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에민이 비비안 웨스트우트를 입는다는 것
작고한 친구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자선 경매를 위해 모델로 변신한 현대미술가 트레이시 에민. 개인의 경험을 충격적인 예술로 발화하는 그녀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유일무이한 의상을 입고 유르겐 텔러의 카메라를 응시했다.
내가 비비안을 처음 만난 건 1999년 영국 <보그>에 실릴 화보 촬영장에서였다. 그곳이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정오까지 촬영장으로 가야 했다. 당시 나는 터너상을 위한 작업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지하철을 타고 가겠다고 말하는 내게 <보그>에서는 기어이 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가는 길이 무지막지하게 막혔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보그> 팀에서 내게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묻기에 담배를 갖다달라고 했다. 그러자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프랑스 담배의 일종인 지탄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고개를 드니 담배 주인은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였다. 그녀는 아마도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기분이 별론가요? 몇 시간째 여기서 기다린 난 어떻겠어요!”
우린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그날 바로 친구가 됐다. 그 후 비비안은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 나를 초대했다.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원피스에 빨간 띠가 발뒤꿈치에 달린 프라다 부츠를 신고 패션쇼에 나타난 나에게 비비안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부츠는 도대체 뭐야?” 하이힐을 신고 걷지 못해서 이걸 신었다고 하자 비비안의 남편으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안드레아스 크론탈러(Andreas Kronthaler)가 나보고 신발을 벗으라고 하더니 종이 위에 내 발을 올리고 그걸 따라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트레이시 트레이너(Tracey Trainer)’라는 신발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그 신발은 내 발의 형태에 꼭 맞춰 제작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때부터 쭉 굽 높은 웨스트우드 구두를 신고 온 사방을 뛰어다닐 수 있었다.
비비안이 내게 끌린 것은 내가 자기처럼 이단아라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녀는 내 스타일이 멋지다고 했고, 거침없이 말하고 겁이 없으면서도 선을 결코 넘지 않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비비안은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친구가 된 우리는 처음에 종종 말다툼을 벌였는데 사실 그녀와 그렇게 논쟁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재미있는 건, 그녀와 알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하는 말이 다 맞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져갔다는 사실이다. 비비안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나는 비비안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다. 적어도 같은 옷을 오랫동안 입는다는 점에서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비비안 웨스트우드 드레스는 22년이나 된 것인데 요즘도 그 옷을 즐겨 입는다. 봉제선을 추가했다가, 리폼했다가, 더 작거나 크게 만들면서 자유자재로 입어온 그 드레스를 나는 여전히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꺼내 입는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옷이 두말할 것 없이 편안하다는 것과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더 멋지게 스타일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비안 웨스트우드 하면 과감하고 독특한 디자인을 떠올리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것이 존재한다.
내가 처음으로 비비안의 옷을 입고 그녀의 캠페인에 모습을 비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일로 미술계에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다들 나를 ‘유행에 미친 여자’라고 하거나 ‘돈에 눈이 멀었다’고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예술이 패션 브랜드를 등에 업기 일쑤지만 그걸 보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들 역시 돈을 벌기 위해 협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심지어 나는 돈 때문에 비비안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오직 비비안을 위해 한 일이었다. 우린 계약서 같은 걸 쓰지도 않았다. 그저 비비안과 그녀가 믿고 나아가는 바를 좋아했고 지지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맨 처음 비비안 웨스트우드 옷을 입었을 때 나는 스스로가 섹시해진 느낌이 들었고, 진짜로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비비안과 처음 만난 그 촬영장에서 난생처음으로 그녀의 옷을 자세히 들여다본 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옷에서 느껴지는 품질과 수준급의 파이핑, 이중 봉제 솜씨에 감탄했다. 오직 한 장의 천으로 무한한 주름을 잡고, 비틀어서 멋을 뽐내는 마법 같은 옷도 있었다. 그냥 네모난 천 한 장일 뿐인데 입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것처럼 느껴지는 놀라운 옷이었다. 그날 나는 바로 알았다. 비비안의 옷은 연금술을 부린다는 사실을. 비비안의 옷은 단순히 입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원래부터 내가 옷을 별나게 입긴 했지만 비비안은 언제나 나를 보수적인 취향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내게 덜 평범한 길을 택하라고, 내가 지닌 파격적인 측면을 더 적극적으로 펼치도록 자기만의 방식으로 격려했다. 나는 비비안이 디자이너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말하고 다녔고, 그러면 비비안은 또 그 말에 대해 논쟁을 시작하곤 했다. 비비안이 했던 일 중에는 패션과는 전혀 무관한 일도 많았다.
이제 혼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이끄는 안드레아스가 지난 몇 년간 온갖 한계와 시험에 계속 맞서며 전개하는 노력을 보는 것 역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안드레아스의 작업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고 온갖 경계를 가로질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클래식한 비비안 웨스트우드만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022년 비비안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열린 첫 패션쇼에 참석하는 길에는 여러 감정이 북받쳤다. 안드레아스가 혼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왕처럼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걸 잘 알기에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가 놀랍도록 잘 버텨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지난 6월 25일 크리스티가 선보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컬렉션 경매를 위한 사전 촬영 하루 전날, 비비안의 옷이 담긴 박스 2개가 도착했다. 그러나 난 바로 열어보지 않았다. 일은 잠시 제쳐두고, 그날 저녁 안드레아스가 나의 마게이트 작업실을 찾았을 때 우리는 먼저 수영을 하러 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는 안드레아스와 함께 박스를 열어 옷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옷을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에서 비비안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 묻어났다. 안드레아스는 그 옷을 모델에게 입히길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비안의 친구인 내게 부탁했다. 유르겐 텔러가 사진 촬영을 맡은 것 역시 정말 잘된 일이었다. 그 역시 비비안의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촬영하는 내내 스튜디오의 공기 중에 온기가 가득했고, 그 자리가 비비안을 기리는 작은 추모식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화보 촬영 때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더 친밀하고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만 느낄 수 있는 화목함이 있었다. 그렇게 105 사이즈를 입는 60대의 내가 <보그> 촬영을 하게 된 것이다.
비비안의 유산은 여전히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서 그녀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패션 디자이너보다는 사회운동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다음 세대는 비비안이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비비안이 살아생전에 꿋꿋하게 추구했던 가치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보그> 촬영 내내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휘몰아쳤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살지 마라. 그 일을 왜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언제나 확신을 갖고 행동해라. 그러면 어떤 폭풍도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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