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두, 시간을 탐하는 예술가들
시간은 유한하지만 영감은 영원하다. 2024년 전시장 곳곳에서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시간을 탐하는 예술가들을 마주했다.
기나긴 예술사를 돌이켜보면 ‘시간’은 가장 매혹적인 작품 소재로 당당하게 군림해왔다. 시간에 대한 예술가의 특별한 정서는 고전 미술에서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작품에 담긴 궁극적인 메시지는 예술가마다 다르지만 작품의 첫 이미지만 놓고 보면 간접적으로 시간의 영속성과 고유성을 탐구하거나, 시계의 형상을 통해 무심히 흐르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올해도 바삐 이어진 전시 캘린더를 좇아가다 맞닥뜨린 작품 중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작가와 큐레이터의 성찰을 꽤 자주 발견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 시작은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맞이해 베니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기획한 특별전 <선택적 친화(Elective Affinities)>였다. 이 전시는 베를린 베르크그륀 미술관과 손잡고 피카소, 마티스, 클레, 자코메티, 세잔의 대표 작품이 아카데미아 미술관 컬렉션 대표 작가인 조르조네, 세바스티아노 리치, 피에트로 롱기,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안토니오 카노바의 작품 속에 숨어 있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고상한 고미술 작품 중에서 근대 미술 작가의 재기 발랄한 작품이 도드라지도록 연출한 광경에 관람객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특히 시선을 끈 것은 이탈리아 작가 조르조네와 피카소의 초상 작품이 나란히 걸린 벽면이었다. 15세기에 베니스에서 활약했던 조르조네의 1506년 작품 ‘나이 지긋한 여성(The Old Woman)’과 피카소의 1936년 작품 ‘초록 손톱의 도라 마르(Dora Maar with Green Fingernails)’는 43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완전히 다르게 보였지만, 두 작품 모두 시간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사랑하는 여성을 그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잘 어우러지기도 했다. 조르조네의 초상은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림 속 어머니가 들고 있는 종이에는 “시간과 함께”라고 쓰여 있다. 피카소의 그림 속 주인공은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사진가였던 도라 마르. 그녀는 피카소의 여성 편력 때문에 고통받았지만 그에게서 좋은 예술적 영향을 받기도 했다.
호암미술관에서 지난 6월 16일까지 열린 불교 미술 전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에서도 시간을 다룬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여인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9단계 과정을 통해 죽음의 시간을 표현한 구상도(九相圖, Nine Stages of a Decaying Corpse)다. 19세기 일본 에도 시대의 작품으로, 그림은 오른쪽 하단의 건물에서 시작한다. 붉은 치마를 입은 젊은 무녀가 난간 너머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에서 시작해 임종을 맞은 여성을 비구니가 슬픔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면, 버드나무 아래 썩어 들어가는 시신, 그리고 마지막에는 망자를 위해 세운 오륜탑으로 귀결된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식물 이미지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표현한 이 작품은 박웅규 같은 현대 작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전시는 불교 미술을 후원하고 직접 참여했지만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던 과거 여성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어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리움미술관에서 7월 7일까지 열린 <필립 파레노: 보이스>로 국내 미술 애호가를 만난 프랑스 아티스트 필립 파레노 또한 시간을 다룬 작품을 자주 선보여온 작가다. 리움미술관 전시에서도 시간을 경험하는 그의 작품과 전시 구성을 탐험할 수 있었다. 갤러리 천장을 가득 메운 투명한 풍선 사이에서 아름다운 실루엣을 뽐내는 그의 대표작 ‘시계 태엽’은 2019년부터 시작한 작업의 일부다. 시침, 분침, 초침이 있는 투명한 플렉시글라스 시계 작품은 고유의 리듬을 따르면서 작가가 구상한 안무를 연출하는데, 이 시계는 실내 기압과 온도 변화 센서에 연결되어 있어 기후에 실시간으로 반응한다. 또 인터넷에 연결하면 작업에 원하는 시간을 반영할 수 있으며, 모든 요소를 통틀어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필립 파레노는 최근 몇 년 동안 전시회에서 다채로운 장르의 시계 모티브를 소개해왔다. 그는 항상 시간과 기간에 대한 조사를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하며, 그에게 전시는 하나의 사건처럼 여겨진다. 파레노의 작품은 사물 기반이 아니며 사물, 영화, 음향, 코딩, 빛, 생물학적 유기체 및 공연을 통합해 진화하는 안무에 관람객을 포함하는 시나리오를 생성한다.
녹지 않는 눈사람으로 연출한 파레노의 연작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Iceman in Reality Park)’ 역시 시간의 흐름을 포착한 작품이다. 이 눈사람은 1995년 일본 도쿄에서 큐레이터 얀 호엣이 기획한 전시 <Ripple Across the Water>를 통해 회사원들이 점심시간마다 모여 식사를 하는 기린 공원(Kirin Park)에 처음 소개되었다. 파레노는 이 공원에 눈사람 모양의 얼음 조각을 설치해 점심시간 동안 눈앞에서 녹아내리는 조각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시간의 흐름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조각이 녹아 사라진 자리에는 매일 교체된 새로운 얼음 인간이 시간성을 지닌 예술 매체가 되어 바깥이 아닌 전시장 내부에서 관람객을 마주하며 실내와 실외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뮤지엄 산에서 진행 중인 스위스 미술가 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 <Burn to Shine>에도 아름다운 시계 작품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전시는 12월 1일까지 연장되었다).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이 시계들은 시침과 분침이 없지만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태양광이 투과함에 따라 바뀐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시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론디노네는 시계의 기능은 부인하면서 추상적인 실체로 시계를 변형시켰다. 바늘이 움직이지 않아도 이 반투명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연상케 하는 매개체 역할을 빠짐없이 수행한다.
아마도 현대 미술에서 시간의 이미지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미국 작가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The Clock’(2010)과 쿠바 태생 미국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연인들’(1987~199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는 러닝타임이 무려 24시간에 육박하는 영상 작품이다. 2010년 리움미술관에서 작가가 직접 내한해 이 작품을 상영한 적도 있고, 미국 LACMA 미술관에서는 24시간 동안 밤새워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작가는 어시스턴트와 함께 5,000여 편의 영화를 보면서 실제 영화에 등장한 시계와 시간을 28개월에 걸쳐 편집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한국 영화도 등장하는데, 오후 2시 30분에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주연배우 임수정이 벽시계에 숨는 장면이 나온다(3시 20분에는 <올드보이>, 밤 9시에는 <달콤한 인생>이 나타난다). 현대인이 얼마나 시간에 얽매여 있는지 상기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러닝타임 내내 재깍재깍 울리는 초침과 분침 소리가 시간의 흐름을 한층 강렬하게 인식하게끔 부추긴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연인들’은 시계 2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 설치 작품이다. 지난 2012년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아시아 최초 회고전이 열려 한국에서도 선보였으며, 2023년 데이비드 즈위너 뉴욕 갤러리 개인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은 에이즈로 자신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한 연인 로스 레이콕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2개의 시계가 걸린 ‘무제-완벽한 연인들’에서는 시침과 분침이 같은 두 시계의 배터리가 수명이 다하면 교체되고 다시 동일하게 맞춰지며,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했다.
맹활약 중인 독일 미술가 알리시아 크바데의 매력적인 작품도 빼놓을 수 없다. 크바데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공간, 시간, 과학, 철학 등의 개념을 탐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로 페이스 갤러리와 쾨닉 서울 갤러리 전시를 통해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그녀의 대표작 ‘Against the Run’(2022)은 링고토 피아트 공장에 세워진 시계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으로 정확히 시간을 전달하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시간 개념을 의심케 한다. 작품 속 베젤이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초침은 언제나 정지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계는 기존 시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인간의 직관을 거스르며,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듯 보이지만 끝내 시간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신비한 시계가 인간이 삶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발명한 시스템에 대한 지속적 탐구를 부추기듯이 크바데는 예술을 통해 기존 사고에 도전하고, 관람객에게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갤러리바톤을 통해 국내에서 두 차례 개인전을 선보인 일본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 미야지마 타츠오의 작품도 떠오른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시간에 대한 개념을 시각화하는 그의 탐구는 수십 년에 걸쳐 집요하게 진행되어왔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LED는 서로 다른 속도로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역순으로 반복하며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드리운다. LED의 차가운 물성과 가냘픈 천의 대립되는 인상을 접목한 ‘Unstable Time’(2020~) 시리즈는 자연에 대한 인류의 오만을 가리키고, 우연과 확률에 따라 반응하는 작품 ‘Changing Time with Changing Self – Small Circle No.8’(2020)은 자연에서 관측한 우연성과 그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주한 관계에 대한 경외감을 담고 있다.
리움미술관에서 12월 29일까지 펼쳐지는 개인전을 통해 오랜만에 한국 관람객을 만난 아니카 이도 일찍이 시계를 활용한 작품을 글래드스톤 서울 개관전에서 선보인 적 있다. ‘Nest’는 금속 발판 위에 늘어져 나른한 느낌을 주는 벌집 모양 조각품으로 아마존에서 관찰한 다양한 곤충의 집에서 영감을 받았다. 생물학과 기술의 결합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새로운 생명체를 품은 듯 내부에서 빛을 발하며, 표면에는 애벌레나 꽃가루를 저장한 것처럼 생생한 구슬이 박혀 있다. 잘 보이진 않지만 벌집 아래를 들여다보면 디지털 시계가 매달려 있는데, 사람이 측정한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붉은색 숫자가 번쩍이며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어 막연한 위기감을 드리운다. 동시에 가느다란 다리 위에 세워진 둥지 조형물은 연약하고 흔들리는 듯하면서도 다소 불길한 모습으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아니카 이가 작품 활동 초기에 집단성, 네트워크화된 지능, 하이브 마인드(Hive Mind: 집단적인 정신 활동)에 매료된 흔적이기도 하다.
해외 작가로는 마지막으로 미국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영상 작품을 소개한다. 마침 그의 개인전 <시간의 조각가(Sculptor of Time)>가 벨기에 리에주 라 보브리 미술관에서 지난봄에 열렸다. 작가의 30년 예술 활동을 아우른 전시에서는 정교한 사운드와 강렬한 이미지가 슬로모션 기법으로 표현된 영상을 포함, 작가의 주요 작품 18점을 소개했다. 탄생, 인생, 죽음 등 삶에 대한 근본적인 주제를 즐겨 다뤄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간에 한층 깊이 몰두했다. 작가는 이미지나 영상의 속도를 조절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시간대를 평행하게 나열하거나 중첩하는 등 ‘시간의 조각가’가 되어 자신이 변형시킨 시간의 경험 속으로 관람객을 데려간다. 극적인 속도 변화는 이미지의 연속성이나 내러티브의 환영을 깨뜨리는 효과를 낳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이미지를 면밀히 관찰해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고찰하게 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성화에서 볼 수 있는 내적, 육체적 고통과 분노, 두려움,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을 나타낸 ‘놀라움의 5중주(The Quintet of the Astonished)’(2000)를 비롯해, 죽음을 앞둔 노파와 갓 태어난 아기가 함께 등장해 생명과 죽음의 대비를 담은 ‘하늘과 땅(Heaven and Earth)’(1992) 등이 생경한 몰입의 시간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국내 예술가들은 시간의 어떤 점을 영감의 소재로 즐겨 활용하고 있을까? 고구려 쌍영총의 기마상부터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한만영은 다양한 시대와 공간에 피어난 예술을 파편화해 새롭게 접목하는 형태로 독특한 시간성을 담아낸 작품을 선보인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특수한 시간성을 띠는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특성을 지닌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간의 복제’ 연작이 좋은 예. 온갖 기억의 파편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시간을 거스르는 정물화로 활약한다. 201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수여하는 제1회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을 거쳐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된 이완에게도 시간은 예술의 최대 화두다. 시간에 관한 그의 대표작은 단연 ‘고유시’. 새하얀 벽면을 가득 채운 668개의 시계는 개인의 경제력, GDP, 한 끼 식사비, 식사에 얽힌 기억 등을 놓고 전 세계 1,200명을 인터뷰한 결과다. 그는 경제, 역사, 문화 등의 조건에 따라 삶의 속도는 각자 다르게 흘러간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아냄으로써 불가항력적 세상을 고발한다. 미국의 뱅커가 경험하는 시간은 실제 시계보다 10배 느리게 흐르며, 인도네시아 공장 직원의 시간은 실제 속도보다 60배나 빠르게 흘러간다는 식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소수의 과학자들이 들떠서 전망하는 것처럼 미래에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즐거운 상상을 좀 더 이어보자면 그때의 시간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향유되며 철학은 물론 예술까지 완전히 뒤바꿔놓을 것이다. 독특한 시선을 지닌 동시대 예술가들이 가리키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미래의 인류가 과연 어떤 시간을 거닐게 될지 탐방하는 것, 시간을 다룬 작품을 지그시 응시하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소영 미술 저널리스트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글
- 이소영(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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