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음미하는 조해진의 단편소설 ‘PASSPORT’
웅크리는 계절을 받아들이는 데는 위스키 한잔이 필요하다. 그 곁에 소설이 함께하면 이 순간을 사랑할지 모른다. 위스키를 주제로 〈보그〉에 보내온 김금희, 김연수, 정대건, 천선란, 조해진, 장강명, 편혜영, 김기태 작가의 단편만큼은 과음을 권장한다.
PASSPORT
내가 사는 오피스텔 건물 1층에 위스키 바가 들어온 건 벚꽃 잎이 한 장씩 세상의 빈틈을 채워가던 때였다. 거주 공간에서 불과 아흔 개의 계단만 내려가면, 혹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근사한 위스키 바가 생긴 셈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곳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위스키보다는 맥주가, 맥주보다는 소주가 더 입에 맞는 촌스러운 인간이어서였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그날 바의 문을 연 건 술잔을 앞에 둔 채 책을 읽는 여자가 낯설면서도 매혹적으로 느껴져서였던가. 어쩌면 그녀의 손에 들린 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좋았던 나는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도 그 책이 한 시절 내가 탐독했던 영국 소설가-그는 미술 평론가이자 화가이기도 했고 배우였던 적도 있었는데, 대체로는 알프스 산록의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의 대표작이란 걸 한눈에 알아봤던 것이다. 나뭇잎들이 절정의 초록을 향해 마음껏 짙어지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녀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앉았고, 바텐더가 건넨 메뉴판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시간을 끌었다. 수많은 리스트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발베니를 추천해요.”
여자가 오른손 검지로 머리통을 긁적이는 나를 흘끗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체리나무 통에서 숙성되어 향이 좋거든요.”
나는 여자를 향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발베니를 주문했다. 훗날에야, 우리가 그곳 ‘Passport’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우연인 듯 아닌 듯 만난 기간이 한 계절 정도 지난 무렵에야, 나는 그때 그녀가 마셨던 술이 보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모어는 삼나무 향이 나고 첫맛은 알싸하지만 끝 맛은 스모크하다는 것도. 발베니든 보모어든 맥아와 물, 이스트로 구성되고 발효와 증류, 숙성이라는 표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나, 그럼에도 위스키마다 맛과 향이 조금씩 차이 나는 것은 증류소의 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것, 증류소가 그만큼 중요하기에 술의 명칭에 반영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로부터 배운 건 또다시 한 계절이 흐른 뒤였다. 바람이 만든 작은 소용돌이 안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형벌인 양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던 계절···. 우리가 가진 건 여권뿐이니 남미든 북유럽이든 바로 떠나버리자는 실없는 농담을 할 만큼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우리는 대체로 바에 나란히 앉아 그날 기분에 따라 고른 위스키-선택은 늘 그녀의 몫이었다-를 한 잔씩 마시며 책 이야기를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누군가와 책에 대해 떠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크나큰 행운이라고 여겼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접점도 하나씩 발견하게 됐다. 일단 우리는 같은 오피스텔 거주자였고 날마다 9호선 급행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김포공항으로 출근했다. 그녀는 수화물 보관소로, 나는 D항공사의 체크인 카운터로.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이름엔 ‘현’이라는 글자가 공통으로 들어갔고 나이는 동갑이었다.
친구들은 어째서 그녀에게 대시를 하지 않느냐고 묻곤 했지만,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된 우리가 그 바에 나란히 앉아 지금과 똑같이 그 주에 읽은 책에 대해 떠드는 미래를 상상하는 게 좋았다. 애인이 되거나 가정을 꾸리는 상상보다 훨씬 더.
그리고···.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연인 듯 아닌 듯 이루어진 위스키 바에서의 그 만남은 중단됐다. 녹은 눈과 얼음이 아무도 모르게 기화하여 고요한 구름으로 발효되던 무렵, 나는 청약 당첨된 경기권의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그 오피스텔에 다시 가게 된 건 새로운 오피스텔 세입자가 계약 만료로 이사 준비를 하다가 붙박이장 틈새에서 커플 반지를 발견했다며 연락을 해주어서였다. 새 반지를 맞추느라 애먼 돈을 쓴 것이 새삼 억울했지만 그걸 빌미로 내 시간 안에서는 이미 유효기간이 만료된 여권을 다시 한번 들춰보고 싶기도 했다.
그대로였다, 그곳은···.
통유리 창 안에서 투명한 술잔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온전히 복원되는 듯했다. 때로는 그 술잔 안이 진짜 세계고 그녀는 진짜 세계가 만든 시뮬레이션 같다는 상상을 하게 했던, 그만큼 내 눈에는 그녀가 상처받기 쉬운 사람으로 보였던 순간들이 스쳐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반지를 찾았느냐는 질문, 아직 오피스텔로 들어가지도 않았다고, 그저 ‘Passport’를 바라보고 있는데 반지고 뭐고 위스키 한잔하고 싶다는 대답, 그리고 희미한 웃음···.
“그럼, 발베니를 추천할게.”
웃음 끝에서 그녀가 말했다.
마침 벚꽃 잎이 내 스니커즈와 허공 사이 빈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조해진 조해진은 2004년 <여자에게 길을 묻다>를 발표하며 등단한 후 신동엽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의 원작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비롯해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환한 숨>, <완벽한 생애>, <겨울을 지나가다> 등의 작품을 출간했으며 이민자, 난민, 입양인, 퀴어 등 소수자와 주변인에 대한 관심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주목받았다. 최근 단편 <빛의 호위>를 장편으로 확장한 <빛과 멜로디>를 출간해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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