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 관리가 절실한 날, 에스테틱 대신 슈퍼마켓?
피부 관리가 절실한 날, 에스테틱 대신 슈퍼마켓에 간다? 그곳에 가면 콜라겐 스무디와 진주 가루로 만든 마스크 팩이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지난해 12월, 그 유명한 할리우드 사인을 배경으로 펼쳐진 발렌시아가 2024 프리폴 컬렉션을 떠올려보자. 레깅스와 후디로 단장한 모델들의 두 손엔 텀블러, 짐 백 그리고 에레혼(Erewhon) 로고 장식의 가죽 쇼핑백이 들려 있다. 특이한 이름에 발음도 어려운 슈퍼마켓, 에레혼에서 비건 버펄로 콜리플라워 볼이나 스무디 한잔 사 먹는 것은 이제 로스앤젤레스 관광 버킷 리스트 중 최우선 순위이자 소개팅 이후 첫 데이트로 실패 없는 선택이 됐다.
벨기에 출신 건축가 움베르토 노브레가(Humberto Nobrega)가 설계한 에레혼의 건물 내부는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갈망하는 이들이 찾는 성전과 같으며, 심지어 화장실조차 끝내주게 아름답다. 인테리어 오브제처럼 투명한 유리병에 곱게 포장된 생수는 3만원을 웃도는 사악한 가격이지만, 이미 수많은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이곳에서 포착됐으며, <뉴욕 타임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핫한 만남의 장소”라고 에레혼을 표현한다.
어느새 열한 번째 매장 오픈을 준비 중인 에레혼은 ‘유기농’ 딱지가 붙은 그저 뻔한 식자재를 취급하는 허세 가득한 공간이 아니다. 이젠 하나의 문화 현상이자 웰니스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에레혼 로고가 새겨진 185달러의 후드 스웨터와 트레이닝 팬츠는 절찬리에 판매 중이며, 지난해 12월에는 발렌시아가와 협업으로 쇼핑백과 흡사한 가죽 토트백을 만들기도 했으며 138달러짜리 에코 토트백은 품절된 지 오래다. 물론 그로서리 숍의 명분도 잊지 않는다. 농장에서 막 도착한 듯 신선한 농산물은 물론 바다 이끼와 노루궁뎅이버섯처럼 트렌디한 식재료부터 ‘천국’ ‘천연’ ‘0칼로리’ 등의 표식이 죄책감을 줄여줄 식품 섹션(가공된 설탕, 표백된 밀가루, 카놀라유, 효모 추출물을 함유하지 않아야 에레혼의 진열대에 오를 수 있다!), ‘꿈의 회춘제’라 불리는 ‘NAD’ 같은 건강 보조제 섹션까지. 이뿐만이 아니다. 오징어 먹물로 색을 낸 유기농 만두, 무항생제 닭고기 샌드위치, 비건 부리토 등 간단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스낵 코너와 헤일리 비버, 켄달 제너, 올리비아 로드리고 등 셀러브리티의 레시피로 만든 신선한 스무디를 맛볼 수 있는 토닉 바(Tonic Bar)까지 갖췄다.
특별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뷰티 쇼핑을 제대로 하려면 세포라나 바이올렛 그레이가 아니라 에레혼으로 가라는 조언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150여 개 브랜드로 엄선된 에레혼의 뷰티 & 헬스 셀렉션을 보면 화장대를 완전히 새로 꾸미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틱톡에서 인기를 끈 아장 나퇴르(Agent Nateur)의 마린 콜라겐 파우더, 오세아(Osea)의 보디 오일, 닥터 바바라 스텀(Dr. Barbara Sturm)의 페이셜 세럼, 트루 보태니컬(True Botanicals)의 엑스폴리에이터처럼 참신한 브랜드의 제품부터 에레혼에서 자체 제작한 스킨케어 라인까지! 파리 몽주 약국에 들어선 듯, 장르를 막론한 뷰티 쇼핑 세계에 무아지경으로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뷰티 카테고리의 확장은 에레혼의 웰니스 신념에서 비롯됐어요. 피부에 바르는 모든 것은 몸에 흡수될 테니, 우리는 아주 ‘잘’ 만든 제품을 사용할 자격이 있죠.” 에레혼의 브랜드 및 마케팅을 총괄하는 알렉 안토치(Alec Antoci)가 설명했다. 윤리적으로 조달된 순수하고 깨끗한 성분, 지속 가능성은 에레혼의 뷰티 제품 선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에레혼이 전에 본 적 없는 제품을 발견할 수 있는 뷰티 오아시스 같은 곳이길 원해요. 우리는 모든 제품을 선보이기 전에 엄격한 과정을 거치거든요. 전 성분을 검토하고, 샘플을 받아 제품을 직접 테스트합니다. 긴 프로세스지만 이런 정신을 유지하면 고객이 품질에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죠.”
방대한 규모의 셀렉션 중 화학물질에 일절 닿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수확된 유기농 허브로 만든 에레혼 ‘바이탈리티 페이셜 세럼’과 ‘핸드 새니타이저’는 요즘 나의 ‘최애’다. 냉각 처리한 식물성 원료로 고귀한 생명력을 유지한 것이 신선함의 비결이다. 특히 새니타이저는 단 1초의 건조함 없이 촉촉함만 선사하는데 그 깔끔한 마무리는 직접 써봐야 안다. “합성향료, 황산염, 파라벤, 프탈레이트 등 고객이나 환경을 해칠 수 있는 기타 성분을 철저히 배제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유난스럽게 업계에서 앞서가려는 의도는 없어요. ‘내 화장대에 들이지 않으면, 우리 가게에도 들이지 않는다’는 단순한 생각이에요.” 알렉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신념을 밝혔다.
에레혼은 자체 마케팅 팀이나 광고 예산 없이도 엄청난 바이럴 마케팅 효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해는 약 1억7,100만 달러(약 2,340억원, 일반 슈퍼마켓의 평방피트당 평균 연 매출의 네 배에 달하는 금액)의 수익을 기록했다. 특히 헤일리 비버가 직접 레시피 협업을 의뢰한 ‘스트로베리 글레이즈 스무디’는 매주 약 1만2,000잔이 팔린다. 이것만으로도 한 달에 약 86만4,000달러(약 12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셈이다. 알렉은 에레혼이 부유한 고객층만 겨냥해 운영한다는 비판을 웃어넘긴다. “그게 일부는 사실이라서 괜찮아요.” 그는 말을 이었다. “모든 원재료 비용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죠. 우리 몸을 위해, 우리 자연을 위해 기꺼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푸드 웹진 <스낵스샷(Snaxshot)>의 설립자 안드레아 에르난데스(Andrea Hernández)는 웰니스 식품과 뷰티 케어에 관심을 가지는 흐름을 ‘립스틱 효과’ 같은 현상으로 진단한다. 요즘 같은 경기 침체기에 소비자는 립스틱 같은 비교적 저렴한 사치품에 돈을 쓴다는 경제 이론이다. 비싼 가방 대신 비싼 간식을 맛보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자랑거리가 된 것이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잘 끝나서, 우울한 기분을 떨치고 싶어서, 이유야 어찌 됐든 한 번쯤 사치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5만원짜리 핸드 크림이나 2만원짜리 스무디에 돈을 쓰면 잠시나마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할 수 있다. “에레혼은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의 소비 트렌드를 반영하죠. 젊은 세대는 이제 물질적인 쇼핑에서 쇼핑을 즐기는 경험으로, 값비싼 디자이너 의류에서 디자인이 잘된 몸으로 욕구가 이동하고 있어요.” 애리조나 주립대학 W.P. 캐리 경영대학원 마케팅 교수 네루 파하리아(Neeru Paharia)가 거들었다. “스킨케어나 비싼 식료품은 건강과 관련해 소비의 실용적 가치를 마땅히 찾을 수 있는 카테고리죠.”
에레혼이 이른바 ‘가심비’를 자극하는 웰니스 마케팅을 펼친다면 ‘가성비’로 인기를 끄는 곳도 있다. 앙증맞은 미니 에코 백으로 직구 열풍을 불러온 트레이더 조(Trader Joe’s)다. 캔버스 원단에 ‘트레이더 조’ 마크가 새겨진 미니 백은 2.99달러(약 4,000원)라는 바람직한 가격과 한정 수량으로 판매된 탓에 영업 시작 전부터 100m가 넘는 ‘오픈 런’의 주역이다.
한국산 냉동 김밥, 미니 에코 백에 이은 트레이더 조의 ‘레티놀 나이트 세럼’은 소셜 미디어에서 입소문 난 제품이다. 0.3% 농도로 함유된 레티놀은 히알루론산, 비타민 C와 E, 살리실산, 바오밥 시드 오일 등의 조연 원료와 어울려 뛰어난 재생 효과를 선사하는데, 가격은 9.99달러(약 1만4,000원)로 반전이다. ‘울트라 하이드레이팅 젤 모이스처라이저’는 가벼운 젤 타입 크림으로 알로에 잎, 녹차, 자작나무 잎, 밀크시슬 추출물 등 피부를 진정시키는 성분이 가득 담겨 있다. 또한 수분 잠금 효과로 입증된 나트륨 히알루로네이트를 함유해 밤새 수분을 보충하는 동시에 산뜻하게 마무리된다. <보그> 뷰티 디렉터는 지난봄 로스앤젤레스 출장 중 구입한 ‘데일리 페이셜 선스크린 선크림 SPF 40’을 추천한다. “투명한 젤 타입으로 피부에 닿는 즉시 스미는 텍스처가 예술이에요. 오일 프리 제품인 데다 내수성을 갖춰 물놀이할 때도 탁월하죠.”
트레이더 조의 뷰티 코너는 에레혼만큼 세련된 맛은 없지만, 투명한 성분과 윤리적인 제조 방침을 준수한다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모든 제품을 피부과 전문의와 공동 연구해 만든다. “백화점에서 뷰티 제품은 화려하게 진열돼야겠지만 자연스럽고 정직한 모습이야말로 ‘트레이더 조’답다고 봐요.” 진열대를 빠르게 채우던 판매원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알고 지내던 곳에 놀러 온 듯한 정겨움을 주는 이곳의 매력은 이런 진정성에 있다. 직원은 고객의 뷰티 고민 해결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고, 소비자가 단순히 뷰티 제품을 장만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것 같은 뿌듯함을 선사한다.
급속도로 변모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소셜 미디어는 소비자에게 중차대한 영향력을 전파한다. 트렌드에 발맞춘다는 이유로 얄팍한 눈속임이나 치트 키 없이 소비자의 기조를 정확하게 포착한 슈퍼마켓의 뷰티 코너가 각광받는 이유다. 여기에 가격은 백화점의 반의반 수준이라면 이보다 더 달콤한 유혹은 없다! (VK)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우주연
- 아트워크
- MARÍA 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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