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감독의 뮤즈가 된 심은경, ‘더 킬러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과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감독 6인이 참여한 장편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 이명세 감독의 주도 아래 장항준, 김종관, 노덕, 조성환, 윤유경 감독이 참여했다. 영화의 의미 찾기부터 도전적인 스타일까지 감독들의 면면이 도드라진다. 그들을 이어주는 큰 줄기는 배우 심은경이다. 심은경이란 페르소나를 향한 감독들의 해석 또한 작품을 보는 재미다. 〈보그〉에서만큼은 심은경이 감독들을 촬영한다.
지금 영화의 얼굴들, 심은경
심은경은 지난해 8월부터 10월 말까지 <더 킬러스>와 함께 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배우 인생이 이번 작품 전후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더 킬러스>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The Killers)>(1927),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 그리고 배우 심은경에게서 영감을 얻은 단편들로 구성된다. 이명세의 <무성영화>, 장항준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김종관의 <변신>, 노덕의 <업자들>, 조성환의 <인져리 타임>, 윤유경의 <언 땅에 사과나무 심기>에서 우린 미처 몰랐던 심은경의 얼굴을 발견하고 익히 예상한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작품 하나를 이야기할 때도 아름답고 역사적인 영화의 전설들과 노래, 유튜브 채널의 한 캐릭터까지 아우르며 우아하게 설명한다.
이번 프로젝트에 함께한 이유는 무엇인가.
헤밍웨이의 단편을 감독님들이 각자 해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니, 영화 팬으로서 너무나 반가웠다.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6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흐름에 내가 놓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 어떤 배우가 이 제안을 거절할까. 심지어 내가 다 주연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에 놓인다는 설정이 더 좋았다. 20대 후반부터 연기자로서 고민이 많았고 30대가 되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도전하고 싶던 차에 <더 킬러스>의 등장이라니. 운명을 완전히 믿지 않지만, 운명처럼 다가오는 작품이 있는 것 같다.
이명세 감독이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 크리에이터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나는 술을 마시지 않지만 감독님, 스태프들과 남산 언저리의 막걸릿집에 자주 모였다. 그곳에서 영화란 매체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더 킬러스>에서 이명세 감독님이 만드신 <무성영화>는 영화가 무엇인지 돌아보는 작품이다. 감독님께서는 이미지가 영화 전체를 이룬다고 여기신다. 요즘은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시대지만, 궁극적으로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활동사진이었지 않나. 말 그대로 움직이는 이미지. 그 시대의 영화 이미지를 다시 구현해보고자 하셨다. 그래서 감독님과 나는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자크 타티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았다.
물론 다 찾아봤겠다.
당연하다. 사실 처음엔 <무성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감독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느끼라고, 그러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깨닫는다고 말이다. 나는 영화를 해오면서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가 싶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이 대사는 왜 나왔을까, 어떤 의미로 이런 장면이 필요할까, 암호투성이 모스 부호를 해독하듯 습득하려 애썼다. 그 때문에 영화와 거리감을 느낀 적도 있다. 이명세 감독님께서 이런 생각을 재정립해준 덕분에 <무성영화>는 그 자체로 느끼려 했다.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인가.
10대 때는 <써니>(2011)를 찍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했다. 20대 때 <수상한 그녀>(2014)를 만났고, 이제 <더 킬러스>를 전후로 배우로서 삶이 나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작품에 애정이 크다.
<무성영화>는 이미지만 존재하던 초기 영화에 대한 헌사 같은 작품이다. 연기는 어떤 방식으로 준비했나.
아역으로 데뷔하면서 연기라는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 없다. 현장에서 부딪혀가며 익힌 것들을 표현해왔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늘 열심히 준비하지만 어느 순간 자기 복제를 하는 것 같았다. <무성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일주일간의 리허설에서 내내 연습을 반복했다. 이 연습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드라이브 마이 카>(2021)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의 리허설을 들 수 있다. 그는 배우들에게 대본을 펼치고 끊임없이 대사를 반복해서 읽게 하는 연습 방식을 고수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새겨진다. 나도 그렇게 툭 치면 대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끊임없이 읽었던 것 같다. 그런 뒤에 현장에 들어가니 정말 달랐다. 앞으로 이런 연습 방식을 계속할 것 같다.
그 정도면 잠꼬대도 대사로 할 것 같다.
지금 준비 중인 김종관 감독님의 다른 작품도 이렇게 연습하고 있다. 작품은 한 장소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계속 주고받는 연극적인 형식으로 에릭 로메르의 영화 같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사실 대본 없이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뱉거나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가 상의해서 만든 대사가 많고, 김종관 감독님은 짜인 대본이 있긴 하다. 그 대사를 어딜 가든 계속 중얼거린다. 불안해지면 메모장을 켜고 외운 대사를 썼다. 시간이 갈수록 연습이란 정말 중요하구나 절감한다. 아이돌들도 넋을 놓다가도 자신의 음악이 나오면 춤이 절로 나온다. 얼마나 연습했으면 그럴까. 나도 내 몸에 완전히 익혀놓아야 현장에서 상황이 바뀌어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킬러스>는 심은경 배우의 다양한 얼굴을 발견하는 재미가 크다. 개인적으로 김종관 감독의 <변신>에서 나오는 그로테스크하지만 정적인 흡혈귀 바텐더가 인상적이다. 뜻밖에 맛본 피 맛에 자기도 모르게 혀가 반응하는 미세한 떨림이 놀라웠다.
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2023)에서 잭(잭 니콜슨)이 환각을 보는 장면에서 참고했다. <변신>의 바텐더는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 상상 속 인물인지 경계가 모호했으면 했기 때문이다. 나를 이런 역할에 캐스팅해준 감독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목소리 톤도 좀 더 낮게 바꾸고 나름대로 내 안의 ‘변신’을 도모한 작품이다.
근래 가장 행복했던 때를 <더 킬러스> 촬영 기간이라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참여한 모든 감독님, 스태프들이 너무 선하다. 각양각색의 개성이 있는 감독들이 한뜻으로 모이기 쉽지 않은데, <더 킬러스>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뛰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뿐이라는 마음에 더 열심히 임했던 거 같다. 한마디로 내가 배우로서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같이 영화를 만든다’란 감각이 컸기에 특별하다.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에서는 끝까지 심은경 배우가 실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에 잡지에 인쇄된 사진으로 등장한 것이 전부다.
처음엔 감독님께서 “라디오에 은경 씨 목소리가 나오면 어떨까요?” 하셨지만, 그 시절 라디오 느낌을 내가 구현할지 걱정됐다. 그 분위기에 맞는 성우분이 하시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싶었다. 차라리 잡지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가 빠지는 것이 더 재미있겠다 싶었다. <더 킬러스>는 나에게 고전소설 <구운몽>과 조금 비슷했다. 나라는 사람은 한 명인데 이 6편의 작품에서 새롭게 환생해, 짧지도 길지도 않게 그 시간을 살아봤기 때문이다. 나비가 된 장자, 장자가 된 나비가 된 것처럼 기묘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이런 얘기를 하니 장항준 감독님이 “오, 은경 씨!” 하면서 장난스럽게 감탄하셨다.
제일 고전한 작품은 무엇인가.
노덕 감독님의 <업자들>이 <더 킬러스>의 첫 크랭크인이었다. 대본을 봤을 때 당연히 감정 변화가 많은 소민이란 역할을 탐냈다. 납치되어서 살려달라고 빌다가 원망했다가 엄마 이야기하다 울고 마지막엔 돌변하고. 이 역할을 하면 별별 말에, 갖가지 행동을 취하면서 굉장히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연습에 들어가니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한여름에 산속에서 촬영하느라 다들 더위를 먹은 듯 혼미해져갔다.(웃음) 후시녹음도 무척 길었다. 사실 노덕 감독님께서 통째로 재차 녹음하는 날 보고 무서우니 제발 그만하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조성환 감독의 <인져리 타임>은 슬프고 가련한 마블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이런 장르가 한국에서 나온다니 놀라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초능력이 있지만 그조차 마음의 상처에서 발현돼 불완전한 것들이다. 타임 슬립 능력자지만 겨우 동전을 옮기고도 지쳐서 누워 있어야 한다. 내가 맡은 아빈은 극 중 바리스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설득시켜야 한다. 준비할 때 개그맨 강유미 씨가 유튜브 채널에서 선보인 ‘도믿걸’이 떠올랐다. 뭔가 수상해 보이는 분위기를 가져오고 싶었다. 또 일본에서 동요를 부르는 노노카라는 아이가 있는데 생방송 중에 멍하니 있는 모습이 있다. 감독님에게 그 아이처럼 비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는데 좋아하셨다. 사실 처음엔 이 작품이 <더 킬러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물었다. 적어도 살인자가 등장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관념적인 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감독님은 결국 따뜻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윤유경 감독의 <언 땅에 사과나무 심기>가 가장 슬펐다. 우주 미아로 수십 년을 떠돈 노장 킬러와 그를 찾아간 젊은 킬러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첫 우주 영화다.
어쩌다가 먼 미래에 태어나 우주로 떠나게 되었다.(웃음)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가 떠오르는 작품이다. 내가 맡은 역할은 눈빛이 죽은 젊은 킬러다. 프로파간다적인 내용이 나오는 디즈니의 옛 단편을 참고했다. 그런 상황을 살아가며 사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인류. 그가 눈빛을 찾아가는 순간이 이 영화의 포인트일 수 있다.
작품이나 역할을 설명할 때 참고한 아카이브를 자주 이야기한다.
할 수 있다면 많이 찾아보려고 한다. 하나를 만나면 파생되는 것들도 많다.
평소에도 책, 음악, 영화를 많이 접한다. 그 작품과 아티스트에 대한 찬양도 서슴지 않는다.
존경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헤밍웨이가 남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심은경은 휴대폰을 꺼내 글을 읽었다.) “한 작가가 그가 갈 수 있는 먼 곳을 넘어,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그 먼 곳까지 자신을 몰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과거에 그런 위대한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도 존경을 담아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자 한다.
먼 곳까지 자신을 몰아가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까.
그 용기가 내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단편적이지 않고 나중에도 남는 것들을 해나가고 싶다. 내가 용기 있게 뭔가 해내겠다는 대단한 포부는 없다. 그저 계속 안주하면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속 공부하고 탐색할 것이며, 무엇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을 넓혀갈 것이다.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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