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위스키를 음미하는 장강명의 단편소설 ‘인어공주 옆에서’

2024.10.24

위스키를 음미하는 장강명의 단편소설 ‘인어공주 옆에서’

웅크리는 계절을 받아들이는 데는 위스키 한잔이 필요하다. 그 곁에 소설이 함께하면 이 순간을 사랑할지 모른다. 위스키를 주제로 〈보그〉에 보내온 김금희, 김연수, 정대건, 천선란, 조해진, 장강명, 편혜영, 김기태 작가의 단편만큼은 과음을 권장한다.

인어공주 옆에서

“전하, 나날이 더 젊어지시는 거 같습니다. 젊어지실 뿐 아니라 더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로렐 공국도 전하의 영도 덕분에 나날이 부강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대공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렇게 말했다. 대공은 집어치우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사는 나날이 뻔뻔해지시는군요. 거짓말 실력도 나날이 느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리를 내드리고 싶었는데, 아무 데나 대충 앉으세요.”

이 일대 모든 왕국과 공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여성 군주, 어쩌면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군주일 상대가 말했다.

대공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턱 끝으로는 자기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다시 인사를 한 뒤 그 자리에 앉았다.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외교관이라서 좋아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외교관치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죠. 가끔 귀국의 공작에 대한 이야기에 거짓말을 섞는 점만 제외하면 정보력도 대단하고, 분석력도 탁월하고요. 그래, 오늘은 무슨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까?”

“제가 아는 최고의 정치 외교 분석가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하.”

진심이었다. 주변국 대사들을 오히려 자기 정보원으로 삼는 대공의 대담함과 노련함에 나는 늘 감탄했다. 하지만 여러 대사들 중에서도 이렇게 밤늦은 시각에 그녀와 독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나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내가 만약 로렐 공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대공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모시고 있는 공작에 대해서는 그 정도 마음은 품고 있지 않다.

우리는 주변 국가들의 정세에 대해 1시간가량 토론했다. 대공의 분석은 이번에도 날카로웠으며, 그녀의 질문은 핵심을 찔렀다. 그녀는 바이에른과 프랑켄이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전쟁을 벌일 것 같지는 않다고 봤고, 그보다는 오히려 작센의 후계자가 누가 되느냐가 폭탄 같은 문제라고 판단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녀는 슈바벤과 로타링기아의 협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우리는 잠시 논쟁을 벌였다. 아무래도 그 논쟁에서는 내가 진 것 같았다.

그러나 논쟁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정보 분석도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아니다.

“이제 우리 로렐 공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이방인인 그대 눈에는 내 신하들이 보지 못한 게 보이겠죠. 내 신하들이 감히 내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도 그대라면 말할 수 있을 테고.”

“아, 이제 진짜 어려운 시간이네요. 10월 맥주 축제를 준비하는 주민들을 만났는데, 올해도 풍년이라서 축제 규모가 아주 성대할 거라고 합니다. 다들 전하께서 올해도 광장에 오셔서 맥주통 마개를 직접 따실지 궁금해합니다.”

“가야죠. 시민들이 좋아하니까. 그런데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좀 해보세요.”

“사람들이 배가 불렀는지, 슬슬 주세(酒稅)를 개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위스키에 붙는 세금이 너무 높다면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흉년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로렐 공국에서 가장 좋은 위스키들은 대공님의 찬장에 있다고도 하더군요.”

“그 위스키를 가져오는 공급책이 대사라는 것까지 시민들이 알던가요?”

“그건 아직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행낭에서 위스키를 두 병 꺼냈다. ‘한 병은 딸까요?’ 하는 표정을 짓자 대공은 테이블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시종이 잔을 가져왔다. 시종 복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인상과 체격으로 봐서 대단한 무예가임이 분명했다. 아마 이 방 주위에 무장한 경비들이 몇 사람은 더 있을 것이었다. 만에 하나 내가 대공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에 대비해서. 대공 본인의 무술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들었다.

내가 위스키에 대해 하는 설명을 대공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썩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 자세로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했다. 독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먼저 마셨다.

“맥주 축제를 준비하는 여인들이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향이 좋은 술이었다. 첫 모금을 맛본 뒤 내가 말했다.

“라인강에서 노래를 부르는 인어 말인가요? 뱃사람들이 그 노래에 현혹되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아닙니다. 새로운 이야기였습니다. 황송하오나 돌아가신 백작님이 등장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내 남편은 병으로 죽었지, 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닌데?”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시장 여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라인강의 인어 하나가 돌아가신 백작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백작님이 탄 배가 라인강을 항해할 때 난파된 적이 있다고 하는군요. 그때 정신을 잃은 백작님을 그 인어가 강변으로 끌고 가서 살렸고, 그러면서 백작님께 반했다고요.”

“재미있군요. 내 남편이 탄 배가 난파된 적은 없고, 그 동생이 라인강에서 익사하기는 했지요. 30년 전 일이 그렇게 각색되나 보네요. 계속해보세요.”

대공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술을 마셨다.

“백작님께 반한 인어는 사람들의 세계로 오겠다고 결심한 뒤 마녀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마녀는 인어의 꼬리를 없애고 다리를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끔찍한 고통이 따를 것이고, 목소리도 잃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네요. 그리고 백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고 말 거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그런 경고를 받았음에도 사랑에 빠진 인어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인어는 가족을 버리고 뭍으로 나와 말 못하는 소녀가 됐다고 합니다.”

그 순간 대공의 눈 깊은 곳에서 작은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대공은 내 말을 막지는 않았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녀는 기적적으로 백작을 만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작은 얼마 안 있어 이웃 공국의 아름다운 왕녀와 결혼하게 되지요. 다시 한번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전하. 이 이웃 공국의 왕녀란 바로 젊은 시절의 전하를 가리킵니다. 백작님과 전하가 식을 올리시는 날 한때 인어였던 말 못하는 소녀는 라인강 변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소녀 앞에 다른 인어들이 나타났지요.”

대공은 천천히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를 노려보기는 했지만, 내 얘기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인어들은 말 못하는 소녀에게 칼을 건넸습니다. 그 칼로 백작의 심장을 찔러 그 피로 몸을 적시면, 소녀가 인어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죠. 다리가 다시 꼬리로 변하고 목소리도 되찾게 될 거라고요. 인어들이 떠난 뒤 말 못하는 소녀는 칼을 들고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성의 가장 높은 망루에 올라 칼을 버리고 강으로 제 몸을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찌를 수 없었던 거죠. 그렇게 한때 인어였던 말 못하는 소녀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그게 끝이군요.”

대공이 내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렇게 끝납니다.”

대공은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까닥였다. 가끔 그녀가 그런 포즈로 생각에 잠긴 척하면서 상대를 불안하게 만드는 때가 있는 걸 나는 안다. 누구나 대공이 대단히 명민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머릿속으로 늘 여러 가지 계획을 짜고 있음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대공의 침묵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조차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했다.

“이 이야기를 금지시켜야 할까요? 아직 그렇게까지 퍼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물었다.

“금지요? 아니요. 사람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라서, 인위적으로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금지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나올 테지요.”

대공이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는, 금지하면 더 널리 퍼진다.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달이 아름답군요.”

대공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름 한 점 없네요.”

내가 말했다.

“남편의 시녀들 중에 말 못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제 남편을 오랫동안 사모했던 듯하고요. 저희 결혼식 다음 날 저 망루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이제는 내가 침묵을 지킬 시간이 온 듯했다.

“여염집 소녀들은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하지요. 소녀들의 이야기에서 왕자와 공주는 로맨틱한 사랑을 하고, 마침내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삽니다. 실제 왕자와 공주들의 결혼 생활이 그와는 정반대임을 그대는 잘 알겠지요. 저희들의 결혼은 사업입니다. 어느 가문과 맺어지느냐 하는 것이 공국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아버지들이 아들과 딸의 결혼 상대를 현명하게 정해야 합니다. 로맨틱한 사랑은 각자 애인을 둬서 해결하고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하.”

“제 남편은 고귀한 남자였어요. 저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에 책임을 다하려 했습니다. 그 흔한 정부(情婦) 한 명 두지 않았지요. 통치 기간은 짧았습니다만 군주로서도 나쁘지 않았지요. 사람들은 제가 두 공국을 합쳐서 지금의 로렐 공국을 세웠다고 하는데,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평판이 나빴다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겠지요.”

“시민들은 돌아가신 백작님뿐 아니라 전하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남편은 열병에 걸려 사흘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저는 막 둘째 딸을 낳은 상태였습니다. 혹시 병이 옮을지도 모르니 남편 곁에 가면 안 된다고 의사들이 말하더군요. 남편의 죽음이 확실해졌을 때에야 마지막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눈을 감은 상태로 땀을 뻘뻘 흘리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더군요. 망루에서 몸을 던진, 말 못하는 시녀를요. 남편은 그 시녀의 이름을 부르며 죽었습니다.”

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이제 전설이 되겠지요?”

대공이 말했다. 딱히 내 대답이 궁금해서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 속 인어에게는 누군가 공기의 정령 이름을 붙였더군요.”

내가 대답했다. 대공이 이 이야기를 금지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다소 아쉬웠다.

“곧 맥주 축제가 시작됩니다. 맥주는 기쁨을 나누는 술이에요. 왁자지껄 떠들며 꿀꺽꿀꺽 마시는 음료입니다. 로렐의 시민들이 그렇게 즐거워하기를 바라요. 제가 평생 추구한 일입니다. 몸 바칠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대공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달빛을 등지고 서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술은··· 맥주와는 다르지요. 기쁨이 아닌 다른 걸 음미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죠.”

대공이 위스키를 천천히 마시며 말했다.

“무엇을 음미하십니까, 전하?”

내가 물었다.

“힘, 영광, 헌신···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이오.”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외로운 성공을 자축하면서. 내가 존경하는 군주를 상처 입히게 되어 씁쓸하고, 내 나라에 이익을 가져올 것이기에 달콤한. 거품이 있는 술은 모략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내 특기가 유언비어 퍼트리기라는 걸 말했던가? 유언비어에는 늘 일정 정도의 사실이 재료로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했던가?

죽은 시녀의 사연을 토대로 삼아 내가 지어낸 인어 아가씨 이야기는 맥주 축제 동안 로렐 공국에 널리 퍼질 터였다. 대공이 금지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힘을 발휘할 이야기다. 사람들이 대공을 냉혹한 권력가로 보게 될 것이고, 로렐 공국의 기원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언젠가는 대공을 마녀로 묘사할 수도 있겠지.

대공과 나는 달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라인강 물속을 헤엄치는 인어들과 말 못하는 시녀, 그 시녀를 사랑한 죽은 백작의 이미지가 잠시 머리에 떠올랐고,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쳤다. 장강명 장강명은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후 2011년 청년 세대의 상실감을 다룬 장편소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10년 넘게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기자로 활약하며 쌓은 필력과 내공으로 <열광금지, 에바로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단편 <알바생 자르기>와 <현수동 빵집 삼국지> 등 수많은 수상작을 완성했다.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가 영화화되었으며, 최근작 <미세 좌절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날 선 시대감각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동시대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VK)

포토그래퍼
정우영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세트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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