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또 다른 상상과 사유의 세계를 여는 문고리, ‘Spaces’展

2024.09.12

또 다른 상상과 사유의 세계를 여는 문고리, ‘Spaces’展

북유럽 출신의 작가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의 전시장은 즐거운 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상에 만연한 각종 클리셰와 권력 구조의 문제를 냉소적이되 해학적인 시각, 미니멀리즘과 극사실적 표현 방식으로 그려내는 이들의 작업에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익숙하지만 낯설고, 친근한데 어딘지 요상한 작품들을 둘러보다 보면 어쩐지 기기묘묘한 느낌마저 듭니다. 아마도 삶 곳곳의 부조리한 지점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을 다시 보고, 생각하고, 질문하도록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는 것만 보려 하는 관성을 지니고 있죠.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작업은 끊임없이 이런 관성을 거스르는 반작용의 묘미를 선사하고 예술의 효용을 확인시킵니다.

‘The Amorepacific Pool’, 2024, lights, stainless steel, tiles, paint, Courtesy of the artists

내년 2월 23일까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들의 개인전 <ELMGREEN & DRAGSET: SPACES>는 특히 각종 공간을 통해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 거대한 미술관은 집, 수영장, 레스토랑, 주방, 작가 아틀리에 등 실제 크기로 연출된 5개의 공간으로 구성됩니다(특히 이들은 전시장 초입에 자리한 커다란 집을 구상할 때 한국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죠).

그런데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 공간이라 하기에는 뭔가 조금씩 이상합니다. 현관 앞 장화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침대는 뒤집혀 있으며, 세면기의 배수관은 서로 얽히고 꼬여 있고, 수영장의 물은 모두 빠져 있습니다. 마치 무엇이 이상한지 한번 찾아보라는 듯 곳곳에 배치된 단서들은 관람객의 동선을 이끄는 동시에 또 다른 상상과 사유의 세계를 여는 문고리 역할을 합니다. 이들의 이상한 세계에서는 (관람객들의) 호기심과 (작품 앞에서 엄습하는) 무력감이 동의어가 됩니다.

‘Shadow House’, 2024, mixed media, Courtesy of the artists
‘Separated’, 2021, mirrors, porcelain sinks, taps, stainless steal tubin, 178×150×150cm, Courtesy of the artists
‘Untitled (the kitchen)’, 2024, mixed media, Courtesy of the artists
‘Untitled (the studio)’, 2024, mixed media, Courtesy of the artists

일상적인 현대 공간, 현대적인 일상 공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그리고 공간을 직조하는 질서와 시스템을 보이지 않게 드러내는 작업은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전매특허입니다. 1995년부터 함께 활동한 이들은 화이트 큐브 공간, 그리고 특히 공인받은 중립성을 거침없이 해체하는 초기 퍼포먼스와 조각 작업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았습니다. 2005년 사막 한복판에 세운 영구 설치 작업 ‘프라다 마파(Prada Marfa)’는 프라다 매장의 형태를 띠지만 아무도 들어갈 수도, 물건을 살 수도 없습니다. 이어 2008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덴마크 국가관에서는 〈더 컬렉터스〉라는 작업 혹은 전시를 선보인 바 있습니다. 어느 컬렉터(처럼 보이는 모형)가 (아마도 죽은 채)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영화 같은 장면이었죠. 컬렉터의 공간을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예술계의 구조, 권력, 이면을 다루었고, 이들은 그해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Watching’, 2024, bronze, lacquer, 290×105×85cm, Courtesy of Pace Gallery
‘The Conversation’, 2024, silicone figure, clothing, iPhone, 130×100×60cm, Courtesy of the artists

이번에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저는 이들 특유의 통찰력과 유머가 다름 아닌 솔직함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익숙한 공간에서, 혹은 공간으로 직조된 삶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그럼에도 모두 애써 무시하고 모른 척하는 불편한 진실을 직설적으로 수면 위로 끌어내는 시도가 작품 중심에 있는 거죠. 본래 예술은 어떤 주제를 추상적 언어로 풀어내거나, 집요하게 파헤치면서 결과물로서의 작품으로 완성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작가들은 우리가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일말의 의심과 의혹을 시각화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부류의 현대미술가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합니다. 즉 그들은 가감 없이 보여줄 뿐, 그 이후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진짜 이야기는 당신의 머릿속에서 펼쳐질 테니까요. 이미지와 내러티브가 절묘하게 상생하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작업은 보는 모두를 훌륭한 이야기꾼으로 만듭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사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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