아드님은 군 제대 후 영상 편집을 배우고 있다고 했고, 자전거를 잠시 세운 채 문밖에서 대화를 이어가던 ‘언니’는 우리에게 이 일대 부동산 시세를 알려줬다. 점심은 건빵 간식을 주신 여사님의 분식점에서 먹었다. 부처님처럼 촘촘하게 말아 붙인 로트 위에 스카프를 둘러쓴 채로. 밥 양이 많아 든든한 김밥과 라면을 먹은 후에는 햇살 좋은 주택가를 산책했다. 친하지 않은 후배와 오늘 처음 만난 포토그래퍼, 셋이 걷는 영등포 골목길에서 휴가 중에도 느끼지 못했던 한가한 만족감이 북받쳤다. 역시 미용실은 재미있는 곳이다.
“얇게 잡아 ‘쪼매는’ 야무진 손길, 적합한 호수를 단번에 결정짓는 자신감, 중간중간 롤을 풀어 상태를 체크하는 치밀함! 선배, 저 촉이 와요!” 소미의 예상은 정확했다. 빈틈없이 자리한 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자, 그 어렵다는 ‘뿌리까지 탱글탱글 포실한 히피 컬’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우리의 호들갑에 옆자리 고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날 소미에게 메시지가 왔다. “지나는 유리창마다 제 머리를 비춰 보기 바빠요. 아침에 스타일링이 잘되니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요. 고수는 어디에나 있네요. 우리 또 찾아내요!”
“고객은 매장의 머릿수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헤어 커트의 주인공, 헤어 디자이너 로사노 페레티의 명언이다. 그는 “헤어 살롱은 긴장을 풀고, 느긋한 마음이 들게 하는 친척 집 같은 분위기여야 해요”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러면서 미용실을 공개적이고도 개인적인 집의 공간, ‘거실’에 비유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하이엔드 살롱, 합리적인 가격대의 프랜차이즈, 머리를 하지 않아도 들를 수 있는 동네 사랑방 같은 미용실···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와 서비스의 레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혹시 아직 마음에 드는 헤어 살롱을 찾지 못했나? ‘가장 좋은 미용실’ 말고 가장 편한 미용실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전국 11만3,000곳의 미용실 중 당신의 소울 플레이스가 없을 리 없다. 당신의 머리칼은 계속 자라고 세상엔 재미있는 미용실이 아직 많이 있으니 탐험을 멈추지 말아주기 바란다.
- 포토그래퍼
- 정우영,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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