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기 싫어서’, 현실 세태와 판타지의 재치 있는 결합
주인공들이 위장 연애나 결혼을 하다가 진짜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단골 소재다. 그런데 <손해 보기 싫어서>는 주인공 손해영(신민아)이 기혼자에게 치중된 복지 제도를 활용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택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작품 자체는 만화 같은 과장과 귀여운 그래픽, ‘필요 이상으로 잘생긴’ 신비로운 남자 주인공, 돈은 많지만 허술하고 친근한 기업 오너 일가의 스캔들을 버무린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다. 그런데 그 한편에는 당대 도시 비혼 커리어 우먼의 가치관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오래 사귄 남친이 있지만 결혼은 하기 싫은 성우 희성(주민경), 19금 웹소설을 쓰는 자연(한지현) 등 해영의 하우스 메이트들도 이 의도에 잘 부합한다.
사내 복지 혜택을 누리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한다는 건 얼핏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해영의 기획안을 가로챈 회사 동기이자 옛 애인 안우재(고욱)가 ‘사회는 비혼 여성보다 기혼 남성의 말을 신뢰한다’고 자신감을 보일 때,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안우재처럼 자신들이 누리는 정서적 혜택을 인정하는 기혼 남성조차 거의 없다는 게 이 사회의 진정한 비극이다.
이런 제도적, 정서적 자원의 불균형을 고려하더라도, 위장 결혼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해결책이다. 추후 ‘정상 가족’을 형성할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해영은 자신의 성장기 내내 위탁 가정을 운영하면서 친딸인 자신보다 유사 가족에게 더 애정을 쏟는 듯한 어머니 은옥(윤복인)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드라마에서는 그것이 정상 가족 포기 선언의 한 가지 동기로 암시된다.
또 다른 주요 동기는 해영의 성공 욕구다. 일과 가정이 성공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노동환경, 그로 인한 결혼 지연과 출산율 저하를 목도하고 있는 2024년 한국인들에게 해영의 선택은 과장되지만 납득이 가는 풍자다.
애인과 섹스할 때 오르가슴 횟수까지 공평하게 맞추려는 손해영의 태도는 또 다른 측면의 세태 풍자로 작용한다. 데이트 비용과 결혼 후 생활비를 수익 대비로 분담할 것이냐 절대 금액 기준 2분할할 것이냐, 개인 용품은 포함이냐 제외냐, 차량 연료비는 개인비냐 공용비냐, 가사 기획과 실행, 출산, 육아, 명절 모임에 투입된 인적자원은 어떻게 환산할 것이냐 따위 논쟁이 21세기 한국인에게는 낯설지 않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소위 ‘어그로’용 과장이라 해도, 그 안에 담긴 시대정신은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변화하는 사회상에 맞춰 성 역할을 재설정하려는 거대하고 비가역적인 흐름은 개인의 연애 문제에도 촘촘하게 영향을 미치는 중이고, 합리와 효율, 승패, 객관적 수치 따위가 때로 연애의 정서적 가치에 우선하거나 그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손해영’은 이 시대 우리의 자화상이다.
물론 손해영에게는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으로 손색없는 사랑스러움이 있다. 위탁 청소년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대신 싸우거나, 성인이 되고도 그들과 함께 살거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학대받은 아동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것들은 그의 행동 기준인 물리적 손해 여부에서 벗어난 일이므로, 해영은 좋은 일을 하고도 생색내지 않는다. 이건 저 자화상의 주인공들에게 좋은 변명거리다. 한편으로 드라마는 그가 어머니의 위탁 가정 활동 덕분에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는 설정으로 우리의 노이로제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해영의 상대인 지욱(김영대)은 등장부터 압박 면접을 핑계로 성차별 발언을 늘어놓는 기업 채용 담당관들에게 통쾌한 반박을 해 보인다. 이때 그는 가족 없이 옥탑방에 살면서 편의점 알바를 하는 불안정한 처지로 묘사된다. 해영 입장에서 지욱을 사기 결혼 파트너로 지목한 건 그가 만만해서일 수 있지만 앞서 지욱의 가치관을 살펴본 시청자들은 이들의 결합이 필연처럼 느껴진다. 비록 자원은 부족하지만 여성과 공정한 파트너십을 맺을 잠재력이 엿보이는 남자, 그게 초반의 지욱이다. 제 한 몸 건사할 능력을 갖춘 현실 커리어 우먼들의 결핍을 작가가 제대로 파악한 것 같다.
한편으로 이 드라마는 사심 없는 여자가 의도치 않게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맺어진다는 로맨스 판타지의 노골적 욕망에도 충실하다. 작품이 전개되면서 지욱에게 의외의 배경이 있음이 밝혀진다. 현실적인 캐릭터와 로맨스 판타지 사이의 간극은 신민아의 사랑스러운 연기, 훌륭한 코믹 타이밍으로 매끈하게 수습된다.
손해영은 비속어를 자주 쓴다. 희성과 자연도 자주 냉소적인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이런 대사의 사실성이 로맨스 판타지의 허황함과 가벼움을 중화하는 데 일조한다.
덥수룩한 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던 지욱이 웨딩 턱시도를 입자 ‘존잘남’으로 변신한다거나, 해영의 회사 실세인 회장 사모 정아(이일화)가 자연의 작품 애독자라거나, 그 회사 정통 후계자인데 지능은 약간 떨어지는 규현(이상이)이 웹소설에 악플을 달다가 자연과 가까워진다는 설정은 때로 진부하고 때로 비현실적이지만 충분히 유머러스하다. 재치 있는 연출과 능청스러운 연기가 좋은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드라마 중반에는 지욱이 그간 티 안 나게 해영을 지켜보며 배려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들의 로맨스가 더욱 애틋해지기도 했다.
<손해 보기 싫어서>는 캐릭터 설정에 깔린 민감한 사회적 배경을 떠나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다. 이 장르 팬이라면 내 시간을 손해 봤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손해 보기 싫어서>는 총 12부작으로, tvN에서 월·화 오후 8시 40분 방송된다. 티빙, U+모바일tv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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