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S/S 파리 패션 위크 DAY 4
로에베에서 10년간 일한 조나단 앤더슨,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내건 요지 야마모토와 빅토리아 베컴. 이들의 이름만큼 확실한 개성이 또 있을까요? 세 디자이너는 이번에도 정도를 걸었습니다. 화려한 볼거리로 이목을 끄는 대신 오로지 옷으로 이야기하고, 보여줬죠. 파리 패션 위크 4일 차, 오늘의 쇼를 소개합니다.
로에베(@loewe)
2013년 조나단 앤더슨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로에베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로에베를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하우스로 만들어놓았죠. 그 10주년을 거창하게 기념할 만도 하건만, 쇼장은 허전할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컨셉은 ‘무소음’, 화이트 큐브처럼 새하얀 공간에 설치된 구조물이라고는 중앙에 세운 트레이시 에민의 청동 새뿐이었지요.
시선을 둘 곳은 오직 옷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옷에는 그가 지금껏 로에베에서 작업해온 모든 흔적이 고스란히 그리고 침착하게 담겨 있었죠. 볼륨감 있는 팬츠와 정교하게 테일러링된 블레이저, 클래식한 가죽 코트와 드레스 등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절제된 커팅을 자랑했습니다. 오프닝을 장식한 크리놀린 드레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스니커즈를 신고 걷는 모델들은 스웨트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것처럼 편안하고 캐주얼해 보였죠. 오랜만에 마주하는 ‘앤더슨다운’ 방식이었습니다. 깃털로 만든 티셔츠에는 모차르트, 쇼팽, 반 고흐와 마네의 작품 등이 새겨져 있었어요. 밴드 티셔츠처럼 말이지요. 요란하진 않았지만 지난 10년을 추억하기엔 알찬 쇼였습니다. 조나단 앤더슨은 게스트들에게 이번 쇼의 초대장과 함께 금빛 반지를 보냈습니다. 미래의 로에베와도 함께할 것을 약속받은 느낌이었죠.
요지 야마모토(@yohjiyamamotoofficial)
해체주의의 대가, 요지 야마모토의 쇼는 피카소가 남긴 “라파엘로처럼 그리기까지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는 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물을 ‘망가진 옷차림(Broken Outfits)’이라 명명했어요. 컬렉션은 말 그대로 아이가 마구잡이로 덕지덕지 붙인 것처럼 무질서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치밀한 정성이 담겨 있었죠. 기존 패션 ‘규칙’이나 개념은 모두 벗어던진 듯했습니다. 코트 한 벌에서 느낄 수 있는 질감만 몇 가지였는지 모릅니다. 모델들은 컷아웃 원단 사이로 손을 꽂아 넣었고요. 치마 밑으로 튀어나온 해진 조각과 엉성하게 달랑이는 스트랩, 무심하게 휘감은 듯한 레이스 원단 등 모든 디테일은 복잡하되 아름다웠습니다. 컬렉션을 채운 방대한 종류의 원단은 지난 수년간 그의 컬렉션을 퍼즐 조각처럼 풀어놓은 듯했지요.
마지막 섹션은 레너드 코헨의 ‘You Want It Darker’를 샘플링한 야마모토의 목소리와 함께 펼쳐졌습니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검은색 베일을 두른 모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그의 목소리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우러졌죠. 어둠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열정을 보는 듯했거든요.
빅토리아 베컴(@victoriabeckham)
빅토리아 베컴은 ‘옷장’에 대한 탐구를 성실하게 이어갔습니다. 지난 시즌에는 옷걸이에 걸린 옷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이번에는 옷을 벗는 행위 자체에 집중했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옷을 감싸는 피부와 실루엣으로 흘러갔습니다. 바지 한쪽에 길게 난 슬릿 디테일 사이로 허벅지와 주머니 안감이 비쳤습니다. 치마와 바지의 허릿단은 벨트를 푼 것처럼 풀려 있었고, 블레이저의 한쪽 소매는 생략되었지요.
실험 정신은 소재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레진 유약을 입힌 원단을 옷감으로 삼은 것인데요. 옷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그대로 포착한 듯한 실루엣은 하우스 특유의 페미닌 무드를 강조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물에 젖은 듯 빛나던 질감도 한몫했고요. 여성이 어떤 옷을 원하는지, 이번에도 정확히 짚어낸 빅토리아 베컴! 지지 하디드가 입었던 연둣빛 드레스는 쇼가 끝난 직후 바로 출시되었습니다. 우리의 조급한 마음까지도 읽어낸 듯했죠.
#2025 S/S PARIS FASHION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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