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과 피부색을 넘어서, 데릭 애덤스
최고의 뮤지엄과 갤러리, 평단과 옥션마저도 이들의 이름을 빼고 예술을 이야기할 순 없다. 데릭 애덤스, 레픽 아나돌, 니콜라스 파티가 한국을 찾았다. 자신의 뿌리와 자연, 사라질 것들에 대한 존중으로 가득한 작품만큼 직접 만난 작가들은 배려 깊고 온화했다.
가고시안 갤러리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팝업 전시의 주인공은 긴 시간 흑인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탐구해온 작가 데릭 애덤스다. 화려한 마네킹으로 가득한 신작에는 국적과 피부색을 넘어선 모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데릭 애덤스(Derrick Adams)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에도 팽팽하게 기능하는 정치적인 힘에 관심이 많다. 매일 듣는 음악, 타인과의 대화, 도심 속 건물의 생김새, 거대한 광고 전광판 등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정체성을 쌓아가며 보고 들은 대로 판단하고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공고히 세운다. 그렇게 같은 공간을 점유한 사람들은 비슷한 문화를 향유하며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 이어진다. 애덤스는 20년 넘게 이런 관심과 관점으로 입체주의 회화, 설치미술, 조각, 비디오아트 등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평범한 순간을 시각적으로 편집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알록달록한 튜브에 몸을 기댄 사람들을 그린 ‘Floaters’ 시리즈만 봐도 알 수 있듯(그는 이 작품을 모티브로 빌보콰와 함께 수영복 컬렉션을 론칭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는 폭력도 슬픔도 없다. 유유자적 흐르는 평온과 낙천적인 행복으로 가득할 뿐. 자신을 포함한 흑인의, 미감,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그가 전 세계 최대 화랑 가고시안 갤러리의 국내 첫 팝업 전시 <Derrick Adams: The Strip>을 통해 마침내 한국을 찾았다(전시는 10월 12일까지 이어진다). 화려한 가발을 쓴 여러 개의 마네킹 두상으로 꽉 찬 쇼윈도와 작품에서 프레임처럼 활약하는 벽돌 형태 부조가 눈에 띄는 신작은 현대사회에서 소비자이자 뮤즈 역할을 모두 훌륭하게 수행하는 흑인 여성을 주제로 한 시리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넘어 아름다움에 대한 동시대의 깊은 고찰이 녹아 있는 작품이 탄생하게 됐다. 애덤스의 국내 첫 개인전이 들어선 아모레퍼시픽 본사 1층의 APMA 캐비닛은 마침 통창으로 둘러싸인 전시 공간. 수많은 도시인이 백화점 쇼윈도를 들여다보듯 애덤스의 작품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자신이 애덤스의 그림이 품은 정치적인 힘에 낱낱이 노출된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가고시안 갤러리가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시기에 궁금증이 컸다. 개인전을 통해 한국을 찾은 소감이 어떤가?
가고시안 갤러리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작가로 선정되어 당연히 아주 기뻤다. 서울이라는 매력적인 도시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것 또한 좋다. 아모레퍼시픽의 APMA 캐비닛이 아름다움과 상업성을 포착하는 내 작업을 선보이기에 아주 훌륭한 공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통창으로 둘러싸인 구조 덕분에 지나가는 행인, 아이들,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과 같이 비미술계 사람들도 내 작업을 우연히, 또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인터뷰를 앞두고 여러 활동에 대한 기사를 살폈다. 작가이자 큐레이터, 교수 등 다양한 커리어는 물론 고향 볼티모어를 위한 활약도 눈에 띄었다.
도시와 문화권은 그곳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술가뿐 아니라 모두에게 그렇다. 내가 성장한 볼티모어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도시로 깊은 역사를 기반으로 음악, 시각예술, 비즈니스를 통틀어 다양한 분야에 대한 문화적 자원을 간직한 땅이다. 그런 도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묻는다면 (라이프)스타일이라 답할 수 있다. 단순히 패션을 넘어 무엇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들었으며, 집 안은 어떻게 꾸미는지, 또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왔는지, 모든 면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살아온 도시가 품은 다양한 요소를 파헤치는 것은 꽤 유용한 방식일 것이다.
유년기의 기억 중 여전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초등학생 때 유난히 동경했던 미술 선생님이 있었다. 일찍이 내 미술적 재능을 발굴하고 지지해준 분으로 지역의 다양한 공모전에 내 그림을 제출해주신 덕분에 종종 상도 받게 됐다. 공모전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면 지역 공동체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았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앞으로 예술가가 되면 그 사랑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며 작가로서 포부를 다졌던 기억이 난다.(웃음)
브루클린으로 이주한 지 20년이 다 됐지만 여전히 볼티모어의 창작자와 시민을 위한 크고 작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그 때문인가?
1993년에 이주했으니 이제 브루클린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간 볼티모어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이어왔다. 볼티모어는 역사는 깊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대도시는 아니다 보니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미술 시장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점이 안타까웠다. 그동안 축적한 미술계 인프라를 통해 볼티모어 작가를 브루클린으로 초청해 전시를 여는 데 도움을 주거나 갤러리스트, 컬렉터와의 자리를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그로 인해 볼티모어 출신 젊은 예술가들이 단단한 공동체로부터 꾸준한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다는 믿음으로 작품 활동을 해나가길 바란다. 그렇다고 젊은 작가들이 전부 대도시로 진출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내가 젊을 때만 해도 작가로 성공하려면 꼭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주해야 했지만 이제 그렇지 않으니까. 더 넓은 무대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색깔이다.
근래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디아스포라적 메시지를 다루는 작가들이 많다. 당신은 어떤 계기로 자전적인 기억과 사소한 감정에 골몰하게 되었나?
학업을 마친 후 작품에 녹이고 싶은 문화적 맥락이나 주제, 미술사적 위치를 고민하게 됐다. 그러면서 주변 환경을 비판적이면서도 미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는데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에 마음이 갔다. 그러나 거창한 역사적 사건을 작품에 담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상적인 순간을 포착해 그것이 현재 나에게 얼마나 역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흑인만의 외양과 스타일, 뉘앙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이유다.
흑인을 향한 정치적 불평등, 외압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 대부분은 흑인이 이제껏 겪어온 억압의 역사를 많은 사람이 잊고 있기 때문에 그걸 상기시키고자 예술을 펼친다. 그로 인해 ‘굉장히 정치적인 작업’을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 작품은 과연 정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산책하며 보게 되는 것들, 흑인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깨닫게 된 것 중 인상적인 순간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그뿐 아니다. 어린 시절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친 여성들, 볼티모어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서도 계속 반추하는 편이다. 고향을 찾을 때면 친구나 가족 집에 칠해진 페인트 색이나 침대보 장식을 유심히 관찰한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키워진 안목, 관점이 어떤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상기해보는 시간이다. 그런 요소야말로 앞서 말한 작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가? 익숙하고 반복적인 노출을 통해 누군가에게 한평생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소이니 말이다. 이런 생각이 예술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나를 개념 미술 작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 작품을 쇼윈도를 통해 보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 대해 깨닫기 쉽진 않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은 수영장에서의 여유로운 한때, 산책, 포옹 등 단순한 행복의 순간이니까.
폭력이나 억압에 대한 노골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평범한 행복, 평온한 감정이 나에게 훨씬 더 강렬한 잔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SNS를 통해 폭력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예술가로서 나는 세상에 이미 차고 넘치는 그런 장면을 재생산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저 자유롭게, 내가 원하고 꿈꾸는 광경을 그리고 싶다. 한 가지 더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내 그림을 통해 많은 흑인 관객이 자신의 주변과 공동체를 돌아보며 잊고 있었던 소소한 행복을 되새기길 바란다는 것이다.
당신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메시지, 세계관은 무엇인가?
대중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깨고, 그들에 대한 시선을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 흑인이 갖는 문화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계속 말할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거시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작품에서 자주 사용하는 색감, 스타일, 질감을 통해 흑인 문화가 세계에 어떻게 전파되어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체감하도록 기여하고 싶다. 기품 있는 세계적인 갤러리에서 내 작품, 흑인의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이 담긴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많은 것을 달성한 느낌이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라 그럴까,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경험인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궁금해진다.
감사하게도 나는 볼티모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고, 심지어 예술적 영감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공동체 속에서 성장했다. 물론 흑인이라서 경험한 편견, 고난의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흑인들은 그 모든 현실을 딛고 흑인 특유의 저항 정신을 발휘해 온갖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일궈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대통령 후보 중에도, 이전 대통령 중에도 흑인이 존재한다. 살면서 누구나 좋은 일, 나쁜 일을 경험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다.
태어난 환경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탈출하기 어려웠던 과거와 달리 이제 SNS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페르소나로 전 세계 어디서든 활동할 수 있다. 이런 변화가 당신에게도 예술적 자유를 허용하는가?
알게 모르게 정해져 있던 루트를 통해 인지도를 얻던 방식을 벗어나 누구나 SNS를 통해 스스로를 알리고, 셀러브리티가 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을 알리고 싶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선택하고, 어필할 수 있다. 예술가가 특정 관객과 컬렉터를 지정해 자신을 알리는 것이 가능하듯이. 이런 직접적인 소통 방식이 젊은 창작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 국가가 같은 문화적 맥락을 공유하는 크로스오버 현상도 꾸준히 나타난다. 그런 세상이기에 흑인 공동체에 대한 이해나 경험 없이도 내가 표현하는 시각적인 구조와 색감, 질감에 매료된 사람들이 흑인 문화를 좋아하는 현상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K-팝처럼 말인가. 개인전 <Derrick Adams: The Strip>은 브루클린 작업실 주변과 전 세계 곳곳에 위치한 뷰티 매장의 쇼윈도 디스플레이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으로 채웠다. 잘 편집된 한 장면인 쇼윈도야말로 SNS 피드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실 이전 작업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제까지 흑인이 지닌 신체적인 아름다움과 개성을 앞세웠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타인에게 평가되기 일쑤인 최종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를 꾸미는 과정 자체에서 느끼는 순수하고도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흑인의 경우 가발을 쓰거나 색색의 드레스를 입고, 화장품을 바르는 과정을 종교의식이나 퍼포먼스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자신을 치장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하는 자기중심적 아름다움이 이번 시리즈의 주제다. 모두가 자기를 치장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자신을 가꾸고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심하는 세상에서 이 주제를 통해 보편적인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겠다고 느꼈다.
당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그리고 삶과 예술,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끊임없이 초점을 조율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나를 조금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예술가가 되도록 만들어준다. 요즘 들어 더더욱 이전에는 무의식적으로 지나쳤을 법한 것들을 자세히 관찰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회화를 넘어 실생활에서 쓰는 물건을 개념적으로 풀어내는 작업도 이어가는 중인데, 브루탈리스트 건축처럼 일상적인 것에 예술성을 더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식이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영감으로 창작하는 즐거움에 빠져 지내느라 삶이 정말 지루할 틈이 없다! 유승현 미술 전문 프리랜스 에디터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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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현(미술 전문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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