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위스키를 음미하는 김기태의 단편소설 ‘꼭 그렇진 않았다’

2024.10.24

위스키를 음미하는 김기태의 단편소설 ‘꼭 그렇진 않았다’

웅크리는 계절을 받아들이는 데는 위스키 한잔이 필요하다. 그 곁에 소설이 함께하면 이 순간을 사랑할지 모른다. 위스키를 주제로 〈보그〉에 보내온 김금희, 김연수, 정대건, 천선란, 조해진, 장강명, 편혜영, 김기태 작가의 단편만큼은 과음을 권장한다.

꼭 그렇진 않았다

크리스마스와 밸런타인데이 사이의 추운 겨울날이었다. 젊은 연인은 시린 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걸었다. 꼭 붙잡은 두 손을 하나의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세상이 딱히 이름 붙여둔 날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그들만의 이유로 조금 좋은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첫째 순서로 2만9,900원에 50종의 음식을 제공하는 뷔페에서 제한 시간을 꽉 채워 이른 저녁을 먹었다. 거리로 나오자 금세 코끝이 빨개진 그녀가 말했다.

“너무 많이 먹었다.”

역시 코끝이 빨개진 그가 말했다.

“마지막에 케이크는 무리였어.”

하지만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식사였음에 동의하며 배를 문질렀고, 자신들의 걸음걸이에 스스로 효과음을 붙여 주고받았다.

“뒤뚱뒤뚱.”

“뒤뚱뒤뚱.”

둘째 순서로 20여 분을 걸어 새로 생긴 창고형 대형 마트에 갔다. 카트도 장바구니도 없이 돌아다녔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봤다. “이건 우리 방에 들어가지도 않겠다.” 강아지 인형의 북슬북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나중에 강아지 키우자.” 수제 햄을 굽는 시식 코너를 지나며 킁킁거렸다. “밥 먹고 와서 다행이다.” 그렇게나 넓은 곳에 그렇게나 많은 물건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조금 좋은 하루를 위한 조금 좋은 술 한 병을 사기로 했다. 주류 코너를 서성거리며 수다를 떨다 둘 다 위스키를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라벨에 적힌 이름과 가격표에 적힌 숫자를 눈으로 훑었다.

“이거 어때?”

그녀가 매대에 잔뜩 진열되어 있던 위스키 한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벨즈라고 읽어야 할까, 벨스라고 읽어야 할까. 아무튼 찰랑이는 빛깔이 예뻤고, 라벨에 영국 국기도 있었으며, 할인 행사 중이라 1리터에 1만5,990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은 그 술의 맛과 향과 음용법은 하나도 검색하지 않았다. 벨즈 한 병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길에 치즈 소스가 포함된 나초 한 봉지를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지내는 작은 집의 거실에 접이식 탁자를 펼쳤다. 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우유도 마시는, 언젠가 기념품으로 산 커플 머그잔을 개수대 위 건조대에서 가져왔다. 벨즈를 조금씩 따랐다.

“축하축하.”

“축하축하.”

가볍게 건배한 후 반 모금을 홀짝 마셨다. 기대와 다른 맛이었다. 두 사람은 입안에 남은 맛을 쯥쯥 음미하며 눈을 마주쳤다.

“으엑.”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맛은 맛이고, 그들은 최근 함께 겪은 기쁜 일과 실망스러운 일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좋은 날이었기 때문에, 함께 맞이할 수도 있는 굉장히 좋은 날을 상상하며 다시 건배했다. 두 번째 반 모금은 첫 번째보다는 나았다. 세 번째 반 모금의 맛은 조금 좋은 것도 같았다. 그녀가 1리터나 되는, 아직 황금빛 액체가 가득한 병을 보며 말했다.

“우리 이거 다 마시기 전에···.”

그 위스키는 냉장고 위에 오랫동안 보관되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고 포옹과 입맞춤을 굽어봤다. 조금 좋은 날마다 조금씩 줄어들었다. 언젠가부터 조금 나쁜 날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바닥을 드러낸 뒤에도 빈 병은 먼지가 쌓이도록 냉장고 위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 추운 날, 분리수거장에 거치된 자루 중 하나에 버려졌다. 위스키병이 재활용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로 사라지긴 했다.

여러 번의 겨울이 지난 먼 훗날, 둘 중 한 사람은 직장 동료들에 뒤섞여 아늑한 위스키 바에 앉았다. 동료들은 메뉴를 펼쳐보며 취향을 나누었다. 피티하고 우디하고 와이니하고 프루티한 무엇들을 얘기하던 누군가가, 한 사람에게 어떤 위스키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벨즈가 좋아.”

질문을 건넸던 동료가 말했다.

“특이하네. 어지간하면 벨즈보다 맛있잖아.”

한 사람이 대답했다.

“꼭 그렇진 않더라고.” 김기태 김기태는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무겁고 높은>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5월,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발표했다. 2024년 젊은작가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VK)

포토그래퍼
정우영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세트
최서윤(Da;rak)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