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란제리 붐
지금 강남 한복판에는 야릇한 가터벨트와 코르셋부터 고급스러운 자수 브래지어와 앙증맞은 브리프가 쇼윈도를 장식 중이다. 값비싼 수입 란제리가 갑자기 한국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이유.
오후쯤 방송되는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의 청취자 사연 가운데 단골 소재 하나. 바로 속옷이다. 속옷이 변변치 않은아내가 안쓰러워 난생처음 속옷 가게에 가봤다는 남편의 감동 사연부터 남편이 큰맘 먹고 준 옷값을 죄다 고가 속옷 세트에 질러버렸다는 통 큰 주부 등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영역이기에 말도 많고 사연도 많은 게 란제리다. 바로 그 란제리가 요즘 우리 여자들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비비안과 비너스, 와코루와 트라이엄프가 주를 이뤘던 한국 란제리 마켓에 수입산 란제리가 붐을 일으키는 중.
수입 란제리가 전성기를 누린 건 2000년대 전 · 후반부터다.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와 에바 헤르지고바를 내세운 원더브라 정도? 그러나 요즘은 망사 보디수트와 가터벨트 같은 하드코어 란제리부터 섬세한 자수가 수놓인 프랑스산 레이스 슬립과 브리프 등 좀더 적극적이고 다채로워지고 있다. 덕분에 외국이나 온라인 매장을 뒤지지 않더라도 서울 중심가에서 취향대로 란제리를 살 수 있는 시대. 그 가운데 2년 전 론칭한 이태리 브랜드 ‘라펠라(La Perla)’는 수입 란제리 유행에 불을 지폈다. 라펠라는 얼마 전 도산공원 매장에서 자리를 옮겨 청담동 명품 거리로 이전했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프랑스 브랜드 ‘에탐(Etam)’은 강남역에 매장을 열었다. ‘과연 팔릴까’ 싶었던 영국 란제리 브랜드 ‘아장 프로보카퇴르’ 매장 역시 청담동에 자리 잡은 지 오래고, 아장 프로보카퇴르의 세컨드 라벨 ‘라장(L’Agent)’은 요즘 가장 ‘핫’하다는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입점했다.
“란제리 시장이 커진 건 사실입니다.” 라펠라 코리아의 김유미 대표는 그 배경으로 심미적 이유를 꼽는다. “한국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많이 달라졌어요. 란제리, 그 자체에 대해 많이 관대해졌죠. 고급 란제리 구매가 늘어난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곳에 아낌없이 투자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 고가 수입 란제리의 인기는 다른 브랜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고가 라인을 강화한 아장 프로보카퇴르가 대표적 예다. “아장 프로보카퇴르는 워낙 컨셉이 확실해 마니아층이 두터워요. 20대 아가씨부터 중년 여성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들이 아장의 란제리를 즐기죠.” 발렌타인이나 연말 시즌이 되면 브라와 브리프, 서스펜더 3종이 불티나게 팔리곤 하지만, 향수나 향초 같은 엔트리 아이템도 인기라고 전한다. “뷰티 제품은 올리브영에도 입점돼 있어요. 엔트리 아이템으로 쉽게 브랜드를 접할 수 있는 셈이죠.” 한편 라장은 아장 프로보카퇴르의 젊은 버전이다. “아장 디자이너들이 같이 작업하는 브랜드입니다. 아장 분위기는 그대로 유지하되 합리적인 가격으로 즐길 수 있죠.”
그런가 하면 ‘한류’ 또한 수입 란제리 브랜드의 국내 입성을 부추긴다. 라펠라의 아시아 디렉터 키아라 스칼리아는 한국 드라마와 음악, 패션이 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한국은 결코 놓칠 수 없는 마켓이라고 전한다. “중국 고객들은 청담 플래그십 매장에서 ‘풀’ 컬렉션을 사가곤 해요. 수천만 원어치를 쓰기도 하죠.” 에탐의 첫 매장으로 선택된 강남역 매장에도 수많은 외국 관광객으로 붐빈다. “프랑스 본사에서 강남역을 선호했습니다. 20~30대를 겨냥한 에탐의 디자인 스펙트럼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남’이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니까요.” 김유미 대표 역시 매장위치를 강조했다. “이웃 매장의 라벨도 중요해요. 고객들의 쇼핑 예산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게다가 고객의 쇼핑 패턴도 바뀌고 있다. “기본형 제품보다 베스트셀러, 혹은 고가 라인부터 보여달라는 고객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수입 란제리 시장이 커질 수밖에요.”
값비싼 수입 란제리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고급 소재가 주는 섬세한 디테일과 내구성. 하긴 최고급 실크와 레이스로 만든 란제리의 예민하고 보드라운 감촉을 어떤 옷과 비교할까? 수입 란제리를 즐겨 입는 어느 패션 피플은 고가 란제리가 충분히 값어치를 한다고 귀띔한다. “저가 브랜드의 속옷은 레이스가 금세 헐거나 보풀이 일어 지저분해져요. 레이온이나 ‘허접’한 레이스와 비교할 수 없는 천연 실크와 프랑스산 레이스는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모를걸요?” 하지만 한 벌에 100만원이 넘는 속옷을 입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 에탐은 브라와 브리프 세트가 1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라장이나 프린세스 탐탐, 샹티 역시 꽤 합리적인 편. 좋은 란제리의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나? 뻔한 얘기지만, 좋은 소재로 만들어 몸에 완벽히 잘 맞는 사이즈의 란제리다. 우리 여자의 몸과 가장 밀접한 옷이 란제리니까.
- 에디터
- 손은영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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