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여기저기서 ‘올해의 베스트’ 리스트를 분주히 만들곤 한다. 출판 일을 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유사한 설문에 참여해달라는 청탁을 받고는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선정 대상 목록을 ‘올해’로 한정해도, 한 해 평균 쏟아지는 책을 어림짐작하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그중 ‘최고’를 꼽는 일이라니 괜스레 부담스럽다. 영화계도 비슷하다. 올해의 베스트 영화뿐 아니라 한국 영화 100년 사를 아우르는 최고의 영화를 꼽아야 할 때면 괜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최고’의 의미는 제각각일 것이다. 범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문학이냐 비문학이냐부터 인문, 사회과학, 예술, 과학 등 분야별로 세분해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다. 뭔가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그럴 때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명작이라 평가된 작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어김없이 반발심이 생긴다. ‘고전 작품만 계속 ‘베스트’로 언급된다면, 새로운 작품은 언제 호명될 것인가. 오래도록 가치 있다고 평가된 기존의 좋은 것들을 존중하되,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평하고 소개하는 일 또한 비평가의 고유한 역할이 아닌가.’ ‘베스트’를 꼽아달라는 청탁 앞에서 과연 나는 그간 어떤 책이나 영화를 ‘베스트’라고 생각해왔는지, 이미 ‘베스트’라고 공인된 것에 어째서 신경을 쓰는지, 그럼에도 조금은 다른, 어쩌면 꽤 낯선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고 싶다는 복잡한 생각이 얽히고설킨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와 나누다가 그럼 ‘의미 있는 책, 기억할 만한 책’은 어떤 책인가로 주제가 번져나갔고 증언집과 구술서를 생각하게 됐다. 그 경우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재난과 참사 현장의 구체적인 생존자, 피해자, 유가족, 목격자, 참여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한 것일 때가 많다. 사건과 참사를 둘러싸고는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분석과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제안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라도 사건과 참사의 현장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고 주목해야 한다. 증언과 구술에 관한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이고 실천적이며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출간한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이태원 참사 가족들이 길 위에 새겨온 730일의 이야기>(2024, 창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기록이다.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이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맞아 지난 10월 29일에 펴낸 책이다. 참사 1주기에 발간한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생존자와 유가족이 증언하는 10·29 이태원 참사>(2023, 창비)가 청년 피해자에 집중해 유가족과 시민의 경계를 넘나들었다면, 이번 책은 부모 세대 유가족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우리는 왜 이 참사를 둘러싼 고통의 이야기를 듣는가. 그곳에 존엄이 훼손당한 사람이 있어서다. 부당한 일을 겪은 이의 곁에 서는 것은 공동체를 함께 이루는 시민의 의무다. 재난으로 삶이 부서진 이들이 사회를 향해 외치는 목소리에 잘 응답하기 위해서는 재난이 끼친 피해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회복을 이해할 실마리가 손에 쥐어진다. 우리는 통념 속의 피해자가 아닌, 현실의 피해자가 지닌 여러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여는 글’ 일부
‘1부 고통과 슬픔에도 그치지 않았던 730일의 걸음, 2부 재난참사 ‘피해자’라는 이름, 그 안에는, 3부 참사가 물었다, 어디로 나아갈 테냐고’로 이어지는 이 증언과 구술의 전개는 참사 이후, 켜켜이 쌓인 시간과 그 시간을 관통해 결국 향하고자 하는 바가 어디이고 무엇인지 질문해온다. 특히 이 책의 제목,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를 곱씹는 건 뼈아프고 또 아프고 아프다. 참사는 단지 이태원의 ‘그 골목’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참사 이후, 어째서 또 한 명의 참사 희생자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는가. 참사는 골목 그 너머, 그 이후, 바깥세상과 계속해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명징하고 무시무시한 진실. 그러니, 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참사는 계속될지 모른다는 끔찍하고 분명한 신호. 그것을 멈춰 세우기 위해, 바로잡기 위해 진술하고 구술하고 기록한다.
‘이 책에는 가족을 잃은 이들의 절망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인 유가족이 먼저 행한 ‘무엇’과 먼저 만난 사람들, 먼저 쏟은 힘이 담겨 있다. 유가족들은 진실을 찾는 괴로운 책임을 먼저 지고 나서서 용감하게 진실에 다가간다. 이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어떤 대처와 대비가 필요한지, 어디에서 진실이 오염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알게 된 건, 나 자신도 이태원 참사의 파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내게도 용기가 생겼다. 이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이태원 참사와 연결된 사람이다. 누구보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이다.’ – <어린이라는 세계>(2020, 사계절) 저자 김소영의 추천사
아직 이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 책장을 펼치고 덮고 다시 펼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앞선 추천사의 문장에 기대 참사와 연결된 사람으로서 다시 책장을 펼칠 것이다. ‘한 해가 가기 전에 천천히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지’라는 다짐으로.
비로소 펼치게 된 이 책이 나로서는 올해 놓쳐서는 안 될, 꼭 읽어야 할, 두고두고 읽어볼 책이다.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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