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서울 오후 3시’의 풍경 발견하기
성곡미술관에서 오는 12월 8일까지 열리는 그룹전 <서울 오후 3시 Cloudy 3pm> 전시장으로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시계를 봤습니다. 공교롭게도 오후 3시더군요. 거짓말 같은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오후 3시 무렵은 맑게 빛나는 오전을 한참이나 지나 저녁을 맞이하기 전 돌연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시간대입니다. 나른하기도 하고, 고단하기도 한 이 진공의 시간에,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만큼 나른하고 고단한 현실을 감각한 회화 작품을 만난다는 것이 흔치 않은 경험이니까요. 이번 전시는 화가 9명이 살아낸 2000년대의 물리적, 심리적 풍경을 그려냅니다. 때로는 희부옇게, 때로는 적나라하게 그 독특한 정서를 형성하는 작품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던 이들의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시선을, 기대를, 희망을 덤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에 소위 ‘젊은 작가’로 각광받은 작가들은 일상성으로 빛나는 회화성을 구축함으로써 회화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려고 분투했던 것 같습니다. 각자 발붙이고 살던 세계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 대수롭지 않은 풍경, 뻔하고 흔한 장면이 연달아 펼쳐집니다. 객관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딱딱한 대형 건물의 파사드, 철 지나 물 빠진 수영장처럼 쓸쓸한 풍경, 골목에 선 친구 혹은 김밥을 먹는 동료의 모습, 아파트 재개발 공사 현장, 매일 오가는 터널 주위의 풍광… ‘특별하지 않음’을 동력 삼은 이들의 특별함은 사진 매체를 회화의 스케치로 활용한 공통의 방식을 통해 더욱 배가됩니다. 이들에게 사진 매체는 흘러가는 시공간을 포착하는 작가들의 눈이 되어 회화를 더 회화답게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2003년 박주욱이 아파트 공원 앞 나무를 네거티브 필름처럼 전도시켜 그린다. 2004년 노충현이 디지털카메라로 살풍경한 한강 풍경을 찍어서 그린다. 2005년 이제가 자라왔던 동네 금호동을 재개발을 앞두고 사진 찍어 그린다. 2005년 이광호가 창동스튜디오에서 만난 사람들의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어 그린다. 2006년 박진아가 로모 카메라를 이용하여 한강공원의 소풍 장면을 그린다. 2006년 강석호가 뒷짐 진 남자를 찍은 사진 한 장으로 60여 점의 연작을 그린다. 2006년 김수영이 한국일보사 건물 전면 사진을 찍어 모듈 비례를 그린다. 2007년 서동욱이 카메라 플래시 효과를 이용하여 상수동 골목에 서 있는 HJ를 그린다. 2007년 이문주가 은평뉴타운 개발 전의 진관시장을 카메라로 취재하고 그린다.” – <서울 오후 3시 Cloudy 3pm> 전시 텍스트 中
보통 회화는 캔버스 안에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고 또 끝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회화는 평범한 일상을 그리고 있기에 캔버스 안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일기가 오늘을 담고 있음에도 어제 혹은 내일과 이어지듯, 이들의 작품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무려 20여 년 전 작품은 현재의 풍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때 서울 곳곳을 쏘다니며 느꼈던 멜랑콜리한 정서가 다시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회화는 시간을 붙잡을 뿐 아니라 그렇게 붙든 시간을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에 다시 투사합니다. 회화의 리얼리티는 얼마나 그것을 자세히 묘사 혹은 재현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들이 본 것을 우리가 본 것과 어떻게 만나게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작가는 나이 들어도, 이들의 회화는 영원히 젊을 겁니다. 아마 20~30대 관객이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군요. 아, 가능하다면 오후 3시에 찾아가 보기를 강력하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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