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티시가 들려준 지방시 10년의 이야기
지방시 입성 10주년을 맞은 리카르도 티시 는 그동안 지방시뿐 아니라 패션 지형도를 바꿨다. 현재 패션이 가장 사랑하는 이 남자가 〈보그 코리아〉에 지난 10년에 대해 들려줬다.
잭 포즌, 데릭 램, 아이작 미즈라히, 롤랑 뮤레, 소피아 코코살라키, 그리고 알버 엘바즈. 이 디자이너들은 모두 지방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뻔’한 후보들이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10년 전 지방시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5년 은퇴를 선언하고 하우스를 떠난 위베르 드 지방시의 뒤를 이은 런던 디자이너 3인 때문이었다.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그리고 줄리앙 맥도날드. 이 패션 악동들은 호텔 방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록 스타처럼 요란하게 입장한 뒤 조용히 퇴장했다. 그중 누구도 지방시를 집처럼 여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10년간 신나게 파티를 즐긴 디자이너들 뒤에 남은 건 불분명한 하우스의 정체성뿐. 그로 인해 2005년 1월 이 패션 명문가는1952년 설립 이래 처음으로 꾸뛰르 컬렉션을 선보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지방시의 제안을 승낙한 인물이 이태리 출신의 무명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였다. 패션계에 몸담은 모두가 낯선 이름을 듣고 이렇게 되물었다. “누구라고?”
이제 누구도 리카르도 티시라는 이름에 물음표를 더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방식을 고수하며 지방시를 파리 패션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처음엔 의심 어린 눈초리로 혹평하던 기자와 바이어는 어느새 팬을 자처하고 있다. 상업적 성공도 빼놓을 수 없다. 나이팅게일, 판도라, 밤비, 로트 와일러 등의 히트작은 하이패션에 관심 없는 일반인마저 매혹시켰다. 덕분에 10년 전 세계적으로 열 곳에 불과했던 지방시 플래그십 스토어는 최근에 오픈한 밀라노까지 합치면 쉰여덟 곳이 넘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열두 살에 미장이 조수로 일하며 집안 살림을 보태고, 열일곱 살엔 런던으로 건너와 호텔 청소부로 일하던 소년이 패션계의 정상에 섰다. 100만 명이 넘는 팬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의 일상을 엿본다. 비욘세를 ‘베스트 프렌드’라 부르는가 하면 마돈나와 휴가도 보낸다. 킴 카다시안의 웨딩드레스를 만들고 칸예 웨스트와 함께 제이 지와의 협업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인물이 티시다. 어디 그뿐인가. 티시의 파리 아파트에는 신디 셔먼과 로버트 메이플소프 작품이 걸려 있고, 센 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4년 전 뉴욕 소호에도 타운 하우스를 구입했지만 정작 하룻밤도 거기서 자본 적 없다(근처 특급 호텔인 머서의 스위트룸이 더 편하기 때문). 이제 마음이 내킬 때면 이비자와 리우에서 휴가를 즐기는가 하면 케이트 모스와 나오미 캠벨이 직접 그를 향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보시다시피 그의 삶은 그냥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다. 지방시 전임자들보다 더 강력하고 화려한 진짜 록스타가 된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파티를 즐기는 사이에 마법처럼 이뤄진 건 아니다. 스물아홉 살에 지방시에 입성한 무명 디자이너는 누구보다 가열차고 맹렬히 일했다.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해 자정을 훌쩍 넘긴 뒤에 사무실을 떠났다. 첫 몇 시즌은그에게 골고다의 언덕이었다. 기자들은 그가 ‘고스 디자이너’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난했고, 바이어들은 여성들을 매혹시킬 만한 경쾌한 파티 드레스와 잇 백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금세 늘어났다. 남성적인 재킷, 섬세한 레이스 블라우스, 터프한 스터드 장식의 액세서리 등 그를 대표하는 디자인도 생겼다. 또 봄버 재킷과 스웨트셔츠, 폴로 셔츠 등 스트리트적인 아이템을 관능적으로 변신시켰다. 이런 옷을 두고 누군가 이렇게 표현했다. “우아하고, 대담하고, 용감한!”
그러자 리카르도 티시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인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 졸업 작품에 모델로 서준 계기로 그와 평생 친구가 된 모델 마리아칼라 보스코노, 브라질에서 파리로 건너와 남자에서 여자로 둔갑한 트랜스 모델 레아, 함께 아파트를 구입할 만큼 깊은 사이로 발전한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종교적 영감을 공유하는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에게 뉴욕 클럽을 소개한 클럽 프로모터 레이디팩, 티시의 도움으로 무명에서 슈퍼모델로 점프한 라라 스톤, 첫 쇼부터 협업하며 그를 지지했던 유일한 패션 에디터 카린 로이펠트 등등. 10년 만에 패션, 음악, 예술, 영화계를 넘나드는 거인들을 자신의 세계로 초대한 것. 이렇듯 자석에 쇳가루가 끌리듯 모여든 티시 사단을 두고 자칭, 혹은 타칭 이렇게 부른다. 티시 갱!
지난 9월 11일, 리카르도 티시는 지방시에서 열 번째 생일 잔치를 거창하게 자축했다. 파리 대신 뉴욕으로 쇼를 옮기는 것부터 시작했다. 허드슨 강가에 자리한 26번 항구 위에 초대형 세트를 지은 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지휘 아래 퍼포먼스와 쇼를 준비했다. 뉴욕 패션 위크 사상 가장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반응은 실로 굉장했다. 줄리아 로버츠가 티시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백만 달러짜리 미소를 지으며 참석했고,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그녀 옆에 앉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칸예와 킴이 손을 꼭 잡고 등장했고, 니키 미나즈, 커트니 러브, 아만다 사이프리드, 에리카 바두, 데보라 해리 등 티시 갱단이 죄다 몰려와 눈도장을 찍었다. 쇼는 지난 10년간 티시가 보여준 지방시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성에 대한 분방한 접근, 종교적 모티브, 스트리트와 꾸뛰르의 충돌, 그리고 미국에 대한 찬가.
지방시는 하우스 역사상 기념비적인 해가 가기 전에 <보그 코리아>와 리카르도 티시의 만남을 주선했다(지난해부터 준비한 만남은 여러 이유로 미뤄졌다. 다들 티시와 약속을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고, 누구는 지난여름 이비자에서 새로 만난 연인과 사랑에 빠져 더 만나기 힘들 거라고 수근댔다). 하지만 그의 공식 일정은 한도 끝도 없었다. 뉴욕 쇼가 끝나자마자 밀라노 매장 오픈을 위해 이태리로 날아갔고, 다시 마라케시에서 런던, 다시 나폴리에서 파리로 이동했다. 덕분에 그의 파리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은 미뤄졌고, 서울과 파리를 연결하는 전화 인터뷰마저 취소됐다. 아슬아슬하게도 12월호 마감 직전, 티시와 연결됐다. 몇몇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쓱 피했고, 사적인 질문에는 모범생다운 코멘트로 대신했다. 하지만 10년간 파리 꾸뛰르 하우스를 이끄는 디자이너의 진지함은 생생했다. 당대 패션계를 전율케 하는 슈퍼스타 디자이너의 지방시 10년 스토리가 여기 있다.
VOGUE KOREA(이하 VK) 지방시에서의 10주년을 축하한다. 지난 10년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나?
Riccardo Tisci(이하 RT)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해냈다. 꾸뛰르부터 콘서트 의상, 시상식 드레스, 액세서리 디자인까지. 또 여성복과 남성복 모두 디자인하는 것도 즐거웠다. 모든 건 내 머리와 가슴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분되는 일은 지금 여기까지 오는 길을 닦은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VK 9월 뉴욕 쇼는 지난 10년을 압축한 듯했다. 어떤 아이디어로 시작됐나?
RT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예술과 음악, 아름다움 등이 공존하는 내 세계를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지난 10년간 지방시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세계다.
VK 유난히 옷을 많이 준비했다.
RT 여든일곱 벌의 룩이었다. 스무 벌은 남성복 컬렉션에서 선보인 상징적 옷이다. 열 벌은 꾸뛰르 작품 가운데 에센스만 뽑았다. 나머지는 결혼식과 신랑·신부에게 영감을 얻은 여성복이다. 여자가 결혼식 때 입고 싶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드레스에 턱시도 재킷을 더했다.
VK 파리 몽테뉴가의 쇼룸에서 옷을 자세히 봤는데, 섬세한 레이스 아이템이 인상적이었다.
RT 그게 키 룩이었다. 언더웨어와 섹시함을 표현하기 위해 란제리와 레이스를 잔뜩 사용했다. 거기에 여성용 코트처럼 오버사이즈 턱시도 재킷을 더한 것이다.
VK 한쪽 방에 따로 마련된 꾸뛰르 의상은 그야말로 작품이었다. 옆방에 걸린 터프한 남성복과 대조를 이뤘다.
RT 나에게 영감을 주는 두 가지는 단연 스트리트와 꾸뛰르다. 그래서 꾸뛰르를 디자인할 땐 스트리트, 스트리트를 디자인할 땐 꾸뛰르에서 영감을 얻는 식이다.
VK 하긴 스트리트라는 단어는 당신의 작업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RT 스트리트적 감성과 교류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 그거야말로 영감의 발원지니까. 사실 나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로 인해 물질적인 것을 선망하는 데 익숙하다. 매 시즌 부유층을 위한 옷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합리적인 옷을 함께 선보인 것도 그런 이유다. 지방시를 사랑하고 그 스타일을 꿈꾸는 사람들이 지방시를 따라오게 만들고 싶다.
VK 상상을 초월하는 부유층용 꾸뛰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RT 많은 면에서 오뜨 꾸뛰르는 현재까지 변치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아이디어의 실험실이자 순수한 표현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제약 없이 재단하고 장식에 대해 연구할 수 있으니까.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기성복 시장이 엄청나게 커졌고 품질도 뛰어나기에 꾸뛰르 컬렉션은 기자와 레드 카펫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VK 10년 전 처음으로 꾸뛰르 아틀리에에 들어섰을 때 무척 떨렸을 것 같다.
RT 스물아홉 살이었기에 아틀리에 장인들은 엄마뻘이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내 생각을 가감 없이 펼쳐 보였다. 내가 세퀸 장식을 벗겨내고 어깨를 해체하기 시작하자 다들 깜짝 놀랐다. ‘대체 이게 뭐야? 해체주의야?’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6개월쯤 지나자 내 진심을 이해했다. 지방시를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모두가 내 선생님이 됐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으니까.
VK 그렇다면 패션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건 언제였나?
RT 사실 어릴 땐 디자이너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음악에 푹 빠져 지냈다. 아홉 살 때쯤, 방에 틀어박혀 큐어(Cure)를 듣곤 했으니까. 그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가사가 좋았고, 외모 역시 매력적이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곤 깨닫지 못했다. 단지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당시 이태리 대중매체에서 들려오는 것과 완전히 다른 강렬한 사운드에 이끌린 것이다.
VK 큐어를 듣는 사춘기 소년은 보통 아이는 아니었을 듯하다.
RT 덕분에 난 아주 강한 아이로 자라났다. 열네 살 때쯤 긴 흑발에 스키니 팬츠, 플랫폼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갔다. 다들 나를 괴물(Freak)처럼 쳐다봤다.
VK 그런 뒤 곧 이태리를 떠나지 않았나?
RT 열일곱 살 때였다. 운이 아주 좋았다. 내 삶은 영국에서 새롭게 시작됐다.
VK 하지만 영국에서도 이태리인이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RT 물론이다. 나는 이태리인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늘 그랬다. 하지만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유를 영국에서 배웠다. 그래서 이태리의 젊은 세대를 응원하고 싶다. 지금 프랑스조차 젊은 세대에게 아주 협조적이다. 이태리도 그랬으면 한다. 지방시, 프라다, 혹은 구찌처럼 거대한 이름 옆에서도 기죽지 말아야 한다. 만약 뭔가 창조하고 싶고 자신을 굳게 믿고 있다면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한다. 제발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VK 팬들이 새겨들을 만한 조언이다. 그들은 지금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있을 것이다.
RT 눈치챘겠지만, 나는 컴퓨터에 ‘젬병’이었다. 신기술과 거리가 멀었다. 다들 내게 “인스타그램을 하라고, 트위터를 시작해!”라고 말해왔지만 싫었다. 하지만 결국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건 내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저 물건을 몇 개 더 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VK 덕분에 당신은 젊은 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됐다. 이번 뉴욕 쇼도 대중에게 오픈하지 않았나?
RT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물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도 있지만, 쇼는 실제로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게 아주 다르다. 사진과 비디오는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다. 우린 4,000명쯤 예상했는데, 결국 6,000여 명이 쇼를 관람했다. 850장의 티켓을 오픈했는데 무려 2만5,000명이 신청한 것이다. 사이트를 열자마자 2초 만에 2,000명이 신청했다. 또 쇼가 열린 웨스트사이드 지역 주민 150명도 초대했다. 도시 곳곳엔 쇼를 생중계하는 대형 화면까지 설치했다. 덕분에 이번 쇼는 다양한 분야의 여러 사람이 감상한 쇼가 됐다. 이런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한 브랜드가 지방시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VK 그렇다면 왜 뉴욕이었나?
RT 어릴 때부터 미국에 빠져 있었다. 말보로, 맥도날드, 코카콜라처럼 지극히 미국적인 상징과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열여섯 살 때부터 성조기를 모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인들은 미국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했다. 그들에겐 모든 기회가 열린 가능성의 땅이었다. 특히 이태리인에겐 더 그렇다. 프랑스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VK 당신의 컬렉션에서 성조기를 비롯한 미국 스타일이 자주 보이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인가?
RT 맞다. 이태리인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태리인들이 미국에 와서 성공하는 것처럼. 소피아 로렌,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거장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미국에서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찾는다. 나의 아메리칸드림 역시 마찬가지다.
VK 애프터 파티가 열린 건물 밖에는 ‘I Believe in the Power of Love’라는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RT 쇼 제목이 ‘#LOVE’였다. 모든 게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VK 지금 사랑에 빠져 있나?
RT 음, 나는 분명 사랑, 가족, 그리고 갱에 빠져 있다. 우리 모두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것 아닌가?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어떤 보상이나 종교도 필요 없는 영역이다.
VK 이태리 출신이라 유난히 가족과 끈끈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듯하다. 최근에 엄마와 통화한 건 언제인가?
RT 매일! 나는 매일매일 모든 것에 대해 엄마와 상의한다.
VK 당신의 또 다른 가족인 ‘지방시 갱’을 정의한다면?
RT 내 모든 것! 난 오직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하고만 일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게 쉬울 뿐 아니라 자연스럽다. 단순히 일 때문이거나 사교적인 이유만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다. 사랑을 통해 뭔가 만들어야만 늘 최고의 결과가 나온다.
VK 지난 10년 동안 배운 가장 커다란 교훈은 뭔가?
RT 이렇게 말하면 될 듯하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서 자라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든, 열심히 노력하고 열정이 있다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쉽진 않다. 하지만 결국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지방시 갱들이 내게 알려준 것도 그런 것들이다. 그들이야말로 강해지고 의욕이 충만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산증인이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GIVENCHY, WWD / MONTROSE, KIM WESTON ARN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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