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작가상 2024’, 우리 시대의 단면
시간의 흐름을 뚜렷이 자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단풍 든 가로수처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올해의 작가상 2024’가 그렇습니다. 지난 2012년부터 매년 4명의 작가를 선정, 신작 제작과 전시 등을 꾸준히 지원해온 이 상이 ‘올해의 작가’를 발표할 때면 어김없이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실감합니다. 게다가 왕성한 작업 활동에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술가들을 만나는 흔치 않은 자리라 짐짓 설레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특히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여유 있게 꼼꼼히 보려고 하는 편인데요. 말하자면 그들이 묵묵히 일구어온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갈 만큼, 매년 기다리게 되는 전시라는 겁니다.
특히 이번에는 <올해의 작가상>을 보면서 현대미술의 언어와 방식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으며, 이와 함께 그 정의도 바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윤지영, 권하윤, 양정욱, 그리고 제인 진 카이젠, 이 4명의 참여 작가 사이의 특성과 차이점이 유난히 뚜렷하게 다가왔거든요. 그중 윤지영 작가는 조각의 문법을 활용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마주한 개인의 심리 및 태도를 다룹니다. 조각이라는 매체가 마치 함께 쓰는 일기처럼, 이토록 개인적일 수 있나 새삼 놀랐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담담하게 풀어내고 다시 그걸 보는 관람객들의 상실과 소망 같은 마음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실로 고백적인 조각입니다.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하는 권하윤 작가의 작품은 다름 아닌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실로 매력적입니다. 어렵사리 예매해 ‘옥산의 수호자들’을 체험해볼 수 있었는데요. 1백 년 전 대만 원주민 부족과 우정을 나누었던 일본 학자의 이야기를 정말이지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가상현실 기술은 다른 장르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터라 오히려 현대미술계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실정이지만, 저는 이 기술이야말로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미술을 통해 기억하고 보고 싶었던 것을 현실 아닌 현실로 구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더군요.
20여 분 동안 가상현실을 경험한 후 바로 양정모 작가의 움직이는 조각을 만나게 한 관람 동선은 참으로 절묘합니다. 나무 조각, 실, 헝겊 등을 모아 만든 양정모의 조각은 재료만큼이나 아날로그한 형태로 소박한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언뜻 보면 방직공장의 직조 기계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이 한결같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상상과 공감을 향한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더군요. 특히 조각들의 움직임이 모두 균형 잡기, 즉 균형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은 고난과 희망 사이에서 부단히 애쓰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더욱 감동적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영상 작품 ‘이어도(바다 너머 섬)’는 제주의 자연, 문화,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다학제적 연구에서 출발합니다. 전시장에 놓인 7개의 영상에서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몸짓과 삶이 보이고 또 자연스레 하나로 이어지는데, 그래서인지 여러 편의 시를 모아 한 편의 산문으로 완성한 느낌도 들더군요. 이어도는 제주의 집단적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섬으로, 현실이자 환상 혹은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제주라는 아름다운 섬이 여러모로 무분별하게 소비되고 있는 요즘이라 그런지, 이 영상들이 유난히 꿈처럼 다가왔습니다.
얼마 전 파리 출장 길에 퐁피두 센터에서 <뒤샹 프라이즈 2024> 전시를 봤습니다. 현대미술계에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는 4명의 작가(Abdelkader Benchamma, Gaëlle Choisne, Angela Detanico, Rafael Lain and Noémie Goudal)의 주요작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특히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간 세계 외부의 이야기, 인류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더군요. 설사 주최 측이 일부러 이런 주제에 초점을 맞춰 선별했다 해도, 이것이 전 세계 현대미술계의 핵심 트렌드임은 틀림없습니다. 반면 <올해의 작가상>은 주제와 방법론은 달라도 모두 우리 시대의 단면을 담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입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관계가 광활한 우주보다 더 오묘하다는 것이 비단 저만의 생각은 아닐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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