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웨이는 어떻게 진화했나?
프런트 로에서 런웨이의 진화를 목격하다!
1978년, 14세인 나는 영국 <보그>가 매년 개최하는 젊은 작가 콘테스트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비 밀러(Bea Miller)는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었고, 난 잃을 것이 없었기에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빌 깁(Bill Gibb) 패션쇼에 참석하는 게 꿈이긴 해요.” 놀랍게도, 실제로 티켓이 내게 전달되었다. 나는 한 호텔 볼룸에서 제리 홀과 마리 헬빈 같은 모델들이 긴 다리로 우아하게 걸으며, 꿈에서 보곤 하던 여우 꼬리털 장식과 저지, 반짝이는 레이스 소재 의상을 입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행복을 만끽했다.
1970년대 영국이 어려움(주 3일 근무, IRA 폭탄 테러,부모님의 이혼)을 겪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나는 초기 패션의 마법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런던의 라이트룸에서 열리고 있는 새로운 몰입형 전시는 당시 내가 느낀 모든 경이로움을 재현하기에 충분하다. 10월25일부터 시작한 전시 <보그: 런웨이의 탄생(Vogue: Inventing the Runway)>은 1930년대 자신의 최신 컬렉션을 선보이는 가브리엘 샤넬, 1940~1950년대 크리스챤 디올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세련미, 1990년대 존 갈리아노와 리 맥퀸의 날카로움 등 각기 다른 시대의 영상과 이미지를 통해 런웨이 쇼의 역사를 탐구한다. 이 전시는 사교계 명사부터 아이코닉한 매장의 바이어, 오늘날 프런트 로를 차지한 인플루언서와 셀러브리티까지 참석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전시품은 벨 에포크 시대 영국(그리고 프랑스와 미국까지)을 매료하며 소수 특권층에게만 공개되었던 루실(Lucile), 레이디 더프 고든(Lady Duff Gordon)의 놀라운 디자인부터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스타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아우른다. 특히 스타 디자이너들의 쇼는 화려한 볼거리(2024년 봄/여름 퍼렐 윌리엄스의 루이 비통 남성복 쇼)와 여행지(2017년 리우에서 열린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루이 비통 리조트 쇼)에 대한 아이디어와 연결되며 대중문화의 강력한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초의 패션 프레젠테이션이 쇼의 형태가 아니었으며 살아 있는 사람이 모델로 등장하지도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가 패션 창시자로 알고 있는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가 1850년대에 실제 살아 숨 쉬는 여자들에게 옷을 입혀 선보이는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이전까지 패셔너블한 여자들은 미니어처 인형에게 입힌 의상을 보고 옷을 고르곤 했다. 워스는 자신의 매장을 운영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귀족으로 구성된 고객층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들은 디자이너의 개인 살롱에서 열리는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했는데, 또 다른 고객 중에는 매주 목요일 아침에 초대 알림을 받는 부유한 매춘부 무리도 존재했다(요일을 혼동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약 50년 후 가브리엘 샤넬이 패션계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 샤넬은 특정한 차림새로 가려지는창녀들을 기용해 쇼를 선보였다. 그들은 캉봉 거리에 위치한, 화려하게 꾸민 마드모아젤 샤넬의 살롱 계단을 내려오곤 했다. 봄이나 가을 컬렉션의 첫 쇼가 열리면 고객이 몰려들었고, 같은 쇼가 일주일 동안 매일 같은 시간대에 반복해서 열렸다. 그러나 패션쇼가 진정한 의미로 세계적인 현상이 된 것은 1940년대다. 시골 출신에 열정으로 가득 찬 피에르 발망은 프랑스 꾸뛰리에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 하우스에서 일하다 독립한 첫 번째 디자이너였다. 자신의 하우스를 시작해 1945년에 첫 컬렉션을 선보인 그는 오랜 전쟁이 끝난 후 여성성을 강조한 의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자신의 반려견인 푸들 ‘바스켓’과 함께 프런트 로에 앉아 있던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은 열광적인 리뷰를 <보그>에 게재했는데 이는 그녀가 쓴 처음이자 마지막 패션쇼 리뷰였다.
발망 데뷔 쇼의 흥분은 과거 를롱 하우스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조용하고 작은 체구의 크리스챤 디올의 등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디올이 1945년 를롱 하우스에서 디자인한 의상은 미니어처 인형 크기로 제작한 패션쇼 ‘테아트르 드 라 모드(Théâtre de la Mode)’를 통해 공개되어 실제 컬렉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유행한 크고 각진 수트와 짧은 스커트에서 벗어나 잘록한 허리 라인과 부드러운 어깨선, 풍성한 스커트가 돋보이는 새로운 스타일의 의상이었다. 1947년 2월, 디올 하우스를 설립한 그는 몽테뉴가에 본사를 마련해 자신의 의상이 돋보이게 할 세련된 공간을 꾸몄다. 그레이 컬러의 여러 방은 벨 에포크 시대 시크함의 극치였으며 윈저 공작 부인과 레이디 다이애나 쿠퍼(Lady Diana Cooper), 낸시 미트포드(Nancy Mitford)가 당시 큰 화제였던 디올 쇼를 보러 소란스러운 사회계 유명 인사들과 함께 그 방으로 모이곤 했다. 디올 모델들은 세련되고 아름다웠으며, 빠른 걸음으로 관객 사이를 누볐다(몇 년 후, 짧고 검은 머리칼의 빅투아르 두트렐로(Victoire Doutreleau)가 등장해 젊음과 화려함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데, 전통적인 디올 모델들과 매우 달랐던 그녀 덕에 의상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으로 보였다).
1957년, 무슈 디올이 52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총애를 받던 이브 생 로랑이 거대한 하우스를 책임지게 되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을 무렵 그는 겨우 21세에 불과했다. 그의 컬렉션은 젊고 활기찼으며, 몇몇 디자이너는 30년 걸려서 할 일을 그는 단 2년 만에 이뤄냈다. 하지만 파리 리브 고슈의 실존주의자들에게 영감을 받은 1960년 가을 ‘비트 쇼’는 전통적인 디올 하우스에서 선보이기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 과거 생 로랑이 군대 징집을 면제받는 데 도움을 주었던 하우스는 망설임 없이 그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그 쇼는 도발적인 패션쇼를 보여준 초기 사례로 그 후부터 급진적인 시도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디올 하우스를 나온 생 로랑은 1961년 12월, 남자 친구 피에르 베르제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하우스를 설립했다. 그의 뮤즈인 빅투아르 두트렐로도 함께였다. 인상파 화가 장 루이 포랭(Jean-Louis Forain)의 하우스에서 열린 그의 첫 컬렉션은 세련된 취향의 정점을 보여줬지만, 1966년을 전후로 소수의 부유한 고객만 겨냥하는 오뜨 꾸뛰르에 지루함을 느낀 생 로랑은 기성복인 리브 고슈 컬렉션을 론칭했다. 그는 화려한 색감의 단순한 아이템으로 젊은 세대의 분위기를 포착했고, 곧 꾸레주와 파코 라반(발렌시아가 하우스의 재단사 출신으로 다른 디자이너들을 위해 아름다운 단추를 제작하기도 했다)도 이 기성복의 흐름에 합류했다. 꾸레주의 쇼에는 납작한 가슴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어린 소녀처럼 가발을 쓴, 소녀와 성숙한 여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프랑수아즈 아르디를 닮은 모델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재즈 배경음악에 맞춰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모든 것이 가위로 자른 것처럼 직선적이었고 곡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영화 <폴리 마구, 당신은 누군가요?(Qui Êtes- Vous, Polly Maggoo?)>, <욕망(Blow-Up)>을 떠올려보라).
생 로랑 주위로 새로운 젊은 고객과 조력자들이 모였다. 카트린 드뇌브, 베티 카트루, 팔로마 피카소, 마리사 베렌슨, 낸 켐프너, 룰루 드 라 팔레즈는 그가 디올 하우스에서 디자인한 옷을 입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분위기는 곧 꾸뛰르로 확산되었다(수십 년이 지나 생 로랑이 은퇴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 나는 드뇌브와 함께 장 폴 고티에의 꾸뛰르 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쇼가 시작되지 않자, 완벽하고 품위 있는 꾸뛰르 고객처럼 보였던 드뇌브가 난데없이 귀를 찢을 듯한, 골수를 얼어붙게 만드는 비명을 질렀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알리는 무어인 여자처럼 말이다. 그러자 곧바로 고티에 쇼가 시작됐다).
그러나 1970년대 뉴욕에서 그 시대와 런웨이의 상징이 된 인물은 홀스턴이다. 맨해튼 미드타운의 올림픽 타워에 있는 그의 쇼룸은 비앙카 재거, 앤디 워홀, 재클린 케네디 같은 친구들로 가득했고 다들 하나같이 홀스턴 런웨이의 모델들처럼 완벽한 차림이었다. 그중에는 팻 클리브랜드, 카렌 비욘슨, 안젤리카 휴스턴 같은 모델들도 있었다. 내가 쇼를 보러 처음으로 뉴욕에 간 1986년에는 캘빈 클라인과 랄프 로렌, 도나 카란, 페리 엘리스가 스타 디자이너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패션의 신으로 추앙받은 홀스턴의 비즈니스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86년 가을/겨울 페리 엘리스 쇼는 활기차고 재미있었지만, 피날레 때 두 명의 조수에게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나온 그는 노쇠하고 수척한 모습이었고 약 3주 뒤에 사망했다.
한편 오스카 드 라 렌타, 빌 블라스, 캐롤린 롬(Carolyne Roehm) 같은 디자이너들은 브룩 애스터(Brooke Astor), 낸시 키신저(Nancy Kissinger), 바바라 월터스 같은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부유층에게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그들은 쇼를 보러 올 때면 전 시즌의 키 룩을 입고 있었다.
1980년대 런던은 재능과 재기 발랄한 도전의 용광로와도 같았다. 나는 한 패션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존 갈리아노 의상을 입고 간 적이 있다. 남성용 스커트, 크롭트 재킷, 염색한 코튼 패치로 만들어진 오버사이즈 셔츠를 매치한 룩은 아주 멋졌다. 패션 브랜드 보디맵(BodyMap)을 함께 론칭한 데이비드 홀라(David Holah)와 스티비 스튜어트(Stevie Stewart)는 레깅스, 힐데 스미스(Hilde Smith)가 디자인한 패턴, 신축성 있는 라이크라 톱 그리고 사이즈에 상관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실루엣을 제시하며 진보적인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안무가 마이클 클락은 그들의 대규모 팀을 이끌면서 모든 연령대의 친구와 가족들이 참여하는 쇼를 기획했다. 호주 선샤인에서 런던으로 건너온 리 보워리가 차차 클럽(Cha Cha Club)과 캠던 팰리스(Camden Palace)를 장악했으며, 1985년에는 어떤 것도 금기시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자신의 클럽 터부(Taboo)를 오픈했다. 그의 패션은 존재감이 매우 강했고 쇼에 온갖 것이 등장했기에 참석자들은 항상 열광했다. 성별 구분이 모호한 것을 즐겼던 리의 세계는 런웨이와 현실 모두에서 광란에 가까웠고,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멋졌다. 그의 삶과 그가 속한 커뮤니티는 그의 예술과 패션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존 갈리아노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할 무렵, 그가 그린 드로잉 컬렉션에 홀딱 반한 지도 교수 셰리든 바넷(Sheridan Barnett)의 설득으로 졸업 컬렉션을 패션쇼로 선보였다. 그 결과물인 ‘레 앵크루아야블(Les Incroyables)’에는 갈리아노의 친구들과 그가 여행하다 만난 매력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모델로 등장해 프랑스 혁명군처럼 열정적으로 함성을 지르며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고작 3~4분밖에 안 되는 짧은 쇼였음에도 내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 그 컬렉션은 브라운스(Browns) 매장에서 금세 매진됐고, 그의 첫 고객 중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다이애나 로스도 있었다.
영국은 아이디어와 혁신, 창의적인 면에서는 훌륭했지만, 상업적으로는 열악했다. 결국 갈리아노는 파리로 갔고 1980년대 파리는 칼 라거펠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엉뚱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매우 지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노동자예요”라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 일주일 내내 24시간 일했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1960년대부터 디자인을 맡은 끌로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일한 그는 1983년 샤넬의 수장이 되었다. 당시 샤넬 하우스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고, 모델들은 지루했으며, 주요 고객인 부유층 여인들은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칼은 아틀리에뿐 아니라 런웨이까지 모든 것을 바꿔놨다. 비쩍 마른 체형의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가 그의 뮤즈가 되면서 다른 모든 모델들을 압도했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그녀가 밀려나고 풍만한 체형에 장난기 많은 빅투아르 드 카스텔란이 블랙 버슬과 코르셋 차림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칼은 자신의 런웨이에 톱 모델을 전부 동원하곤 했으며 그중 한 명인 클라우디아 쉬퍼는 런웨이 모델이 신는 높은 굽에 익숙하지 않아서 하우스는 그녀를 위해 낮은 굽의 구두를 따로 제작하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샤넬 오뜨 꾸뛰르 쇼에 참석한 건 1984년이었다. 대중을 위한 화려한 쇼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열렸지만 내 티켓은 같은 날 오후 캉봉 거리에서 열리는 샤넬 의상을 입고 런웨이를 걸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지아니 베르사체가 잡지 화보를 장식하는 톱 모델들을 런웨이에 올리면서, 베르사체 쇼는 옷보다 크리스티 털링턴, 나오미 캠벨, 린다 에반젤리스타, 신디 크로포드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쇼가 되었다. 베르사체 쇼의 런웨이 배경음악도 패션쇼를 문화적 이벤트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1991년 가을/겨울 베르사체 쇼에서 슈퍼모델들이 조지 마이클의 ‘Freedom! ’90’을 부르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다음엔 크리스찬 라크로와가 있다. 그의 마법 같은 오뜨 꾸뛰르 쇼는 약 45분 동안 진행되었다(생 로랑의 쇼가 2시간 동안 이어진 것에 비하면 긴 것도 아니다). 나와 동료들은 새 드레스가 런웨이에 올라올 때마다 무아지경으로 박수를 쳤고, 크리스찬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러 등장했을 땐 하우스에서 의자 위에 올려둔 진홍색 카네이션을 던지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작업과 아이디어는 자신과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헬무트 랭에 대해 처음 이야기해준 사람이 바로 크리스찬이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와 함께 랭의 작업을 보러 간 나는 각기 다른 단추가 달린 리넨 재킷을 촬영용으로 골랐다. 그리고 1990년대가 되자 랭은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의 모델들은 로봇처럼 런웨이에 등장해 총알처럼 빠르게 움직였는데, 장식이 거의 없는 미니멀한 의상을 보여주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었다. 그 쇼를 보러 온 캘빈 클라인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켈리도 그 방식에 매료되었고 그다음 시즌 클라인은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상을 선보였다. 클라인의 런웨이를 빛내던 당대 슈퍼모델들은 머리를 깨끗하게 뒤로 넘기고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한 새로운 ‘쿨 걸’들로 교체되었다. 케이트 모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첫 쇼를 놓쳤을 때, 나는 멀리 떨어진 쇼룸으로 급히 달려갔다. 거기서 흰색 연구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놀라운 의상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그것은 희귀한 예술 작품에 대해 알아가는 것과 유사한 경험이었다. 그다음 쇼에는 늦지 않고 참석했지만, 그의 의상은 내게 미궁 같기만 했다. 하지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델들은 그야말로 딱 죽기 직전까지 극도로 태연하고 무기력한 태도로 런웨이를 걸었고, 나는 곧 그의 쇼를 보러 온 패셔니스타들의 등 쪽에 숨길 수 없는 4개의 뚜렷하고 하얀 스티치를 알아챘다.
1990년대에는 리 ‘알렉산더’ 맥퀸의 부상과 활기, 외침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매혹적이라기보다 자극적이고 낯선 쇼로 각광받았다. 그의 환상을 구현한 쇼에는 금방이라도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늘 감돌았고 20년 넘게 패션쇼에 참석해온 내게도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1996년 가을/겨울 쇼를 뉴욕에서 다시 선보였는데, 런던 스피탈필즈의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처음 공개했을 때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온 쇼였다. 미국에도 그의 작업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쇼장으로 사용된 버려진 회당 앞은 미처 들어가지 못한 수백 명의 사람들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 사이 회당 안에서는 극단적인 로우 라이즈의 ‘범스터’ 팬츠, 부분적으로 잘린 보디스와 레이스 머리 가리개가 등장했다. 맥퀸은 이후에도 계속 더 충격적인 쇼를 선보였다. 로봇이 샬롬 할로우와 그녀의 드레스에 페인트를 뿌리는 쇼(1999년 봄/여름), 정신병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쇼(2001년 봄/여름), 모델들이 체스 말처럼 등장하는 ‘It’s Only a Game’(2005년 봄/여름)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말도 안 되는 재능의 소유자로 때로는 도발적인 디자이너인 갈리아노는 파리에서 여러 차례 주목할 만한 컬렉션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쇼를 열 돈을 구하지 못해 1994년 가을 쇼를 접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쇼 3주 전, 안드레 레온 탤리는 그에게 쇼를 하지 않으면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이며 사업을 접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이 가슴에 깊이 박힌 그는 결국 자금을 마련하고 모델을 구해 컬렉션을 발표했다. 무려 케이트 모스, 나오미 캠벨, 크리스티 털링턴, 헬레나 크리스텐슨, 린다 에반젤리스타 같은 모델들이 돈을 받지 않고 그의 쇼에 섰으며 쇼가 열린 상 슐룸버거의 17세기 하우스는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패션사에 기록된 대로, 그는 지방시와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나는 그의 컬렉션을 볼 때마다 기절할 정도의 황홀함을 느끼곤 했다. 그의 첫 지방시 꾸뛰르 쇼는 안데르센 동화 속 공주와 매트리스 이야기에 착안해 찰스 프레드릭 워스풍의 거대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이 높이 쌓인 매트리스 위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시작됐고, DJ 제레미 힐리(Jeremy Healy)가 배경음악을 맡아 강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다음에는 디올이라는 큰 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쇼는 회를 거듭할수록 그 전 시즌보다 더 화려해졌다. 자신의 브랜드인 존 갈리아노 쇼 또한 경이로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빈티지 자동차 사이를 오가는 1950년대 수트 차림의 여자들(1995년 봄/여름), 파리의 눈 덮인 지붕 위를 걸어가는 모델(1995년 가을/겨울) 등이다.
영국과 키프로스 출신의 후세인 샬라얀 같은 디자이너도 패션계에 독특한 지적 경이감을 선사했다. 샬라얀이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부상하던 시기, 나는 안나 윈투어에게 그 천재를 보여주고 싶어 그녀를 쇼에 보냈다. 하지만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예를 들면 쇼장으로 향하는 위험한 야외 금속 계단을 오를 때 마놀로 힐이 빠질 수도 있다고 미리 알려주는 것을 깜박한 것이다. 샬라얀의 홍보 담당자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이라 말이 너무 빠르고 악센트가 심하다는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가 옷을 땅에 묻은 샬라얀의 졸업 작품에 대해 설명할 때 윈투어는 거의 알아듣지 못해서 당황했다. 2000년쯤에는 윈투어도 샬라얀의 매력에 빠졌고, 그의 2000년 가을/겨울 쇼는 나탈리아 세마노바(Natalia Semanova)가 1950년대 커피 테이블 중앙으로 들어가 그 테이블을 끌어 올려 딱딱한 스커트처럼 연출하는 인상적인 순간을 남겼다.
그리고 1990년 말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는 프라다와 구찌가 양대 라이벌로 떠오르고 있었다. 1995년 가을, 톰 포드는 1970년대에서 영감을 얻은 전율적인 구찌 컬렉션을 선보였고 그 쇼는 내가 상상했던 스튜디오 54의 화려한 밤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았다. 이제 톰의 이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블랙 런웨이에 등장하는 관능적인 남녀 모델과 함께 구찌의 동의어가 되었다. 같은 시즌, 미우치아 프라다는 1960년대 스타일의 날렵한 의상을 선보였고 잘 재단된 깨끗한 유니폼을 입은 모델들은 정갈한 하얀 런웨이를 걸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당시 밀라노에서 패션쇼는 단순한 쇼 이상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마켓에서 브랜드의 위치를 정의하는 동시에 강력한 마케팅 수단으로 말이다. 쇼장 밖에는 브랜드의 추종자들이 몰려들어 신흥 종교와도 같은 장면을 만들어냈고, 당시 구찌 쇼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엄청난 성취와도 같았다.
미국에서는 프런트 로의 인물들이 바이어와 패션 에디터에서 배우와 사교계 인사들로 바뀌기 시작했다(후에 이들은 돈을 받고 쇼에 참석하게 된다). 오전에 열리는 쇼에도 저녁 모임에 어울리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왔고 그날 런웨이에 공개될 슈즈를 신고 있었다. 2008년 가을이 되자, 패션 블로거들은 그저 패션쇼에 참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돌체앤가바나 쇼의 프런트 로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 현상이 놀라웠지만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그들이야말로 패션에 열광하는 수백만 젊은이들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고려하게 됐다. 2018년 10월, 발렌티노와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리조트 컬렉션을 위해 프레스들을 도쿄로 데려갔을 때 블로거들은 나를 포함한 기존 에디터들과는 다른 담당자들의 관리를 받았다. 이는 디지털 기반의 저널리스트들이 실시간으로 시각적 경험을 전달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그 광경은 매우 흥미로웠다. 곧 스콧 슈만, 필 오 같은 스트리트 사진가들이 쇼장으로 가는 인플루언서들의 모습을 포착하기 시작했고 어떨 땐 그들의 존재가 런웨이의 패션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에 더 가까워지면서 마크 제이콥스(무대에 기차가 등장하고 모델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절경을 연출한 루이 비통의 2012년 가을/겨울 쇼), 릭 오웬스(분노에 찬 표정의 무용수들이 등장한 2014년 봄/여름 쇼), 로에베(조나단 앤더슨의 익살스러운 2024년 가을/겨울 남성복 쇼), 센트럴 세인트 마틴의 졸업 프레젠테이션 등 수많은 쇼에 참석해 런웨이에 등장하는 오프닝 룩을 볼 때면 모든 것이 눈부시고, 혁신적이며,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집이나 사무실에서 실시간으로 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현장에 참석하는 경험에는 만질 수 있고 음미할 수 있지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느낌 말이다. 누가 얼마나 기진맥진했는지, 그 쇼에 참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패션의 그 모든 피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가 신경이나 쓸까? 그 쇼를 직접 봤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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