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의 두 가지 얼굴, 두 가지 감정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김성철이 <지킬 앤 하이드>에서 내면의 두 남자와 싸우다.
<지킬 앤 하이드> 캐스팅 소식 후 차에서 넘버를 노래하다 울었다고요.
“내가 ‘지금 이 순간’을 부르다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서 감정이 격해졌죠. 시간이 진짜 빨리 흘러요.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특기로 뮤지컬을 준비했어요. 당시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지킬 앤 하이드>였죠. CD 두 장을 번갈아 듣고 또 들으며 연습했어요. 그땐 제가 <지킬 앤 하이드> 무대에 설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교과서잖아요.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도 ‘지금 이 순간’이라는 넘버는 알 정도니까요.
그런 작품에 참여한다니 영광이죠. 나 진짜 열심히 살았구나!
결국 입시에서는 어떤 넘버를 불렀나요?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흥선대원군이 부르는 넘버와 <렌트>에서 로저가 부르는 ‘One Song Glory’를 특기로 준비했죠. 그때는 저와 잘 맞는 곡이라고 여겼어요.
지킬 역을 위해 목소리 톤을 낮추느라 애썼죠. 평소 말하는 톤도 낮은 편인데요.
최근 두 달간 매일 연습하고 있어요. 다른 출연진은 <지킬 앤 하이드>를 많이 해왔지만 저는 뉴 캐스트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이제 어느 정도 톤이 잡혀서 다행이에요. 지킬과 하이드의 톤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지혜로운 의사 헨리 지킬은 지적인 보이스를 위해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소리를 쓰려 하고, 하이드는 야생의 동물 사운드와 움직임을 연구하고 있어요.
야생동물이요?
레퍼런스는 많죠. 영화 <트와일라잇>의 늑대인간을 좋아해요. 그의 느낌을 하이드에 가져오려 했고, 지킬과 상반돼야 하기에 더 극적인 요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늑대인간이라, 외로운 캐릭터에 마음이 가는군요.
맞아요. 지킬도 진짜 외로운 사람이죠. 지킬과 하이드 누구 하나 편이 없어요. 원작은 존 어터슨이란 변호사가 화자로 쓴 글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지킬의 편지가 나오는데요, 공연에서도 어터슨 역할을 하는 선배께서 배경 설명을 해주죠. 어터슨이 지킬 곁에 있지만, 그조차 또 극 중 사랑하는 여인 엠마조차 온전히 지킬의 편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더 외롭죠.
배역에 애정이 깊어서인지 지금 말하면서도 눈물을 글썽이는군요.
2막에서 연기를 하다 보면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요. 힘들고 외로운 감정이 솟구치고 너무 가여워요. 저도 어린 나이는 아니기에 경험이 꽤 쌓였잖아요. 연기를 하며 제 설움도 함께 묻어나와요. 이 역할을 하길 참 잘했어요.
녹록지 않은 과거를 지킬에 빗대면서 위로받겠어요.
맞아요. 나만 이렇게 외롭고 힘들지 않았다, 같은.
<지킬 앤 하이드>의 모든 캐스트와 연주자가 모여 상견례 겸 첫 대본 리딩을 할 때 어땠나요?
100여 분이 다 저만 쳐다보는 듯했어요. 실제론 아니더라도 그만큼 긴장했죠. 어릴 때부터 워낙 많이 듣던 음악이고 좋아한 드라마니까 해낼 수 있었어요.
11월 29일 프리뷰 공연부터 대장정의 시작입니다. 뮤지컬 경험이 많지만 디데이가 다가오면 어떤 상태인가요?
불안, 초조··· 무대에 빨리 오르고 싶다가도 어떻게 보일까 걱정되고요. 요즘 1막과 2막을 붙여서 하는 런 스루 연습이 끝나면 녹초가 돼요. 여태 다른 뮤지컬도 쉽지 않았지만 이건 정말 쓰러질 거 같아요. 지킬의 내면 싸움이 빈번하고, 하이드가 나올 때는 말씀드렸듯이 짐승의 느낌을 내려고 에너지를 많이 쓰기 때문이죠. 체력 관리를 더 잘해야 해요. 공연 중에는 술을 먹지 않고 8시간 이상 자요. 평소 좋아하던 야외 운동도 최소화하고요.
첫 공연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다섯 번째 공연까지는 지인이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떨리는데··· 죽을 수도 있어요.(웃음)
<지킬 앤 하이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로 ‘I Need to Know’를 꼽았군요.
전체 메시지를 담고 있거든요. 왜 사람들은 악한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 해결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지킬의 다짐과 현재 상태를 보여주죠. 결국엔 자기 몸에 실험을 하고 파멸에 이르는데 그 스포일러 같은 노래기도 하죠.
2014년 창작 뮤지컬 <사춘기>로 데뷔했죠. 다른 매체보다 뮤지컬에 먼저 인연이 닿은 계기가 있나요?
이 스토리를 처음 얘기합니다. 본래 영화배우가 꿈이었어요. 학교에 있는 영상원에서 졸업 작품을 공연할 때 저 같은 연기과 배우들이 많이 참여해요. 그 작품이 영화제에도 출품되고 좋은 성과를 얻기도 하고요. 대학원 과정에 있는 음악극창작과에서 뮤지컬을 작곡·작사하는 분들 역시 연기과 친구들에게 출연을 부탁하곤 하죠. 그곳에서 처음으로 <명동로망스>의 리딩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학교 무대에 정식으로 올랐어요. 당시 김민정 연출님이 “너는 뮤지컬을 해야 한다, 다른 곳에 추천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여름방학에 미국으로 여행 가야 한다고 거절했죠.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요.(웃음)
결국 오디션을 보러 갔군요!
그렇죠. 우란문화재단에서 인력육성 지원 프로그램을 했어요. 신인이나 재기하려는 배우를 뽑아서 프로필을 촬영해주고 연기와 보컬 코치를 한 다음에 <엑터스>란 공연을 올리도록 도왔죠. 관객으로 연출가, 작곡가 등 공연 관계자를 초대했어요. ‘이런 배우들이 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자리였죠. 당시 박소영 연출님이 제 무대를 보고 <사춘기>라는 뮤지컬의 오디션을 제안했어요.
귀한 프로그램이었군요.
그렇죠. 제가 2기로 선정됐고, 그 후에는 폐지됐다고 들었어요. 10년이 지났으니 이제야 얘기하는데 당시 아버지께서 아프셨고 석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돈을 벌어야 했죠. 손에 잡히는 건 다 했어요. 제 필모그래피에서 2014~2016년에 일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죠. 3년 정도 공연을 엄청 한 다음에 2017년에 본 오디션이 <슬기로운 감빵생활>이었어요. 그 후로 뮤지컬을 일부러 쉬었어요. 목소리가 뮤지컬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영상에서는 튀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물론 나중에 공연이 너무 하고 싶었죠. 그래서 단기 공연에 오르거나, 노래보다는 드라마 위주의 작품을 했어요. 그러다 <데스노트>를 만났죠. 뮤지컬과 깊은 사랑에 빠져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1년에 한 편씩은 꼭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뮤지컬과 영상을 오갈 때 발성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이제는 작품에 맞춰 조절할 수 있어요. 경험이 무서워요.
김성철에게 뮤지컬이란?
진짜 재밌어요. 뮤지컬이란 장르는 시각적, 청각적 즐거움이 함께하고 여러 경험이 가능하죠. 게다가 제가 노래 부르기를 워낙 좋아합니다. 스트레스가 날아가요.
앨범 제안도 받죠?
몇 번 있었지만 제겐 아직 도전입니다.
“예능 프로그램과 달리 작품에서는 큰 부담을 갖지 않는다”고 했어요. 걱정하기보다는 일단 해본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지킬 앤 하이드>는 올 초부터 준비했으니 거의 10개월을 연습한 셈이에요. 무대에 오를 때 긴장되지만 이 시간을 믿죠. 영화나 드라마 촬영할 때도 그 인물로 살아 숨 쉰 기간이 꽤 길기 때문에, 제가 공부하고 연구한 것들을 믿어요. 그런데 예능 프로그램은 대본이 있더라도 순발력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예능 프로그램을 재미를 위해 보는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두려워요.
완벽주의자인가요?
그런 편이에요. 예전엔 루틴이 깨지면 화가 날 정도였으니까요. 이젠 살다 보면 여러 변수가 있다는 걸 알지만요. 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많이 유들유들해졌습니다.
데뷔 10주년이죠.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나요?
모르겠어요. 다만 그때로 세월을 돌린다면 거절할게요. 유치원 때라면 모를까요. 연기를 꿈꾸던 시절을 또 관통할 수 있을지 미지수예요.
너무 열심히 살았기에?
그때의 간절함과 소중함, 감사함은 여전하지만 그때는 제 열정만 생각한 것 같아요. 이제는 시야가 넓어졌고 주변도 살피죠.
10년 전 김성철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지킬도 하고 넷플릭스 드라마 주인공도 할 거다.(웃음)
꾸준히 연기를 해왔지만 2~3년 새 대중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했어요.
신기해요. 대중문화 종사자는 선택을 받아야 하잖아요. 실력이 뛰어나도 대중의 사랑 없이는 잘되기 어려워요. 그러니 늘 준비돼 있어야 쉽게 무너지지 않죠. 그저 내가 쌓아온 탑을 더 굳고 단단하게 만들어가려고 해요.
그럼에도 사람이 무너질 때가 있는데 어떻게 힘을 내나요?
작품의 성패에 배우 책임이 있어요. 흥행 성적이 좋지 않으면 그 이유를 곱씹고 발전 방향을 찾으려고 해요. 그래야 성장할 수 있어요. 하나 더 말하자면, 연기는 제 목소리와 얼굴에서 나오기에 할 수 있는 캐릭터에 한계가 있어요.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배우의 몫이죠. 이를테면 100m를 원래 13초에 달리던 인간이 12.8, 12.7, 이렇게 0.1초, 0.01초라도 계속 단축해나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패션 컬렉션을 다 찾아볼 만큼 옷을 좋아하죠.
요새는 잘 접하지 못해요. 옷에서 빈티지 시계로 관심사가 바뀌었거든요. (김성철은 검은 가죽끈의 1970년 브레게 시계를 차고 있다. “다이얼 돌리는 소리가 예뻐요”라며 들려준다.)
어려운 길로 들어섰군요.
맞습니다. 영화 <파과>에서 투우라는 역할을 맡으면서 시작됐어요. 원작 소설에 “투우의 손목에 빛나는 롤렉스”라는 글귀가 있었죠. 아, 그럼 나도 롤렉스를 사야겠다 했어요. 투우가 저를 망쳤습니다.(웃음)
평소 스타일은 어떤가요? 배우들이 자주 답하는 ‘편한 트레이닝복’ 얘기는 금지입니다.
입고 벗고 분칠하는 것이 일이다 보니 트레이닝복을 선호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저는 기본적으로 클래식과 댄디를 추구해요. 셔츠도 꽤 많고요. 예전에 좋아한 스트리트 패션 무드나 ‘주렁주렁’과는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인터넷 세상을 의심부터 하는 편”이라는 인터뷰를 봤어요. 연예인으로서 인터넷 미디어와 함께 살아가야 할 텐데, 정해놓은 규칙이 있나요?
있죠. 정신 건강을 위해 굳이 찾아보지 않아요. 요즘엔 <지킬 앤 하이드> 연습을 하느라 다른 일은 거의 불가하고요. 저 인터뷰는 영화 <댓글부대> 개봉 당시였을 거예요. 그 작품을 한 이유도 미디어 세계의 폐해에 불만이 많기 때문이죠. 배우뿐 아니라 누구든 사생활이 노출되고, 편파적인 시선을 받기 쉬워졌어요. 인터넷의 발전과 스마트폰 활성화가 이점도 있지만 원치 않게 이슈가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등 문제점이 많죠.
인터넷이 없어도 되는 현대인이 제 꿈입니다.
우리 업계도 어쩔 수 없이 모니터링해야 하잖아요. 인터넷을 멀리하기는 너무 어렵죠.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예요. 영화나 드라마도 OTT를 통해 관람하면서 빨리 판단해서 꺼버리거나 빨리 감기로 보는 등 가볍게 소비돼요. 방송사에서는 자체적으로 드라마 요약본을 유튜브에 올리고요.
아쉽죠. 제게 영화는 앉은자리에서 나가지 못하고, 작품을 정지할 수도 없고, 장면을 놓칠까 봐 화장실 가는 것도 망설이는 매체거든요. 시대는 변하잖아요. 드라마 제작 팀도 요약본을 만들고 싶지 않지만 대중의 요구에 맞추는 거죠. 대중의 사랑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나만의 길을 가는 예술과는 또 다른 영역이에요. 저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춰야죠.
민규동 감독의 영화 <파과>는 60대 킬러(이혜영)와 젊은 킬러(김성철)가 등장합니다. 원작에서 늙음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어요. 촬영하면서 노년을 그렸을 거 같아요.
먼 미래를 잘 떠올리지 않아요. 다만 주름을 좋아해요. 주름이 그 사람의 경험과 삶을 보여주잖아요. <파과>에서 이혜영 선생님과 연기할 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경험치 또한 놀라웠어요. 역할을 사랑하고 작품과 맞닿은 모습에서 많이 배웠고요. 어릴 때부터 본받고 싶은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이기에 저도 어린 친구들을 응원하고 도움을 주며 나이 들고 싶어요.
주름진 김성철도 멋지겠군요.
완전히 자연스러운 주름을 기대합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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