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턴 예술가, 야코포 에트로의 뜻밖의 파리 아파트
야코포 에트로가 파리 레프트 뱅크 아파트를 강렬한 원색에 간결한 배치를 앞세운 아르데코 스타일로 꾸몄다. 패턴의 예술가인 그가 절제력을 발휘한 사연은?
1968년 탄생한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에트로는 에스닉하면서도 우아한 페이즐리 패턴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하우스 설립자의 맏아들로 현재 스타일 고문을 맡고 있는 야코포 에트로(Jacopo Etro)의 새 파리 아파트에서는 특유의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자투리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페이즐리는 아름답죠. 하지만 그걸 하루 종일 보고 나면 시선을 환기할 만한 풍경이 필요해요. 밀라노에 있는 집 역시 마찬가지로 꾸몄죠.” 환한 미소와 함께 에트로가 입을 열었다.
최소한의 패턴만 사용했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에트로의 근사한 아르데코 스타일 아파트를 묘사할 때 ‘밋밋함’이란 단어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50년 전 야코포의 부모가 처음 이 집을 구입했을 때도 눈에 띄었던 1928년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붙박이 세간과 디자인 요소가 여전히 아파트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주변 건물에서는 재건축과 리모델링으로 이런 요소가 일찍이 소멸해버린 만큼, 10년 전 이 집을 물려받았을 때 에트로는 과거를 간직한 소중한 디테일을 지우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런 그가 이곳을 건축한 미셸 루 스피츠(Michel Roux-Spitz)가 쓴 1930년대 설계 서적을 우연히 발견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책에 아파트 첫 건설 당시 도면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리모델링 작업의 귀중한 가이드가 되었다.
그러나 건축물 본연의 매력을 살리겠다는 에트로의 다짐과는 별개로 미드 센추리 건물과 전형적인 오스만 양식 아파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비교적 좁은 너비의 이 집은 지극히 현대적인 인상이다. 기하학적 베이 윈도우(Bay Window, 벽보다 돌출된 창)와 장식을 과감히 생략한 건물 파사드가 모던한 인상에 일조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루 스피츠가 전통적인 중산층 건물의 특징을 똑같이 적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산층 건물의 특징이란 침실과 응접실이 명확히 나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야코포는 이런 초기 실내 구조를 변함없이 유지했다. 널찍한 복도를 통해 실내로 진입하면 바닥에서 천장으로 이어지는 거울과 검은색 책장이 한쪽 벽을 독차지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관문 바로 옆에는 아르데코 스타일 의자와 책상이 쇼룸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으며, 오른쪽의 거울 여닫이문을 열면 침실이 등장한다. 아파트 너비와 맞먹는 길이의 널찍한 거실에서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뤽상부르 공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가 디자인한 크림색과 검은색 ‘브릭(Brick)’ 룸 디바이더가 다이닝 룸과 응접실을 분리하고, 벽난로와 벽의 스모키한 회색 대리석이 푸른빛 선명한 녹음과 드라마틱한 대조를 이뤘다.
파리 경매시장과 벼룩시장 애호가인 에트로는 제작 시기가 세계대전 무렵까지 거뜬히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예술품과 가구를 틈틈이 모아왔다. 그의 수집벽은 파리 아파트를 꾸미는 동안 한층 활발해졌다. 아파트 건설 당시 모습을 상상하며 그는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소환할 수 있는 소품을 찾아다녔다. “같은 집은 없어요. 각 집의 개성이 다르죠.” 에트로의 파리 아파트를 방문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밀라노에 머무는 에트로와의 줌 미팅에서 그가 이야기했다. 그의 뒤편으로 하얀 벽에 현대미술 작품이 걸려 있었다. 파리 아파트와 달리 고풍스러운 매력이 흐르는 공간이 모니터에 펼쳐졌다. “어떻게 해서든 잘 맞아떨어지게 해야죠. 공간과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는 요소를 들여놓을수록 보기 좋더군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파리 아파트를 다시 바라봤다. 벽난로 옆에는 에밀 자크 룰만(Émile-Jacques Ruhlmann)의 1920년대 후반 작품으로 추정되는 래커 칠한 검은색 캐비닛이 두 점 놓여 있고, 금빛 배경에 나른한 모습의 흑표범이 그려진 폴 주브(Paul Jouve)의 1930년대 그림은 노르스름한 거실과 침실 벽을 멋지게 수놓고 있었다. 전부 아파트 지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에트로는 과거의 공간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아파트 전체에 고급스러운 버건디 컬러의 맞춤 카펫을 과감하게 깐 것처럼 군데군데 대담한 선택도 돋보였다. 물론 이조차도 “과거에는 카펫으로 바닥을 완전히 덮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마주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만 애초에 깔린 카펫은 아이보리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에트로는 회색 대리석 벽과 이색적인 대조를 이룰 컬러로 빨간색을 골랐다. 또한 “아주 깔끔하고 극도로 간결한 디자인”의 식사 테이블과 의자가 이곳에 어울릴 거라 여겼기에 오래된 나무 테이블을 치우고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가 1968년 디자인한 유리 테이블 ‘도제(Doge)’와 페테르 카르프(Peter Karpf)의 접이식 의자를 들였다. “집에 옛 추억이 깃들어 있길 바라지만 그렇더라도 케케묵은 느낌이 나서는 안 되니까요.”
여행광인 야코포는 여행을 하며 패션에 대한 영감은 물론 집을 꾸밀 소품과 텍스타일 등을 채집하는 일에도 공을 들인다. (“귀국할 땐 보통 20~30kg에 달하는 초과 수하물 비용을 내곤 하죠.”) 최근 그는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Karnataka) 여행에서 19세기 무칼링가(Mukhalinga) 청동 두상 조각상을 사왔다. 회색 소파와 멋진 대비를 이루는 쿠션은 콩고에서 공수한 ‘쿠바(Kuba)’ 직물로 손수 커버를 만들어 씌운 것이다. “쿠션은 판타지를 담아낼 수 있는 훌륭한 그릇이에요. 취향이나 관심이 바뀔 때마다 새집으로 이사할 순 없잖아요. 소파 커버를 교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럴 때 쿠션 커버만 바꿔도 도움이 될 거예요.”
아파트가 파리 6구에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을 대부분 걸어갈 수 있지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그는 종종 뤽상부르 공원으로 향한다. “산책은 진짜 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입니다. 뤽상부르 공원에 갈 땐 휴대폰을 끄고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죠.”
파리 아파트는 에트로의 비전을 완벽하게 실현한 결과물로 보였지만 에트로는 손볼 곳이 많다고 얘기했다. “절대 끝이 안 나죠.” 흥미로워 보여서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들인 소품이 오히려 눈엣가시로 보이기도 한다. 집에 두려고 구입한 그림이 에트로 생제르맹데프레 매장에 훨씬 잘 어울린 경우를 상기하며 그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트로는 무언가에 설레며 호기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아주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취향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죠. 오랜 세월을 거쳐온 이 아파트 역시 부모님이 처음 구입하셨을 때에 비해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과거부터 이어온 독특한 매력을 여전히 은은하게 간직하고 있죠. 그것이 중요합니다.” (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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