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한 세일즈’ 기분 좋게 매운맛
<정숙한 세일즈> 원작 <브리프 엔카운터스>는 1980년대 영국이 배경이다. 생계를 위해 성인용품 판매에 뛰어든 주부들 얘기다. 이를 한국으로 옮기면서 제작진은 시계를 10년 늦춰 1990년대로 맞췄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전통 사회와 현대 여성상의 충돌이다. 1990년대 한국 시골은 이 설정이 잘 작동하는 시공간이다. 주인공들은 본의 아니게 여성의 ‘성’과 ‘경제·정서 자립’을 위한 투쟁에 나서면서 공고한 유교·가부장 질서에 균열을 일으킨다.
<정숙한 세일즈>의 한 장면, 지역 중산층 사교계의 구심점 허영자(정영주)를 공략하기로 한 주인공들이 회의를 연다. 허영자가 좋아하는 건 ‘남의 불행’이다. 이에 주인공들은 누구의 불행이 잘 먹힐까 대조해본다.
한정숙(김소연)의 남편은 하는 일마다 말아먹어서 월세를 밀리고도 집에서는 큰소리만 치는 못난 가부장이다. 남편은 그 주제에 정숙의 절친과 바람까지 났다. 서영복(김선영)의 남편은 귀엽고 애교가 있어서 데리고 살기에 한결 수월하지만 가계에 도움이 안 된다. 그는 아내에게 빌붙어 살겠노라 선언한 상태다. 이주리(이세희)는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다. 오금희(김성령)은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고 집안도 부유하지만 전업주부 생활에 한계를 느낀다. 남편은 금희가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라고 무시한다.
같은 시기 드라마 <정년이>가 원작의 가부장제 비판을 털어내고 전통 성 관념에서 벗어난 내용은 탈색시켜 20세기 어린이 명작 동화 수준으로 퇴행한 데 비하면 <정숙한 세일즈>의 묘사는 한결 현실적이고 매콤하다.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들은 허영자가 내심 경쟁심을 느끼는 오금희를 이용하기로 하고, 야한 속옷 때문에 너무 왕성해진 부부 관계가 고민이라는 떡밥을 던진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이처럼 드라마는 당대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여러 한계를 제시하면서도 주인공들이 적재적소에 재치를 발휘하며 세일즈우먼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위풍당당한 허영자 역시 남성 우월주의 사회의 피해자임을 곧바로 제시함으로써 계층 갈등과 여성 문제가 분리되고 교차하는 다양한 좌표를 짚어낸 것도 재미있다.
주인공들의 사업은 순탄치 않다. 이들의 첫 이벤트에는 경찰이 출동했다. 누군가 매춘으로 신고한 것이다. 남편들은 남부끄럽다고 일을 방해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정숙의 집에 ‘SEX’라고 낙서 테러를 한다. 동네 남자들은 성인용품 판매원이 문란하고 만만할 거라 짐작한다.
이 코미디가 유효한 건 시청자들이 여성의 쾌락을 봉인하려던 과거 분위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야한 속옷, 자위 기구, 여성의 욕구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 속 덜 깬 자들의 반동을 우월한 시점에서 관망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성 윤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충돌, 예컨대 동성애자의 법적 지위 확보를 위한 투쟁과 백래시 따위가 훗날에는 어떻게 평가될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진다. 물론 구멍 뚫린 끈 팬티, 딜도, 질 윤활제 따위를 문외한들에게 설명하는 방판 4인방의 대사가 쉽고 빠른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정숙한 세일즈>는 자주 여자들의 우정과 시대를 뛰어넘는 선택을 보여준다. 생계가 절박해서 성인용품 판매에 나선 정숙, 영복과 달리 금희는 자기 집 가사도우미 정숙과의 의리로 그들에게 판을 깔아준다. 주리는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싹싹하고 생활력이 강하다. 그는 ‘환타지 란제리’의 첫 구매자에서 모델로 변신하고, 곧 방판 사업에 합류한다. 이들 4인방은 굳건한 결속력으로 외부의 비난에 맞서고 서로를 보살핀다.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정숙은 “아이 때문에 참고 산다”는 흔한 레퍼토리를 읊는 대신 자기가 불행하면 아이도 느낀다며 이혼을 요구한다.
이 드라마의 이성애 로맨스 요소는 작품의 테마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전개된다. 형사 김도현(연우진)은 어릴 때 입양되어 미국에서 자랐고, 출생의 비밀을 좇아 이 마을에 왔다. 정숙이 무너뜨려야 하는 유교적 성 관념과 가부장제 질서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그 시대 시골 경찰이 성인용품 방판 사원에게 벌어지는 혐오 범죄를 성실하게 수사한다는 건 믿음이 가지 않는 얘기인데, 도현의 배경 때문에 설득력이 생겼다.
여러모로 이 코미디는 소박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그리면서도 충분히 동시대적이고 때로 미래지향적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책 제목이 떠오르는, 사회가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며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들의 이야기고,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른 채 페미니스트로 산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웃음, 감동, 영감이 공존한다.
김소연, 김성령, 김선영, 정영주, 김원해의 앙상블은 명불허전이다. 같은 시기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와 <정숙한 세일즈>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각기 존재감을 발하는 김정진, 1990년대 핫 걸 스타일을 완벽하게 재현 중인 이세희도 신선하다. 재미, 의미, 완성도를 다 잡은 드라마다.
<정숙한 세일즈>는 총 12부작으로, JTBC에서 10월 12일부터 토·일요일 오후 10시 30분에 방송된다. 넷플릭스, 티빙, 시리즈온, U+모바일tv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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