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천사, 박혜상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도 박혜상의 노래를 들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욕에서의 첫 데뷔 무대에서부터 극찬을 받은 소프라노 박혜상. 두산매거진의 에디토리얼 디렉터이자 두산그룹을 이끄는 박용만 회장이 뉴욕에서 직접 그녀를 만나 인터뷰했다.
뉴욕의 빌딩 숲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스튜디오에서 이른 아침부터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푸른 하늘만큼이나 맑은 목소리는 사방을 둘러싼 유리창에 부딪혀 햇살과 함께 눈부시게 흩어지곤 했다. 투명한 소리 기둥이 여기저기서 힘차게 솟아올랐다. 그 음악의 신전 한가운데엔 소프라노 박혜상이 있었다. “전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찢어진 청바지에 편안한 티셔츠를 즐겨입는다는 이 젊고 자유분방한 성악가는 노래를 불러달라는 사진가의 요구에 흔쾌히 자신이 연습해온 오페라의 한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놀라웠고, 천진하던 얼굴은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갔다. 평범하던 스튜디오는 어느새 근사한 오페라 공연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디에선가 노래를 듣고 뛰어 올라온 꼬마 관객들은 그녀를 에워싸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박수를 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촉망받는 영 아티스트이자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장 중인 박혜상은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이 직접 <보그>에 소개하는 첫 번째 영 아티스트다. 두산매거진의 에디토리얼 디렉터이기도 한 박용만 회장의 수준 높은 감식안과 예술을 향한 열정은 이미 예술인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바다. 지난해 초여름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5위를 차지하며 완벽한 고음의 테크닉과 연기력으로 놀라움을 자아낸 박혜상은 최근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2위로 올라서며 정상의 자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내년 2월로 예정된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La Sonnambula)>에서 주인공 아미나 역을 맡은 박혜상은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뉴욕에서 박용만 회장과 만난 박혜상은 맨해튼 중심의 스튜디오와 링컨센터를 오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화려한 퍼포먼스와 숨 막히는 기교로 관객을 압도하던 그녀는 진실한 자세로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주저 없이 드러냈다.
줄리어드 음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면서 뉴욕에 온 게 2년 전이었어요. 그때의 바람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 같나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성악을 한다는 건 제게 하나의 ‘꿈’이었어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성악도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열정은 있었지만 무언가를 이뤄야겠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현실적으로 봤을 때, 동양인이 서양 문화인 오페라를 서양인들과 함께 하며 좋은 무대를 만든다는 게 쉽진 않거든요. 다만 늘 깨어 있자는 게 제 목표였어요. 그런데 이곳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은 ‘아마도 이 꿈은 실현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희미한 그림을 보여줬어요. 물론 제가 잘나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요. 제가 꿈 꿔왔던 것 이상으로 많은 축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어요.
지난해 11월, 줄리아드 오페라에서 열렸던 로시니의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urco in Italia)>은 소프라노 박혜상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알리는 무대였어요.
그건 정말 한 줄기 빛과도 같았어요. 뉴욕에서의 첫 데뷔 무대였고, 〈뉴욕타임스>와 <오페라뉴스> 같은 잡지에서 호평을 해주었죠. 덕분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이 오페라를 준비하면서 지금껏 한 번도 내보지 못한 극고음을 갖게 됐어요. 발성적으로도 큰 배움을 얻었고요.
주인공 피오릴라 역은 어떻게 맡게 된 거예요?
해마다 연초가 되면 1년간의 공연을 위한 오디션을 보는데 거기서 발탁됐어요. 피오릴라는 상당히 복잡 미묘한 여인이에요. 겉으로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내면엔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캐릭터죠. 한마디로 대단한 여자예요. 캐릭터 연구는 작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지만, 저만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무척 즐거웠어요.
동양인이기 때문에 불리한 점은 없었나요?
유학 온지 얼마 안 됐을 때 얘길 들려줄게요. 세미나 수업 시간에 한 나이 지긋한 매니지먼트 관계자분이 게스트로 강의하러 온 적이 있어요. 질문을 하라고 하기에 어설픈 영어 발음으로 물었죠. “동양인인 저도 세계적인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을까요?” 저에겐 너무도 절실한 문제였지만, 친구들은 웃음을 터뜨렸어요. 그때 교수님께서 그분께 “저 친구 노래는 당신이 꼭 들어봐야만 한다”고, “어떤 이보다 특별한 캐릭터를 가진 친구”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지금 그분은 제 매니저가 되어 너무도 열심히 절 위해 애쓰고 있어요. “너라면 할 수 있어”라고 제게 답해주고 난 후, 우연히 제 노래를 들었다고 해요. 어쩌면 모든 편견은 자신이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스스로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나면 어려워만 보이던 것이 의외로 어렵지 않을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자신감이죠.
오페라에서 한국인 특유의 장점이 발휘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강점은 ‘흥’과 ‘한’이에요. 이 두 가지가 노래 속에 오묘하게 섞일때 우리는 엄청난 파워를 만들어낼 수 있죠. 그런 우리의 감정이 서양 문화에 닿았을 때 오는 짜릿함은 감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믿어요.
평소 목 관리는 어떻게 하죠? 조수미 씨는 목 관리를 위해 술, 담배는 물론이고, 차가운 것이나 뜨거운 것, 튀긴 음식도 먹지 않는다고 하던데, 굉장히 엄격한 자기 관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멀었나 봐요. 특별한 건 없어요. 다만 시끄러운 데는 가급적 피하려 하고, 담배 냄새가 나면 자리를 빨리 뜨는 편이죠. 아! 방금 생각난 건데 밥을 꼭 먹어요. 그리고 많이 먹어요. 하하.
본인의 목소리가 특별하다는 걸 깨달은 건 언제예요?
글쎄요, 특별하다는 건 남들과 구별되게 다르다는 건데, 아직까지 저랑 목소리가 똑같은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해서 제가 남보다 특별하다고는 말을 못하겠어요. 분명한 건 제가 노력형 인간이라는 거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성악가로서의 공식적인 첫 데뷔 무대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예술의전당에서 했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였어요. 이 역할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어요. 어린 나이에 이 역할을 준비하면서 성대결절도 걸려보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어요. 물론 지금 하라고 하면 이때보다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더 잘 준비할 수 있겠지만, 이 역할에 대한 몰입도는 여태까지 했던 어떤 것보다 아주 극단적이고 파워풀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이 끝난 후, 신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인 여파도 무시무시하게 컸으니까요.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에 나오는 줄리에타의 아리아 ‘얼마나 더 눈물을 흘려야 하나요’가 음악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했어요. 어떤 사연이 있나요?
이 곡은 제 첫 콩쿠르곡으로 교수님이 내준 큰 숙제였어요. 줄리엣(줄리에타)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잖아요. 곡 자체를 이해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도저히 안 되겠기에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콩쿠르 이틀 전 저를 부르셨어요. 그리고는 혼신을 다해 이 노래를 만져주셨죠. 집으로 돌아와 녹음기를 재생하고 또 재생했어요. 몇십 번쯤 들었을까요? 눈물이 났어요. 줄리엣의 상황이 마치 나의 아픔처럼 느껴지더군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지금도 모두 다 기억해요. 유학 시절에도 이 노래만큼은 절대로 다른 선생님들이나 코치들에게 들고 가지 않았어요. 그날의 기억과 그 아픔을 계속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요.
지금껏 수많은 소프라노가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불러왔는데,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버전은 누구의 것이죠?
디아나 담라우(Diana Damrau)의 <마술피리>는 가히 명불허전이라고 생각해요. 노래도 노래지만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그녀가 왜 그렇게도 특별한 싱어인지 알려주는 것 같아요.
디아나 담라우는 열두 살에 프랑코 제피렐리의 오페라 영화 <라 트라비아타>를 TV에서 보고 오페라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죠? 소프라노라는 꿈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이런 질문엔 역시 농담이 제격이겠죠? “공부를 못해서 노래했다”거나 “재미있는 게 노래밖에 없어서 노래를 했다”고요. 하하. 노래를 시작하고 난 후엔 저를 가르쳐준 스승님들을 보며 노래를 계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인품을 갖춘 음악가, 음악에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메신저. 스승님들을 통해 그 사랑스러운 음악을 느꼈고, 멈출 수가 없었어요.
반드시 서보고 싶은 무대와 꼭 한 번 맡고 싶은 역할, 또 같이 하고 싶은 성악가가 있을까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와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지금 이곳에서 영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주인공으로 노래를 한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라서요. 많은 준비와 실력, 그리고 운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Why not?” 꿈꾸는 건 돈이 들지 않으니까 허망한 꿈이더라도 마음껏 꿔도 괜찮겠죠? 만약 그런 기회가 닿는다면 하늘을 날 듯 기쁠 것 같아요.
가장 자극이 되는 존재는 누구인가요?
저 자신이 아닐까요? 전 자신감보다는 자존감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자존감은 스스로의 싸움에서 늘 이기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보며 질투하기보단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없이 많은 갈등을 헤치고 다시 일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노래를 하면서 계속 느끼는 건 노래라는 것은 절대 완벽해질 수 없고, 죽을 때까지 진리를 안다고 말하기 힘든 분야인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늘 흥분돼요. 계속해서 배우고 싶고, 알고 싶고, 또 잘해내고 싶은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가져야 된다는 건 어찌 보면 괴로워 보일 수 있지만, 저에겐 제일 맛있는 자극이에요. 계속해서 올라갈 목표가 있다는 거니까요.
숱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왔는데, 본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상은 무엇이죠?
최근 영국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가 가장 의미 있지 않았나 해요. 이를 계기로 영국 코벤트 가든 오페라 극장에서 좋은 오페라로 데뷔도 하게 되었고, 다른 좋은 계기가 많이 생겼거든요. 지금 휴대폰에 저장된 음악은 뭔가요?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이에요. 곧 있을 공연을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여러 성악가의 버전을 번갈아가며 듣는 중이에요.
그 밖에 또 어떤 활동 계획이 있는지 궁금해요.
스페인에서는 테너 도밍고 선생님과 함께 무대에 오를 거예요. 중국에서는 코믹 오페라를 하게 됐고, IMG 아티스트로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의 갈라 콘서트, 미국 필라델피아 챔버 뮤직 리트 콘서트 등을 준비하고 있고요. 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 선생님과 함께 여러 작업이 진행될 거예요. 노래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값지고 지독한 운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죠.
한국에서도 박혜상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요?
최근 KBS <더 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여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잡히지 않았지만 내년엔 좋은 공연으로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성악가로서 당신의 최종 목표가 무엇일지 기대돼요.
지금 제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초심과 감사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버겁기까지한 엄청난 일이 눈앞에서 마구 벌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언제나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잘못된 길로 갈 때 바로잡아주는 좋은 조언자도 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한 계단씩 올라가보려고요. 부디 이 길 끝에 지독한 외로움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정도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수한 음악가가 되어주기를 저 자신에게 바라고요.
- 진행
- 김자연
- 에디터
- 이미혜
- 스타일리스트
- 김예영
- 포토그래퍼
- YOON JUN SEOB
- 스탭
- 헤어&메이크업 / 브릿 코크런(Brit Cochran), 스튜디오 코디네이터 / 김정민
- 장소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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