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겨울 트렌드에 녹아든 할머니 웨딩 패션
올해 우리는 할머니 옷장을 샅샅이 파헤쳤습니다.
구두와 스카프, 브로치와 카디건 등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아이템이 속속 쏟아져 나왔죠. 다가올 가을과 겨울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할머니 패션’을 따라잡을 겁니다. 여성복의 고전이자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스커트 수트로 말이죠.
1940년대, 패션계는 실용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최대한 원단을 아끼고 고쳐 입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당시 여성들은 소재 낭비가 거의 없었던 스커트 수트를 전천후로 활용했습니다.
심지어 결혼식에서도요(물론 웨딩드레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요)! 꼭 흰색만이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흑백사진을 보면 블랙 혹은 네이비로 보이는 어두운 컬러도 자주 발견되는데요. 불운과 부정적인 에너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런 색을 사용했다는 속설도 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실용성이었을 겁니다. 관리가 까다로운 화이트보다 블랙 컬러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을 테니까요. 오직 결혼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결혼식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택했던 겁니다.
어깨와 허리선을 강조한 단정한 재킷, 장식을 대신한 포켓과 벨트, 무릎을 웃도는 미디 길이 스커트, 어둡게 물든 실루엣. 당시 여성들은 스커트 수트와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이 실루엣이 2024 F/W 시즌, 몇몇 굵직한 하우스의 런웨이에 연이어 등장했습니다. 하우스마다 디테일은 달랐지만 간결한 구성과 라인은 그 시절과 다를 것이 없었지요. 분위기까지 쏙 빼닮은 건 미우미우였어요. 재킷과 스커트의 라인은 한층 차분해 보였습니다. 진주 목걸이와 메리 제인 슈즈, 고풍스러운 장갑까지, 할머니 옷장에서 막 꺼내온 듯한 액세서리는 겪어본 적 없던 시대의 향수를 제대로 자극했지요.
한편 스텔라 맥카트니는 더 현실적이고, 현대적이었어요. 블레이저 사이즈는 한 치수 커졌고, 스커트 위로는 타이츠의 허리 밴드 부분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죠. 셀프 포트레이트는 트위드 수트로 뉴 룩에 가까운 실루엣을 구현해냈군요.
스키아파렐리와 샤넬은 재킷 대신 카디건을 택했습니다. 포인트는 달랐어요. 스키아파렐리는 각 잡힌 어깨 라인으로 더 견고한 실루엣을 추구했습니다. 반면 샤넬은 원피스와 카디건 위에 벨트를 둘러 한층 느슨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했죠.
런웨이를 수놓은 새카만 스커트 수트가 따스하고 알록달록한 여타 ‘그랜마코어’ 아이템과 다르게 와닿는 이유입니다. 할머니의 정겨운 얼굴 대신 그 시절 여성들의 얼굴이 떠오르죠. 어쩌면 이번 트렌드의 방점은 단순히 옷차림이 아니라 태도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단정한 스커트 수트를 입고 삶을 마주했던 그들의 꼿꼿한 품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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