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만족스럽지 않아요” 당신이 모르는 자크뮈스에 대하여
남프랑스 사람 그 자체인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는 그의 패션처럼 밝고 다정하다. 그러나 마냥 여유로울 것처럼 보이는 그의 라이프스타일 이면에는 날카로운 집중력과 철두철미한 직업 정신이 깔려 있다.
얼마 전 파리에서 있었던 친구의 생일 파티에 늦게 도착한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프랑스에 살지 않는 내가 무슨 일로 이곳에 머물고 있는지 물었다. 작업 중인 일에 대해서는 웬만해서 입을 열지 않는 여느 작가들의 원칙을 따라 나는 어느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글을 쓰는 중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자크뮈스에 대한 글이면 좋겠군요.”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맞아요. 자크뮈스면 좋겠다!” 또 다른 사람이 거들었다. 놀랍게도 다들 그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패션계와 무관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모두 자크뮈스에 대해 한마디쯤은 거들었다. 그것도 아주 열렬한 어조로. “자크뮈스는 정말 흥미로워요.” 누군가 내게 말했다. “늘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있어요.”
엄밀히 말해 이 기사에서 자크뮈스에 대한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딱히 없다. 시몽 포르트(Simon Porte)라는 열아홉 청춘이 15년 전(패션계에서 15년이면 정말이지 영겁의 시간이다) 론칭한 이 브랜드는 그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을 따라 자크뮈스라는 이름을 내걸고 세상에 등장했다. 그 후 자크뮈스는 놀라운 성과와 명성을 거머쥐며 오랫동안 사랑받은 패션 하우스도 이루기 힘든 눈부신 권위를 자랑하는 브랜드가 됐다. 물론 10년 전까지만 해도 자크뮈스는 소수의 마니아만 즐겨 찾는 브랜드였다. 밝고 과감한 컬러가 돋보이는 화려한 디자인의 완성도 높은 컬렉션은 주로 온라인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5년 전, 남성복 분야에 진출한 자크뮈스는 1,000만 달러 매출을 달성했고, 프랑스에 부티크를 오픈했다. 자크뮈스의 올해 판매량은 놀라운 실적을 기록한 지난해와 비교해봐도 두 배나 증가했고, 브랜드 역사상 가장 과감한 확장 계획은 구체적인 청사진을 향해 무리 없이 전진하고 있다. 지난봄 두바이, 카프리, 생트로페에 매장을, 가을에 뉴욕과 런던에 스토어를 연 자크뮈스는 내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진출할 계획이다. 브랜드 고유의 독특한 매력을 잃지만 않는다면야 자크뮈스는 머지않아 그 어떤 신진 패션 브랜드보다 더 큰 명성을 거머쥘 거란 사실이 자명했다. 현재 SNS에서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의 모든 일상과 행보가 실시간 추적당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크뮈스 팬을 자처하는 무리까지 생겨났다. “어떤 브랜드가 1인칭으로 불리는 현상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자크뮈스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 브랜드를 지켜봐온 패션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이자 저널리스트 로익 프리장(Loïc Prigent)의 증언이다.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아주 흥미로운 브랜드는 넘쳐나죠. 하지만 자크뮈스는 흥미로운 브랜딩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어요. 사람들은 자크뮈스의 모든 것을 시몽 개인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하고 아주 친근하게 받아들이죠.” 프리장이 덧붙였다. “자크뮈스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DM을 보내면 얼마 안 있어 시몽에게서 답장이 온답니다.”
현재 포르트는 스스로를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라고 칭한다. 이는 한 개인과 브랜드의 혼연일체를 의미할 뿐 아니라 해석하면 “시몽은 자크뮈스를 입는다”는 뜻이 되어 홍보를 거드는 역할도 수행한다. 실제로 그는 런웨이나 레드 카펫 위에서뿐 아니라 화려함으로 가득한 일상에서도 늘 자기 브랜드의 옷을 고수한다. 30만 팔로워를 보유한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는 자크뮈스의 글로벌 마케팅 플랫폼이자 포르트 자크뮈스 개인의 일기장으로 활약한다. 모든 것이 그가 “자크뮈스 세계관”이라 일컫는 광활한 전시장과 다름없다. 디자이너들은 전통적으로 고고하기 그지없는 신격화된 인물 혹은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별난 사람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비치곤 했다. 하지만 포르트 자크뮈스는 이 모든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뿜어낸다. 남프랑스에서 성장한 그는 SNS를 통해 편안하고 따스하며 유연함을 갖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패션에는 문외한인 나의 어느 건축가 친구는 포르트 자크뮈스의 ‘아주 인상적인 가슴 털’을 본 후로 그 브랜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실제로 마주한 포르트 자크뮈스는 필터를 씌우는 게 당연한 인스타그램 사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중간 정도 키에 체조 선수처럼 다부진 몸, 옅게 난 갈색 수염과 치아를 환히 드러내는 시원한 미소, 그의 오피스를 둘러싼 파리의 경쾌한 도심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인스타그램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파리 8구에 있는 자크뮈스의 새 본사(미니멀하고 기하학적인 느낌의 건물에 테라코타 바닥과 따뜻한 남프랑스를 연상시키는 요소로 가득한 특색 있는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었다)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레몬나무가 즐비한 테라스로 나를 데려갔다. “가끔 이곳에서 이렇게 되뇌곤 해요. ‘시몽, 지금을 즐겨.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가 가로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프랑스 패션과 파리 패션을 동의어로 여기던 시기, 방돔 광장 쇼윈도가 파리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던 그때, 포르트 자크뮈스는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갈망했다. 세련된 향기와 성공한 사람들이 입는 부유한 느낌의 옷을 판매하는 대신, 줄무늬 비치 타월과 영화감독 자크 데미(Jacques Demy) 감성의 가방으로 디자이너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 사연이다. 내 눈앞의 포르트 자크뮈스는 여유 있는 화이트 티셔츠에 검정 반바지와 레몬색 척 테일러 스니커즈를 매치한 채, 지금이라도 당장 비치 타월을 집어 들고 해변으로 향할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순간, 프랑스 68혁명이 발발한 1968년 5월 청춘들이 내걸었던 슬로건이 떠올랐다. “자갈 바닥 아래 해변이 있다(Sous les Pavés, la Plage).” 자크뮈스에게 파리는 여전히 그런 낭만을 추구해야 할 곳이었다.
2009년 선보인 첫 컬렉션을 위해 그는 몇 야드의 천을 사서 현지 재봉사를 찾아갔다. “제가 ‘치마 한 벌 만드는 데 얼마예요?’라고 물었죠. 150유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100유로에 해주세요. 내일 찾으러 올게요’라고 했어요.” 그는 웹사이트까지 직접 디자인했다. 한동안은 꼼데가르송에서 일하며 틈나는 대로 자신의 브랜드를 키워갔다. 꼼데가르송에서 일할 땐 디자이너가 아니라 판매원의 관점으로 상품이 고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그의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느긋한 표정과 화려한 패턴으로 가득한 포브 프린트(Fauve-print) 셔츠로 대표되는 자크뮈스는 ‘Himbo(겉모습만 멋진, 지적이지 않은 남자)’로 묘사됐다. 패션계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를 향해 태닝 오일 마니아, 절벽 다이버, 난봉꾼, 선상 파티를 즐기는 사람 등의 희화화된 이미지가 덧입혀지기도 했다. “그는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자유로운 영혼이에요.” 2018년 프랑스 TV 쇼에서 만난 직후 절친이자 뮤즈로 거듭난 두아 리파가 포르트 자크뮈스에 대해 증언했다. “시몽은 모든 면에서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특히 댄스 플로어 위에선 더더욱 그렇답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특히 댄스 플로어에서 막 내려온) 포르트 자크뮈스는 사실 브랜드의 상승세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아주 철저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회사원 같은 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나 깜짝 놀랄 것이다. “계속 이슈를 만들어내야 해요. 6개월에 한 번이 아니라 15일마다, 혹은 매주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거든요. 패셔너블한 캠페인이든, 새로운 팝업 스토어든, 인기 있는 셀러브리티에게 옷을 입히든, 뭐든요.” 그가 사무실에서 노란 천을 씌운 암체어에 비스듬히 앉은 채 얘기했다. “수많은 신생 브랜드가 2년쯤 지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요. 계속 존재감을 드러내고 입증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거죠.”
지난 몇 달간 자크뮈스는 컬렉션을 확장하고 가격을 인상해, 전통적인 럭셔리 의류 시장에 확실히 자리 잡고자 분투했다. 1인 브랜드로 시작해 이제는 5개국에 직원 300명을 둔 대기업으로 성장한 이 브랜드를 이끄는 과정에서 그는 브랜드의(자신의) 고유한 정체성과 기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힐 때도 있을까? 그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쉼 없이 신경 쓰는 일이에요.” 그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브랜드의 모든 면에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사무실 벽에 거는 그림에서부터(그는 호안 미로와 남프랑스 예술가 아리스티드 마이욜(Aristide Maillol)의 작품을 애정한다) 대차대조표와 하루 매출까지 그의 손과 눈을 거치지 않고 결정되는 사안은 극히 드물다. “처음부터 디자이너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던 것 같아요. 사업가도 되어야 했죠.” 그가 강조했다. 사무실 곳곳에서 명성에 대한 열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포르트 자크뮈스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다는 여론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은 다음으로 그가 유구한 프랑스 패션 하우스의 최고 자리를 원하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전 ‘이미’ 유명한 하우스 브랜드에 당도했어요. 바로 여기, 자크뮈스에 있잖아요.” 조금 전까지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포르트 자크뮈스가 어느새 패기 넘치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자크뮈스의 놀라운 야심은 분명 놀라운 결과를 일궈냈다. 지난봄 포르트 자크뮈스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은 최연소 디자이너가 됐다. 소매 브랜드였던 자크뮈스는 2022년 2억5,000만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한 글로벌 브랜드가 됐다. 이는 10년 전만 해도 결코 상상해본 적 없는 액수였다. 개인적인 삶도 행복을 향해 순항했다. 2022년 그는 현재 자크뮈스의 홍보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는 마르코 마에스트리(Marco Maestri)와 결혼했다. 이후 둘은 지난 4월 쌍둥이 미아(Mia)와 선(Sun)의 탄생을 맞아 프랑스 남부 해안가에 있는 대저택을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일에 착수했다. “해안가의 많은 집이 지나친 대리석 사용과 에어컨 가동, 형편없는 리모델링으로 다 망가져버렸어요. 그가 한탄했다. “이 집은 어떤 면에서는 정말 단순해요. 페기 구겐하임이 1930년대에 이곳에 와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모습을 자주 상상했는데 그런 장면에서 아무것도 더한 것이 없거든요.” 새 보금자리는 엄청난 성공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그와 마에스트리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동시에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죠.” 포르트 자크뮈스가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했다. “지금 제 인생은 평생 꿈꿔온 삶 그대로예요.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원하기 때문에 커리어적으로 힘들 때가 올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그냥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줄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넌 지금 정말 행복한 거라고 말이에요.”
2024년 자크뮈스는 창립 15주년을 맞이했다. 브랜드의 과거를 돌아보는 계기이자 포르트 자크뮈스에게는 새로운 목표를 다지는 날이었다. 지난해 멧 갈라에서 그는 함께 일했던 칼 라거펠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디자인한 한 쌍의 블랙 앤 화이트 백리스 수트를 배드 버니와 함께 입고 등장해 LVMH 특별상을 수상했다. 또한 레드 카펫에서는 라거펠트가 1997년 카프리의 카사 말라파르테(Casa Malaparte)의 옥상 파티오에서 찍은 사진을 자수로 수놓은 재킷을 입고 등장해 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현했다. 지중해 연안의 절벽 위에 지은 독특한 붉은색 건물인 카사 말라파르테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걸작 <사랑과 경멸>에 등장해 널리 알려진 장소다. 은둔자 성향을 지닌 소설가 쿠르치오 말라파르테(Curzio Malaparte)를 위해 지은 집은 그 후 대중에게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사진을 통해 자크뮈스가 멧 갈라에서 이 건물을 은밀히 암시한 것을 알아챈 말라파르테의 후손이 그를 이곳으로 초대했다. “<사랑과 경멸>을 본 건 열다섯 살 때였을 거예요.” 자크뮈스가 말했다. 당시 그는 인기 패션 블로그를 운영하며 이따금씩 파리로 가서 <보그> 잡지나 에디 슬리먼의 스니커즈처럼 살 여력이 되는 매력적인 것들을 구매하곤 했다. “부모님은 ‘촌뜨기’ 같은 분들이셨어요. 이런 말 해도 되나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농사짓는 집안이었으니까요. 패션은 아주 뜬금없는 분야였죠.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다행히 가족은 그의 꿈을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넌 안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늘 제게 ‘넌 할 수 있어. 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 거야’라고 하셨죠.”) “옷을 통해 항상 프랑스 여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파리지앵 같은 진부한 이미지 말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성처럼 화려하지 않은 거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싶었죠.” 그런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에게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고다르의 영화는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사랑과 경멸>의 트레일러를 보면 자크뮈스의 비전이 그대로 투영된 걸 알아챌 수 있어요. 카사 말라파르테 소유주들을 만났을 때 ‘지난 15년간 이 집에 푹 빠져 있었다’고 터놓았죠. 그리고 말했어요. ‘여기서 패션쇼를 하고 싶다’고요.”
그렇게 6월 어느 날, 자크뮈스가 카프리에 매장을 연 지 얼마 안 돼 전 세계 패션계의 수많은 인사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카사 말라파르테에서 진행된 자크뮈스 2024 가을/겨울 컬렉션 쇼 ‘La Casa’는 40석의 관객석만으로 이루어진 극히 작은 규모로 진행됐으며, 게스트들은 보트를 타고 섬 주변을 빙 돌아 날씨가 좋지 않으면 접안도 불가능한 암석 위 작은 선착장으로 이동한 뒤 건물로 안내됐다. 건물의 울퉁불퉁한 계단 꼭대기에는 시원한 물과 그늘을 드리울 파라솔, 게스트들이 도착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기 위한 스테디캠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라파르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메라 렌즈가 가까이 다가오자 누군가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건물 안에서는 패션쇼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에스트리가 계단 꼭대기에 임시로 마련한 미디어 센터에서 사회를 봤다. 프랑스의 오래된 서적이 해풍에 서서히 삭아가고 있는 서재에서는 포르트 자크뮈스가 브랜드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땐 새로운 걸 만드는 일에만 온 신경을 쏟았던 거 같아요. 하지만 이젠 더 오래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싶습니다.” 그가 소수의 기자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아마도 아빠가 돼서 그런가 봅니다.” 빌라 계단과 옥상 파티오에서는 고다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장면을 틱톡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하기 위한 촬영 장비가 즐비했다.
행사에 늦게 도착한 게스트 중에는 기네스 팰트로도 있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자크뮈스의 솔리드 블랙 컬러 수트를 입고 등장한 그를 한 스태프가 멈춰 세웠다. “기네스, 어떻게 해주시면 되냐면요···” 그런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팰트로는 “알겠어요”라고 답한 후 머리카락을 한쪽 귀 뒤로 넘기며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는 <사랑과 경멸>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계단을 반쯤 올라간 후, 팰트로는 뒤로 휙 돌며 스타의 아우라를 뿜어냈다. “주황색 광장 쪽을 봐주세요!” 촬영감독이 그에게 소리쳤다. “제가 ‘액션!’이라고 외치면 ‘봉주르’라고 얘기하시면 되고요. 아시겠죠?” 팰트로는 젊은 감독의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쇼는 그로부터 1시간 뒤에 시작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첫 번째 룩이 등장하길 기다리던 그때, 두아 리파가 슬림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를 달려 들어오며 과장된 동작으로 마에스트리를 꼭 껴안았다. 자리에 앉아 손톱을 살피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있던 에디터들과 셀러브리티 눈에는 진정성 없는 분위기가 풍기는 연출된 장면이었지만, SNS에서는 흥미로운 돌발 상황처럼 보였다. 이윽고 현악기가 자아내는 우아한 음악과 함께 <사랑과 경멸>에서 브리짓 바르도가 입고 나온 목욕 가운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연한 노란색 드레스가 등장해 컬렉션의 시작을 알렸다. 컬렉션은 유서 깊은 가문에서 성장한 엘리트와 한껏 멋을 낸 클러버 사이의 무언가를, 자크뮈스다운 방식으로 표현해낸 럭셔리 웨어와 활동적인 스포츠웨어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고다르 영화를 수놓은 비비드한 컬러 팔레트를 선보였다. 포르트 자크뮈스는 주변을 둘러싼 인플루언서들과 패션계 기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하우스는 100년 전이 아니라 고작 15년 전에 탄생했어요.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절벽 위에 모인 사람들은 현실적인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카사 말라파르테와 그곳 석조 파티오는 높은 습도와 강렬한 오후의 태양 때문에 오븐처럼 뜨겁게 달궈져 있었고, 실바람조차 불어오지 않아 직사광선이 모든 게스트의 머리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파도가 심한 바다를 건너오느라 쇼가 다 끝나도록 멀미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팰트로 역시 이곳에 도착한 후로 이 섬의 몇 안 되는 그늘 중 하나였던 소나무 아래에서 꼼짝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연출이 근사하지 않다는 이유로 촬영 팀이 파라솔과 물병을 다 치운 뒤 게스트들은 사막 촬영 신을 위해 하염없이 대기 중인 엑스트라가 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나 또한 기운을 차리기 위해 수도꼭지로 달려갔는데,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근사하게만 보이는 모든 광경은 실은 굉장한 고생을 담보로 탄생한 것이었다.
그날 밤 자크뮈스는 카프리 해안가에 정박한 ‘레이디 아드리아나(Lady Adriana)’라는 배 위에서 애프터 파티를 열었다. 부둣가로 향하는 셔틀버스와 손님들을 태운 모터보트에서 민소매 셔츠를 입은 한 젊은 자크뮈스 팬이 확성기를 잡고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 “제가 ‘자크’라고 하면 ‘뮈스’라고 외치세요!” 시끌벅적한 새벽 1시의 피로연 버스 같은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자크뮈스가 시도하는 모든 것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기존 패션 하우스의 규범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포르트 자크뮈스는 자신의 첫 컬렉션을 디자인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미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토마토와 석양, 건축적 아름다움이 깃든 집 같은 것이랄까요? 저도 모르는 사이 계속 그런 느낌을 시각화하기 위해 디자인을 하고 있더라고요.” 대중이 그가 그려내고자 하는 느낌을 그가 만든 옷을 통해 정확히 알아차렸을 때 그는 무척 놀랐다. “브랜드가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던 때도 사람들이 어떤 차나 건물, 풍경 사진을 캡처해 업로드하면서 ‘굉장히 자크뮈스다운 이미지’라고 하는 걸 봤어요.” 파리 북부 도시 오베르빌리에에서 진행된 룩북 촬영을 감독하던 내게 그가 말했다.
오베르빌리에야말로 어떤 면에서 토마토와 석양 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은 실용적인 주택가와 노동자용 집이라고 불리는 서민주택가 사이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드문드문 공터로 뒤덮인 투박한 지역이다. 그러나 비가 갠 맑은 날이면 주택가의 앞마당과 좁은 골목길을 뒤덮은 라일락 향기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강변 위로 길게 자란 풀이 물결치는 곳에서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밝고 소박한 광경을 만끽할 수 있다. 포르트 자크뮈스는 검은 가죽 소파 한구석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전날 밤 님(Nîmes)에서 열린 두아 리파의 콘서트에 갔다가 3시간 겨우 자고 아침 기차로 파리로 돌아온 상태였다. “딱 싫어하는 생활 패턴이에요.” 자크뮈스가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괜찮죠.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파티광일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출근한 후, 저녁이 되면 즉각 귀가하는 일상 말이다. 저녁이면 마에스트리가 노트북을 계속 켜두는 걸 두고 한 소리 하다가, 10시면 온 집 안 불을 끄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 9시간은 자야 하거든요.” 그가 증언했다. (물론 가족과 보모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제 꼴 좀 보세요.” 그가 소파에 푹 파고들며 한탄하듯 말했다. 현재 작업 중인 룩북은 자크뮈스의 다음 컬렉션으로, 이미 디자인은 마무리된 상태지만 내년 1월까지는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다. 새로운 컬렉션을 공개하기 반년 전에는 컬렉션을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꺼내오지 않는 게 일반적인 패션계의 관점에서는 이례적인 타임라인이지만, 자크뮈스는 ‘보고 나서 바로 구매’라는 공격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3년 전부터 이런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그 전략이란 컬렉션이 처음 공개되는 시기에 맞춰 모든 제작, 유통, 홍보를 준비해 마지막 모델이 런웨이를 떠나는 즉시 온라인 몰과 매장에서 소비자들이 그 옷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보다 일찍 판매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카프리 쇼가 열리기 전부터 그곳 자크뮈스 매장에서는 카사 말라파르테에서 공식적으로 데뷔할 옷과 가방을 조용히 미리 선보이고 있었다.)
자크뮈스는 브랜드 초기부터 패션계의 관습을 허무는 크고 작은 도전을 즐겼다. 자크뮈스의 첫 액세서리 히트작 중 하나는 2019년에 출시된 르 치키토 미니백이었는데, 지갑만 한 크기의 초미니 가방으로 사람들의 사랑과 조롱을 한 몸에 받았다. 쇼 역시 평범한 시간과 장소를 거부했다. “그는 모든 패션쇼에 모습을 비치는 패션 피플은 자기 쇼에 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프리장의 말이다. 자크뮈스는 패션 위크 기간을 피해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유명 인사들 대신 어렸을 적 좋아하던 아이돌과 할머니들을 게스트로 초대했다. “정말 유행과는 억지로라도 담을 쌓는 사람이죠.” 프리장이 덧붙였다. “자기만의 것을 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순수함이 있어요. 키치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그런 각오가 느껴지죠.” 지난 한 해 동안 자크뮈스의 고객층은 좀 더 성숙하고 부유한 층으로 기운 듯 보였다. 촬영 중 잠시 쉬는 시간에 포르트 자크뮈스가 컬렉션 의상을 걸어둔 행어 앞을 서성이며 말했다. “주 고객층이 가방 하나만 사던 사람들에서 값비싼 기성복을 구매하는 사람들로 갑자기 바뀌었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죠.” 포르트 자크뮈스가 스튜디오를 둘러보며 말했다. “회사에는 정말 큰 변화였어요.”
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 파리 외곽의 생투앙쉬르센 벼룩시장에서 포르트 자크뮈스와 만났다. 유명 벼룩시장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마을을 이룬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항상 같은 경로를 돈다. 빈티지 의류 골목에서 시작해 가구 상점을 구경한 뒤 반 후스 앤 선스(Van Hoos & Sons)에 들러 카푸치노를 마신 다음 가정용품이 가득한 실내 매장으로 향하는 루트다. 주말마다 방문하는 성실함과 수집에 대한 강박 덕분에 그는 벼룩시장의 유명 인사로 금세 자리 잡았다. 상인들은 그에게 새로 들어온 물건이 있으면 알려주고 최근 자크뮈스 쇼를 칭찬하기도 하며, 집에 있는 쌍둥이를 위한 가벼운 선물을 건네기도 한다. “여길 너무 자주 오니까 최근에 어떤 상인분께서 아예 빈티지 부티크를 하나 열라고 권하더군요.” 포르트 자크뮈스가 말했다. 그러던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이 의자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노란색 꽃무늬 쿠션과 함께 놓인 두툼한 버들가지로 만든 암체어였다. “사실 가장 빠져 있는 건 스포츠예요. 종목은 가리지 않죠.” 그가 계속 매대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운동선수들은 제게 최고의 우상이에요.” 포르트 자크뮈스가 마에스트리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스포츠 덕분이었다. 브랜드에 스포티한 감성을 더하기 위한 캠페인 사진 촬영에 마에스트리의 형제인 프랑스 럭비 선수 요안(Yoann)을 섭외하게 된 것이다. “요안과는 정말 잘 통했어요. 그러다 요안이 마르코 얘길 꺼낸 거죠.” 포르트 자크뮈스가 당시를 회상했다. “큰맘 먹고 마르코에게 ‘오늘 저녁에 파스타 드실래요?’라는 문자를 보냈어요.” 물론 그건 정말 파스타를 먹자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싫다는 답변이 온 거죠. 뭐, 너무 피곤했었나 봐요. 그리고 2~3일쯤 지나 제가 다시 말을 꺼냈어요. ‘다 필요 없고, 그냥 우리 건물 앞으로 와요. 같이 파스타나 먹읍시다’라고요.” 그런데 우연히도 다른 지역에 사는 그의 열여덟 살 난 사촌이 그 주말에 마르코네 집에 머물고 있었고, 결국 사촌까지 다 함께 파스타를 먹게 됐다. “어떻게 보면 도움이 됐죠. 10대 아이와 함께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다 보니 뭔가 더 잘 통하게 됐거든요.”
마에스트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포르트가 패션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밖으로 나돌고, 화려한 생활을 즐길 거라 여겼어요. 알고 보니 사실 포르트는 가족애가 매우 깊은 사람이고, 오래된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는 소박한 사람이었죠.” 포르트 자크뮈스는 어릴 때부터 대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매일같이 조부모님 집에서 식사를 했어요. 할머니와 모든 친척이 모두 다 같은 골목에 살거든요. 7분이면 온 가족에게 입맞춤을 하고 올 수 있죠.” 포르트 자크뮈스의 고향 말레모(Mallemort)는 아비뇽과 마르세유의 중간에 자리한 곳으로 그의 일가는 오랫동안 그곳에 뿌리내린 채 살아왔다. 포르트 자크뮈스와 마에스트리는 연애 초기부터 확고한 가족계획을 세웠다. “만난 지 일주일쯤 됐을 때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마에스트리가 말했다. “‘아이를 가지는 건 내 꿈이야’라고 말하자 포르트 역시 자기 꿈도 그렇다고 말하더라고요.” 대리출산을 위해 3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고, 마침내 지난봄, 이들은 타호 호숫가에 머물며 쌍둥이가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대리모 출산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온 뒤 28시간을 내리 잤어요.” 포르트 자크뮈스가 먼 풍경을 보며 이야기했다. “애들이 얼마나 빨리 크는지 몰라요.”
포르트 자크뮈스의 회사에도 가족 같은 친밀감이 흐른다. “첫 인턴 앨리스는 스튜디오 책임자가 됐고요. 첫 컬렉션 판매를 담당하던 파비앙은 비주얼 디렉터로 일하고 있어요. 브랜드 초창기부터 함께한 10명 중 6명이 여전히 제 곁에 남아 있죠.” 포르트 자크뮈스가 말했다. “우리 회사는 300명으로 이루어진 대가족이라는 거짓말은 안 할게요. 솔직히 가끔 구내식당에서 처음 보는 직원을 마주칠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냉혹한 패션계에서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확신해요. 타인에게 소리를 지르고 안하무인으로 대한다는 신인 디자이너들 얘기를 들으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포르트 자크뮈스의 어머니는 42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에스모드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옮긴 지 한 달 만에 발생한 사고였다. “저에겐 꿈이 있었어요. 아주 큰 꿈이요.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갑자기 살날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게 실감 났어요. 그러니 하루빨리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죠.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주간 고향에 머무는 대신 4~5일 후에 기차를 타고 곧장 파리로 돌아왔어요. 몸속에서 엄청나게 강렬한 에너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죠. 곧바로 직물상으로 가서 옷감을 샀어요.” 그런 다음 순식간에 디자인을 완성했다. “머지않아 하나의 완전한 캠페인이 탄생했어요. 그걸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안녕하세요, 이게 제 첫 컬렉션입니다. 추운 겨울이네요’라고 썼죠. 그런데 점점 많은 사람이 그 게시 글을 공유하기 시작했어요. 텀블러에서는 100만 회가 넘게 퍼져나갔죠. 그러고 나서 3~4주쯤 지나 프랑스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믿어지지 않았죠.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영화 속 이야기 같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거든요. 어떻게든 세상이 저를 보도록 만들고 싶었죠.” (그 전에는 친구와 함께 디올 쇼에 참석하거나 몽테뉴 거리에서 열린 <보그> 페스티벌에 첫 컬렉션 의상을 들고 나가 길거리에서 “제 옷 좀 봐주세요!” 하며 소리치기도 했다.) 벼룩시장 순방 막바지에 추억에 잠긴 포르트 자크뮈스의 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고 되새겨요. 어머니는 늘 제 곁에 있으니까요. 혼자라고 느끼지 않죠.”
지난 9월, 포르트 자크뮈스는 스프링가와 우스터가 모퉁이의 판자벽 건물에 자리 잡은 첫 미국 플래그십 스토어의 최종 리모델링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했다. “좀 특이한 건물이지만 볕이 잘 들고, 주변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액세서리를 전시할 1층은 아직 철제 골조가 그대로 눈에 띄고 여기저기 전선이 늘어진 미완성 상태였다. 옷을 구경하고 입어볼 수 있는 살롱이 자리 잡을 2층에도 여전히 온갖 사다리가 겹겹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비전만큼은 사무실의 레몬나무만큼 확고하게 세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피에르 드 부르고뉴(Pierre de Bourgogne)의 대리석을 깔고, 채광을 위해 우스터가 방향으로 큰 유리창을 냈으며, 나선형 계단에는 망치로 두드려 만든 철제 난간을 세울 계획이었다. 포르트 자크뮈스는 이를 두고 1950년대 지중해풍 건축가 자크 쿠엘(Jacques Couëlle)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언급했다. “남프랑스와 뉴욕의 중간 같은 느낌이 날 거예요.” 그가 설명했다. 첫 번째 난간 부품이 막 도착하자 그가 휴대폰으로 하프 음악을 찾아 틀더니 음악에 맞춰 가느다란 철제 난간을 두드리는 자신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몇 초 만에 뚝딱 완성한 그 영상은 SNS에 업로드하기 딱 좋아 보였다.
이번 뉴욕 방문은 포르트 자크뮈스가 처음으로 쌍둥이와 하루 이상 떨어져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다행히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 그는 우스터가로 들어서는 경사로로 걸어가 난간 위에 잠시 걸터앉았다. 세 명의 젊은 여성이 그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찬사를 주르르 늘어놓았고(“방해해서 죄송한데요, 제가 정말 팬이라서요. 디자이너님은 정말 영감 그 자체예요.”), 다른 이들은 그를 지나치며 표정을 가다듬고, 뉴욕 사람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서울 사람과 파리 사람의 생각이 크게 다르다고 여기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미디어를 보며 살아가는 세상이잖아요.” 포르트 자크뮈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미국인은 제 이야기를 특히 더 좋아하고 공감해주기는 하죠. 미국이란 나라는 자수성가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니까요.”
오랫동안 포르트 자크뮈스는 언론에 젊은 브랜드가 매장을 여는 건 어리석은 일이며, 온라인 쇼핑이 범람하는 시대를 고려하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지만, 이젠 자크뮈스가 그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 큰 브랜드로 성장했다고 자신한다. “처음부터 마레 지구에 있는 귀엽고 재기 발랄한 매장에만 만족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가 이야기했다. “몽테뉴 거리에 근사하게 자리 잡은 매장을 원했죠.” 파리 하이패션의 중심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꿈을 이루었다. 어느새 그는 디자인도 값비쌀 뿐 아니라 유지비도 많이 드는 소호 부티크 숍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열여덟 살 때부터 한결같은 생각과 목표를 갖고 움직여왔어요. 그러느라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절제하며 살아왔죠.” 지금 이 순간, 소호 매장 생각에 여념이 없는 포르트 자크뮈스는 고향을 연상시키는 지중해풍 취향과 최첨단 부티크에 필요한 요소 사이에서 시시때때로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좀 더 인간적인 분위기의 숍을 만들고 싶긴 해요. 빈티지 소파 옆에서 편안한 존재감을 발하는 낡은 나무 테이블처럼요.” 그 말을 마친 그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만족스럽지 않아요. 좀 더 손을 봐야죠.” 그의 시선을 따라 나는 먼지가 자욱한 공사 중인 현장을 둘러보았다. 아직 완성되려면 갈 길이 멀지만 깔끔한 목공 작업과 문 옆에 놓인 녹색 자크뮈스 쓰레기통에서 벌써부터 독특한 매력이 풍겨나왔다. “제가 만든 것을 제가 원하는 환경에서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에요.” 순간 그의 눈에 집중된 빛이 서렸다. “사람들이 제집에 방문한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어요.” (VL)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사진
- Théo de Gueltzl, Matthieu Salvaing
- 글
- Nathan Heller
- 스타일리스트
- Julia Sarr-Jamois
- 헤어
- Diego Da Silva
- 메이크업
- Niamh Quinn
- 프로듀서
- Tann Services
- 세트
- Hella K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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