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 리얼리티 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흑백요리사>)은 한국 미식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이정표다. 미슐랭 스타 셰프와 조리명장부터 작지만 트렌디한 식당의 오너 셰프, 인플루언서, 독학으로 요리를 배운 재야 고수까지, 다양한 출연진 100인을 모았다.
쇼 초반에는 ‘흑수저’, ‘백수저’로 색깔을 나누고 계급을 강조하는 방식에 의구심이 든 게 사실이다. 타이틀, 업력, 인지도에서 차이가 확연한 극단의 캐릭터들도 있지만 구분이 모호한 출연자도 있기 때문이다. 흑수저 20명과 백수저 20명이 1:1 대결을 벌인 결과 동수의 흑수저와 백수저가 살아남아 3차전 흑백 팀전을 벌인다는 전개는 각본처럼 아주 들어맞는다. 제작진의 운이 좋았다고 해두자. 그럼에도 단계가 거듭되고 생존자가 추려질수록 백수저의 노련미와 흑수저의 근성이 대비되면서 포맷의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고 있다. 이 쇼가 롱런한다면 우승 여부를 떠나 <흑백요리사>가 인정한 ‘백수저’라는 게 요리사의 또 다른 명예가 될 수도 있겠다.
각기 다른 장르의 요리를 하는 100인을 어떻게 공정하게 평가하는가는 아마도 이 쇼가 풀어야 할 첫째 난제였을 것이다. 백종원과 안성재를 메인 심사 위원으로 둔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식재료, 유통, 조리, 비즈니스, 시식 등 전방위에서 높은 경험치와 통찰력을 가진 백종원은 당연히 한국 푸드 쇼의 1순위 게스트다. 다만 기존의 대중적인 이미지 때문에 파인다이닝을 평가할 때 신뢰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미슐랭 3스타 셰프 안성재가 균형을 잡아준다. 두 사람은 과제와 재료 이해도, 조리의 정밀함 등 보편타당한 기준을 제시하며 참가자와 시청자를 설득해낸다. 2차전 블라인드 테스트는 경쟁자뿐 아니라 심사 위원의 역량도 검증하는 무대였다. 제작진은 그들이 눈을 가리고도 요리를 정확히 묘사하는 모습을 통해 심사 위원의 권위를 확보하고, 이후 시청자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방송 초반 <흑백요리사>는 미디어 윤리에 민감한 시청자로부터 찬사와 지적을 동시에 받았다. 여성 요리사를 ‘어머니’, ‘이모’ 등 가족 호칭으로 부르는 장면이 전송되어 성차별 논란이 일었고, 이건 분명 제작진이 숙고해야 할 의견이다. 반면 안성재 셰프가 자신만만한 남성 출연자를 기술적 평가로 압도하고, 실력에 비해 겸손해 보이는 여성 급식 노동자에게는 부드러운 태도로 임한 것이 호평을 받았다. 요리 쇼의 특성상 비건에게는 잔혹한 장면이 많이 펼쳐지는데, 초반 탈락하긴 했으나 창의적인 비건 요리가 쇼에 소개된 것도 반갑다. 말하자면 <흑백요리사>는 일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여러 대중이 공감할 포인트를 잘 짚어낸 쇼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매력은 경쟁자의 면면이다. 요리뿐 아니라 태도에서도 대가의 풍모를 보인 백수저들이 화제의 중심이다. 여경래는 왜 심사 위원이 아니라 경쟁자인가 의아할 정도로 아이코닉한 인물인데, 그가 후배들을 인정하거나 응원하고,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고, 간발의 차이로 탈락하고도 웃으며 쇼를 떠나는 모습은 존경심을 자아낸다. 미슐랭 1스타 셰프인 파브리와 조셉 리저우드는 ‘외국인의 시선으로 한식을 재해석한다’는 명분을 들고 나와 져도 지는 게 아닌 게임을 펼쳤다. 성의 있는 한국어, 긍정적인 태도로도 시청자의 호감을 샀다. 이들뿐 아니라 다수의 백수저와 파인다이닝 출신 흑수저 참가자는 외식 산업이 기술, 예술, 육체노동, 서비스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우아하게 일깨운다. 프레젠테이션 방식, 피드백을 수용하는 자세, 소비자 파악, 팀전에서 각자의 타이틀을 내려놓고 재빨리 새로운 지휘 체계에 적응하는 모습 등 곳곳에서 훈련의 깊이가 드러났다.
한국은 나이와 경력으로 끝없이 지위 고하를 나누는 권위주의 국가다. 많은 한국인이 거기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막상은 체제에 순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타인의 권위가 도전받는 것에 대신 위기감을 느끼고, 권위와 실력이 비례하는 모습에는 유별난 희열을 보인다. 그런데 이 쇼는 자의식 강한 크레이지 셰프가 아니라 겸허한 와중에 실력으로 권위를 증명하는 고수들을 조명함으로써 시청자에게 쾌감을 안겨준다. 한식, 급식, 배달 노동자 출신 중식 요리사 등을 언더독으로 강조한 전략도 효과를 보고 있다. 한국 대중의 애정, 하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도에 비해 평가절하된 존재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기 때문에 이들의 도전은 무리나 무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국인의 정서에 딱 맞는 경연이다.
결국 <흑백요리사>는 승패를 떠나 대중이 출연자 각자의 요리 세계와 경험을 궁금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쇼가 시작된 후 파인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한국은 아직 파인다이닝에도 ‘가성비’를 따질 정도로 요리 문화가 과도기에 있는 나라다. 대용량 요리 대결에서 흑수저 팀의 리조토를 두고 “훌륭한 알덴테지만 한국 대중은 덜 익었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백종원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게 현실 방증이다. <흑백요리사>는 식도락을 콘텐츠로 승화시킨 먹방, 요리 대중화를 이끈 쿠킹 쇼, 셀러브리티 셰프들을 탄생시킨 예능 프로그램에 이어, 한국 미식 신의 다음 단계를 여는 좋은 전환점이 되어줄 작품이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은 총 12부작 리얼리티 쇼로, 넷플릭스에서 10월 8일 마지막 회가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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