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힐러리 페시스가 그린 아주 일상적인 그림

2024.11.25

힐러리 페시스가 그린 아주 일상적인 그림

〈보그 리빙〉 2024년 겨울호의 커버는 일상에서 특별함을 포착하는 힐러리 페시스의 작품과 함께했다. 작가는 자연과 주변 사물을 관조하며 마법처럼 생소해질 때 그 일부를 예술로 고취한다. 로스앤젤레스의 작업실에서 전하는 화폭만큼 밝고 여유로운 에너지.

싱그러운 꽃향기 풍기는 작업실에서 만난 힐러리 페시스가 막바지 작업 중인 그림에 미세한 디테일을 더하고 있다. 6점의 그림은 하나의 룸 디바이더로 제작된다.

힐러리 페시스(Hilary Pecis)의 알록달록한 그림에선 따스한 진정성이 묻어난다. 일인칭시점으로 그린 커다란 사이즈의 캔버스는 관객을 그 공간 속으로 들어서도록 인도한다. 유쾌한 패턴과 강렬한 색상은 시선을 천천히 움직이게 하고, 매일 보는 존재와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은 정보가 꽉 들어찬 그림에서 익숙한 사물과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안정감과 재미를 느낀다. 언뜻 보면 평면적으로 읽히지만, 커다란 캔버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객체와 패턴이 저마다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마저 깨닫는다.

“주변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죠.” 콜라주처럼 풍부한 질감으로 뒤엉킨 그녀의 작업은 일상의 조각을 수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마트폰 사진 앨범이다. “옆으로 하나씩 넘기면서 그림의 바탕이 될 사진을 골라요. 매일 아침 러닝 하는 길, 자주 가는 베이커리 숍의 케이크 진열장, 오후 3시의 스튜디오 풍경, 친구네 고양이, 어제 찍은 식탁 위 꽃처럼 지극히 평범한 것들입니다.”

삶을 구성하는 잔잔한 단면을 대담한 색채와 형태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힐러리 페시스의 그림은 때론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러브 레터처럼 읽힌다. “11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후 제 작업이 눈에 띄게 변화했어요. 이곳은 훨씬 밝고 다양한 경관으로 가득 차 있죠. 길거리마다 시각적인 즐거움이 자리하는 곳이에요.” 늘 그렇듯 어느 화창한 오후, 로스앤젤레스 이스트사이드 스튜디오에서 그녀를 만났다.

힐러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주변의 사물, 꽃 등을 그림으로 담는다. 그렇기에 작업실에는 잔잔한 행복의 기운이 흐른다.

진한 머스터드, 쨍한 살몬, 티파니 블루 등 선명하고 경쾌한 색상을 많이 사용한다. 실제로 보는 당신 역시 그림만큼 활기차다.

색은 나의 삶과 작업에서 중요하다. 늘 밝은 색상에 자석처럼 끌리고,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조차 색에 의존한다. 특히 밝은 색상과 대조되는 보색의 하모니를 사랑한다. 그러나 의외로 작업을 시작할 때는 그림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지 않는다. 색을 여러 겹 쌓으며 다양한 색조를 시도하다 보면 적절한 색상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주변에 두는 물건, 옷장 역시 밝은 색상과 복잡한 패턴으로 가득하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있을 때 집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워진다.

사적인 공간도 다채롭게 꾸미는 편인가? 공간에서 색이 주는 힘은?

통통 튀는 색감의 패턴이 풍부한 에클레틱 스타일을 좋아한다. 집은 클래식한 현대 작품과 독특한 텍스타일이 마구 섞여 있고, 수공예품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에야 흰 벽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눈이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 작품 주변에 넉넉한 화이트 공간이 있으면 오히려 오브제의 화려한 색상을 즐길 수 있다.

당신의 경력이 흥미롭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전업 화가가 된 지는 4년여밖에 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코단스키(David Kordansky) 갤러리의 레지스트라(소장품 관리자)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그린 그림은 현재 90만 달러에 달하는 가격으로 거래될 만큼 급격히 성장했는데, 전 세계 컬렉터들이 모두 소장하고 싶어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돌아보면 그때가 있었기에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에는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그림을 그렸으니까. 밀린 청구서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하더라도 일주일에 3일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순간만큼은 해방감을 느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고 여겼고,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다.

그림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순수하고 다정한 시선이 느껴진다. 처음 그림을 그린 순간을 기억하나? 유년기의 기억 중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어린 시절 PBS 방송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던 <시크릿 시티(The Secret City)>라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의 원조 격이다). 엄마는 그걸 매주 틀어주셨고, 우리 남매는 커피 테이블에 둘러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다. 번호대로 색을 칠하는 책 <피포 페인팅(Paint By Numbers)>을 기억하나? 그것도 정말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종류의 예술에 관심이 생겼고, 관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예술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늘 재정적인 성공보다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인터뷰를 앞두고 여러 기사를 살폈다. 판화, 오일 스틱, 수채화 작업도 해본 적 있다고 했다. 결국 아크릴 페인팅을 매체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무한한 수단과 가능성이 있지만 결국 내가 가장 자유롭게 느낀 건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 회화였다. 한 가지 매체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옵션으로 경험해본 걸 후회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디올과의 프로젝트로 레이디 디올 백을 재해석하는 기회를 가졌다. 비즈, 스팽글 등을 사용해 조각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가방을 만들었다. 새로운 재료에 대한 도전은 시각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고 나를 성장하게 한다.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한다. 이번 <보그 리빙> 커버를 장식한 그림처럼 당신 작품엔 꽃이 자주 등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로 그린다. 주변에서 영감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패턴, 질감, 그림자 등을 비롯해 일상적인 물건을 주의 깊게 바라보다 보면 마법처럼 생소해질 때가 문득 있다. 그 일부를 고취하는 것이 목표다. 꽃은 늘 탐구하는 주제다. 꽃이 가진 유기적인 형태, 대칭적 디자인, 화려한 색상과 풍부한 레이어는 좋은 소재가 되어주기 때문인데, 같은 종류의 꽃이어도 그림마다 다르게 나오는 점도 흥미롭다.

누군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사실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풍경화에서는 원근감이 강조되지만 정물화에서는 가구와 패턴이 겹치는 과정에서 흐릿해지고 약간 추상화되는 모습도 보인다.

나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능력이 없다.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웃음) 그래서 정물화를 그릴 때는 각색된 구성을 통해 장소의 아이디어와 인지 가능한 지표를 전달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미리 그려놓은 스케치를 신경 쓰지 않고 붓으로 빠르게 그리는 것이 비결이다. 결과가 만족스럽다고 판단하면 그 주변을 정리한다. 물웅덩이, 잎사귀, 음료 잔 등 단순화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추상적으로 그린다.

작업 중인 그녀 뒤로 케이크 진열장을 묘사한 미완성작이 보인다. “웨인 티보(Wayne Thiebaud)의 1960년대 그림이 떠올라 사진을 찍었어요. 그려보면 재밌겠다 싶었죠.”

직접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변환하는 구체적인 창작 과정이 궁금하다.

스마트폰 앨범에서 사진을 보거나 실제로 그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간단한 행위가 그림의 기초가 된다. 물건 배열, 그림자가 공간을 장악하는 모습, 유기적이고 추상적인 선이 어떻게 엉켜 있는지 먼저 파악한다. 사진을 선택한 후에는 사진에서 얻은 정보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먼저 크게 스케치하고, 블록을 정해 분리한다. 그리고 붓으로 색을 천천히 쌓아가는데, 항상 고르게 덮지 않는다. 때때로 더 의미 있는 특정 영역에 집중하고,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은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 즉 어떻게 그려야 할지 종잡을 수 없던 것이 나중에는 가장 만족스럽게 완성되기도 한다.

작업실 곳곳에 ‘작가 소장’이라고 표기된 그림이 눈에 띈다. 좋아하는 작품이어서 팔지 않은 건가?

그렇다. 이제 시리즈마다 하나씩 소장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누가 작품을 원하면 감사하면서 판매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가지고 있는 작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작품인데 다시 보기 어려운 것이 아쉬워서 애정하는 작품을 남겨두기 시작했다.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

지난해에 그린 ‘Malibu Trail’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다. 말리부에서 하이킹을 하다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분홍색 풍경화다. 알다시피 캘리포니아는 일몰로 유명한데, 그날은 유독 분홍빛과 보랏빛 하늘이 마른 풀밭을 비추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날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여러 점 그렸지만, 실제 그 자리에서 느낀 웅장함과 분위기는 큰 캔버스가 아니고서는 충족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245×355cm 사이즈로 그림을 완성했다. 처음 작업해본 크기라 마침내 완성했을 때 모든 것을 쏟았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아들의 수영 경기가 시작되기 전, 시선을 사로잡는 고요한 윤슬을 사진으로 남겼다. 완성된 그림에는 ‘7ft 0in’라는 제목을 붙일 계획이다.

때때로 찾아오는 창의성 부진이나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나?

그럴 때는 머리를 쓰는 일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다른 작업에 집중한다.(웃음) 배경을 칠하거나 단조로운 패턴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식힐 수 있고, 또 다른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한다. 작은 움직임, 심지어 원을 그리는 것 같은 움직임조차 어딘가로 이끌어줄 거라 여긴다.

러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한 훈련과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 필요로 하는 지구력과 에너지는 매우 비슷한 것 같다.

삶의 많은 부분을 마라톤이나 달리기에 전념할 계획은 없었다. 4년 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캘리포니아에 닥쳤을 때 친구가 하프 마라톤 훈련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서 호기심에 시작했다. 2021년 첫 마라톤을 완주하고 보니, 실제 레이스보다 훈련하면서 뛰는 과정과 그 순간을 더 즐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해가 뜨기 전, 가족이 일어나기 전에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규칙적인 루틴을 선호하는 편인 데다 러닝은 뇌에 산소를 공급하고 그날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때문에 생산적이다. 러닝과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매우 유사하다. 시작 단계를 거쳐 성장 단계, 그리고 실제 레이스나 전시회가 가까워질수록 강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운동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그림 역시 더 강렬한 액션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수고의 정점에 다다르면 그 노력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만족’이라는 보상이 기다리는 것이 똑같이 닮았다. (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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