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드 옴므와 손잡은 최초의 브랜드, 스테판 쿡을 만나다
1988년, 올림픽 열기가 한창이던 서울 한편에서 한국 패션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 중인 우영미 디자이너가 ‘솔리드 옴므’를 론칭한 것. 한국 패션의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솔리드 옴므가 브랜드 역사상 최초로 외부 디자이너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선택한 주인공은 현재 가장 새롭고 낯선 남성복을 선보이는 젊은 브랜드, ‘스테판 쿡’이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하우스 우영미’로 달려갔다. 우영미 디자이너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는 ‘레드’로 뒤덮인 공간에서 스테판 쿡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스테판 쿡과 제이크 버트를 만났다.
<보그 코리아>와는 첫 만남이다. 독자들에게 스테판 쿡이라는 브랜드를 간단히 소개한다면.
제이크 버트(이하 JB): 브랜드의 시작점은 스테판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MA 졸업 컬렉션이었다. 패션 이스트가 그 컬렉션을 눈여겨봤고, 이후 스테판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함께 론칭했다.
스테판 쿡(이하 SC): 그게 2018년이었다.
JB: 론칭 초기 긴자와 런던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 한스타일 등의 리테일러가 우리 제품을 바잉한 것이 이름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후 런던에서 꾸준히 쇼를 선보이고 있고, 몇몇 브랜드와 협업하기도 했다. 데님 브랜드인 리를 비롯해 멀버리와 오늘의 솔리드 옴므까지!
두 번째 서울 방문이다. 지난 3월, 브랜드 인스타그램 계정에 롯데타워 사진을 업로드하기도 했는데, 서울에 대한 감상이 어떠한가? 서울과 런던의 차이점도 궁금하다.
SC: 런던과 비교하면 서울 사람들에게서 좀 더 여유가 느껴진다. 런던보다 훨씬 현대적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고. 올해 초, 인천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미래 도시에 온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히스로 공항 근처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지 않나.
JB: 창의적이거나 세련된 공간이 한곳에만 밀집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런던은 특정 지역에서만 그런 공간을 찾아볼 수 있다. 서울에서 길을 걷다 기분 좋은 발견을 할 확률이 훨씬 높다.
솔리드 옴므와 스테판 쿡의 협업 소식은 상당히 의외였다. 1988년에 론칭한 아시아 브랜드와 2018년 론칭한 영국 브랜드는, 겉보기에는 완벽히 어울리는 한 쌍은 아니니까. 왜 솔리드 옴므가 많고 많은 젊은 디자이너 중 스테판 쿡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스테판 쿡이 협업 제의에 응한 이유는?
솔리드 옴므(이하 SH): 지향점은 다르지만, 스테판 쿡이 진정성 있게 패션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JB: 스테판 쿡과 솔리드 옴므 모두 전형적인 남성복을 변주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서로 지향하는 스타일이 다를지언정, 뿌리는 같다고 해야 할까? 파리에서 열린 솔리드 옴므 컬렉션에 초청받아 우영미 디자이너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녀는 스테판 쿡의 디자인이 어떤 면에서 전형적이지만 늘 고유의 감성이 묻어난다고 말했다. 우리가 보는 솔리드 옴므의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웨어러블하고 현실적이지만, 늘 솔리드 옴므만의 미묘하고 지적인 감성이 느껴지니까. 그런 공통점이 있었기에 우리도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번 캡슐 컬렉션, ‘솔리드 옴므 88’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JB: 나와 스테판이 입고 싶을 법한 옷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작년 9월쯤 우리 둘 다 아메리칸 빈티지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컬렉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터드는 런던의 월레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에 전시되어 있는 15세기 갑옷에서 영감받은 것이다.
SC: 평소 스테판 쿡의 디자인은 ‘웨어러블’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의 타깃이 소수의 마니아층이라면, 이번 캡슐 컬렉션은 대중을 타깃으로 만들었다. 솔리드 옴므의 아카이브를 둘러본 뒤,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쳤다. 스테판 쿡의 포토그래퍼와 아트 디렉터는 물론, 주위 친구들과 ‘우리가 좋아하는 옷’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캔버스 소재 워크 재킷이나 데님 재킷처럼 오랫동안 존재해온 아이템을 선보이되, 스터드 같은 디테일을 가미해 특별함을 더했다.
리와 멀버리, 그리고 이번에는 솔리드 옴므와 함께다. 셋 모두 수십 년에 걸친 역사를 지닌 브랜드인데, 헤리티지 브랜드와 일할 때의 접근 방식이 궁금하다.
JB: 스테판 쿡은 아직 어린 브랜드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선보이는 모든 컬렉션은 새로운 문장과 같다. 리나 멀버리, 솔리드 옴므 같은 브랜드와 일할 때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의 역사를 살펴본 뒤, 모든 것을 해체하는 일이다. 함께하는 입장에서 파트너에 대한 과도한 존경심이나 조심성은 되레 해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해체 후 재조립한 결과물이 브랜드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이니까. 또 이 과정에서 그들의 노하우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는 점도 무척 즐겁다.
SC: 이번 협업에서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하나의 정교한 완성품으로 탈바꿈시키는 솔리드 옴므의 속도와 솜씨에 특히 감탄했다.
이번 캡슐 컬렉션의 표어가 흥미롭다. ‘Solid Homme Designed Between London and Seoul’. 캡슐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과정이 어땠는가?
SH: 브랜드 고유의 색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앞서 스테판과 제이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우리는 그것을 더욱 웨어러블하게 순화하는 식이었다.
SC: 초기에 몇 번의 화상 미팅과 이메일을 거쳐 전체적인 컨셉을 정했다. 구체적인 방향성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올해 3월, 프로젝트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로 한국을 처음 방문해 솔리드 옴므 팀을 만났다.
JB: 바로 그때 각자의 독립적인 시선이 완벽하게 하나로 합쳐졌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 방에서 정말 많은 대화가 치열하게 오갔고. 대부분의 결정은 직관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내려졌다. 헬멧 디테일 크로스 백은 우리가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백에서 탄생했다. 윗부분이 접힌 채로 보관되어 있던 걸 누군가 발견했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다시 스케치했다.
둘 다 어린 시절 밴드에 소속되어 있었고, 지금도 밴드 음악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캠페인 이미지를 보며 에디 슬리먼 특유의 그런지 무드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번 컬렉션을 디자인하며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궁금하다.
JB: 최근 바 이탈리아(Bar Italia)라는 밴드의 곡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런던 출신의 젊은 밴드인데, 그들의 음악을 꼭 한번 들어보길 추천한다. 팩토리 플로어(Factory Floor), 디스 뉴 퓨리탄(These New Puritans), 그리고 세일럼(Salem)의 음악을 들으며 밴드 멤버들의 스타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스타일!
서울 거리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이번 컬렉션 아이템 중 서울과 런던의 소비자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을 하나씩 꼽는다면.
JB: 지난 3월 방문 때 동묘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정처 없이 걷다가 동묘에서 일하고 있는 노인들의 옷차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SC: 팔 토시가 특히 멋있었다. 라프 시몬스의 런웨이가 연상되기도 했고! 아무튼 질문에 대답하자면 서울의 소비자에게는 보라색 후디를 추천하고 싶다. 수백 년 전 갑옷에서 영감받은 아이템이니, 현대적인 서울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지 않을까?
JB: 런던의 여성들에게는 백을 추천하고 싶다. 디젤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이 가방을 메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제 스테판 쿡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함께 브랜드를 운영한 지 벌써 6년이 지났는데 서로의 비전이 완전히 일치하는가?
SC: 전혀. 서로 반대하는 것이 일상이다. 다만 충돌이 있을지언정, ‘내가 너보다 잘 알아’라는 식의 태도는 절대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JB: 스테판과 나는 벌써 13년 차 연인이다. 우리 둘은 취향도 다르고, 야심의 크기도 다르다.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서로 의견을 교환하다 보면 누구의 아이디어가 나은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이 있다. 나만큼 스테판을 잘 아는 사람은 없고, 스테판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서로 역할을 구분하는 편인가, 아니면 모든 일을 함께 하는 편인가?
JB: 각자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것을 발전시킨다. 그 과정에서 서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컬렉션 내에서도 내가 디자인한 룩, 그리고 스테판이 모든 것을 책임진 룩이 공존한다.
백 스트랩, 슬래시 니트웨어, 슬림한 실루엣의 팬츠, 슬래시 더비… 전부 스테판 쿡의 시그니처라고 부를 만한 아이템이다. 웨어러블하면서도 스테판 쿡의 디자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상업성과 창의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JB: 특정 아이템이나 디테일을 브랜드의 시그니처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이번 시즌에는 조금 더 상업적인 디자인을 하자, 혹은 예술적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고. 우리는 컬렉션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제품 카테고리를 결정한다. ‘이번에는 롱 코트를 몇 개, 화려한 셔츠를 몇 개, 짧은 코트를 몇 개 포함하자’는 식으로. 이후 리서치할 때도 그 계획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상업성과 창의성의 균형이 자연스레 맞춰지는 게 아닐까?
SC: 나와 제이크 모두 현실적인 아이템에서 영감을 받는다. 슬래시 디테일의 경우에도, 단순히 ‘아가일 니트를 더 예쁘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으니까. 누구나 아가일 니트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나. 이렇듯 클래식한 아이템을 살짝 비틀고 변주하는 것이 스테판 쿡의 방식이기 때문에 균형이 유지되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지난 2024 F/W 컬렉션에서는 앞서 언급한 시그니처 아이템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의도한 바였나?
JB: 슬래시 디테일을 조금 더 미니멀한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이미지로만 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 있다.
SC: 지금 스테판 쿡은 각종 시그니처를 정제하는 단계에 있다. 어느 정도 소비자층이 확보됐고, 온전히 우리만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체성도 확립됐으니까. 슬래시 디테일을 팔꿈치나 칼라 뒤에 알게 모르게 더하는 식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스테판 쿡의 디자인 철학을 가장 적절하게 요약하는 단 하나의 단어는?
JB: 조금 전 나눈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나와 스테판의 모든 것과 다름없는 이 브랜드를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단으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너무 가깝다고 해야 할까.
SC: 모든 컬렉션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다. 나와 제이크의 분신과도 같은 모든 컬렉션을 하나의 단어로 함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럼 즉석에서 질문을 조금 바꿔보겠다. 브랜드를 운영하고, 디자이너로 살아가며 절대로 깨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하나의 원칙은 무엇인가?
JB: 이번엔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웃음) 스테판과 ‘결국 보기에 예쁜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단한 컨셉, 철학이 담겨 있는 아이템도 ‘예쁜 옷’을 이기지는 못한다. 패션업계란 그런 곳이다.
결국 소비자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것인가?
JB: 소비자보다는 나와 스테판의 눈이라고 하겠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우리니까.
SC: 디자인에 관한 한 어떤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고 싶어서, 이렇게 하면 예쁠 것 같아서 했다’는 대답만으로 충분했으면 한다. 우리 옷을 입음으로써 누군가의 삶이 더 아름다워진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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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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