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터링을 넘어 ‘식용 조각’ 경지에 오른 푸드 아티스트
음식과 예술에 진심인 아나나스 아나나스 듀오는 기상천외한 테이블을 차린다. 푸드 스타일링을 넘어 먹을 수 있는 설치 작품이다.
누군가는 ‘음식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며 흉을 볼지도 모른다. 길거리에서 가져온 화강암 덩어리에 몰드를 넣어 굳힌 초콜릿 조각부터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과일과 치즈 모빌, 흰 자갈 위에 겹겹이 쌓인 숯에 구운 옥수수 크래커, 1톤에 달하는 천일염 언덕, 램프에 매달린 버섯까지, 과연 먹어도 되는 걸까?
뻔한 건 예술이 아니죠. 예상치 못한 것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할 때야말로,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고 흡수할 수 있어요.” 프라다, 까르띠에, 드리스 반 노튼을 비롯한 패션 하우스가 주최하는 행사와 밀라노 가구 박람회 살로네 델 모빌레 등 대규모 이벤트에서 다감각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케이터링을 선보여온 ‘아나나스 아나나스(Ananas Ananas)’의 엘레나 페트로시안(Elena Petrossian)과 베로니카 곤살레스(Verónica González)의 작업은 괴상하면서도 어쩐지 지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스스로를 요리사가 아니라 아티스트라 정의하는 둘은 핑거 푸드를 중심으로 조형, 공간, 영상 등 다양한 범주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적인 작업을 수행한다.
‘식용 조각’이라 치부되는 메뉴는 때론 접시나 기구 없이 서빙되며, 앉아서 먹을 자리나 테이블조차 없다. 돌마(Dolma, 아제르바이잔식 쌈밥)는 자갈 더미 위에 제공되고, 굴과 전복은 거대한 얼음 블록 위에 놓인다. 구운 당근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반으로 잘린 바게트는 두꺼운 버터 소용돌이 속에 세워놓아 우키요에(일상생활과 풍경, 풍물 등을 그린 일본 풍속화) 속 파도처럼 보인다.
비주얼은 일단 합격, 그럼 맛은 어떨까? 두 사람이 음식을 전공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해 신선한 위트를 발휘한다. “어린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맛의 뿌리를 찾아내죠. 다분히 개인적인 경험을 재가공해 맛있는 음식뿐 아니라 시각 효과와 재미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먹을 것을 통해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 모두가 현재의 감각을 온전히 만끽하도록 돕는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오직 토르티야 조각과 치즈 부스러기, 소스의 흔적만 공간에 남아요. 가장 뿌듯한 순간입니다.” 며칠 뒤에 있을 행사 준비로 조각에 몰두하던 두 사람을 로스앤젤레스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디자이너로 일하다 직업을 바꿨다. 음식에는 원래 관심이 많았나?
Elena Petrossian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그래픽 디자인과 아트 디렉션을 전공했다. 패션 회사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한계를 느꼈다. 시야와 환경을 바꿔보고자 5년 전 멕시코시티로 이사했다. 익숙하고 안정적인 일을 포기하는 것은 두려웠지만 창의적인 모험에 더 마음이 이끌렸다. 아르메니아 배경을 지닌 나는 엄마와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부엌을 중심으로 벌어지던 어릴 적 생활환경이 내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여전히 부엌을 안정감을 주고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긴다.
Verónica González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 맞닿은 동네 티후아나에서 태어났고, 성인이 되어서는 멕시코시티에서 산업 디자이너로 일했다. 내게 예술과 음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음식이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과일이나 채소, 해산물 등 음식 재료가 어디에서 오는지, 자연이 어떻게 아름다운 생물을 만들어내는지, 곰곰이 떠올리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어릴 때부터 내게 음식이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기술이었다. 일상에서 음식이 문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체감하며 성장했기에 음식을 예술의 매개로 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의 호흡이 예사롭지 않다. 첫 만남은 어땠나?
Elena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낼 때, 친구가 멕시코시티에 사는 친구가 있다며 베로니카를 소개했다. 물리적 거리가 있던 탓에 우리는 멕시코시티로 이주한 후에야 만나게 됐지만 베로니카와 대화를 나누면서 음식에 대한 사랑과 예술적 비전, 삶의 목표 등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기뻤다. 매주 일요일을 ‘요리하는 날’로 정한 우리는 그때부터 친자매처럼 ‘쿵짝’이 잘 맞았고, 머지않아 함께 일하게 됐다. 음식이라는 큰 그림 아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 채 베로니카와 여러 아이디어를 함께 구현하는 과정이 정말 즐겁다.
마침내 아나나스 아나나스가 탄생하던 순간이 궁금하다.
Verónica 우리 둘 다 과거의 경험 속에서 답을 찾았다. 대규모 전시나 팝업 행사에 놓이는 설치물은 시각적으로는 멋지지만 먹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서 착안해 음식을 기반으로 예술적인 경험을 제공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 달 만에 일사천리로 무드보드와 로고, 웹사이트가 탄생했고, ‘일요일 저녁’이라는 테마로 30명 정도의 지인에게 티켓을 판매했다. 수익금은 식재료 구입과 제작비로 활용했다. 낚싯줄로 천장에 매단 다양한 과일과 채소, 치즈 등을 손과 입으로 느끼고 즐기도록 연출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게 아주 흥미로웠다. 어떤 사람은 냅킨을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전시장에 방문한 것처럼 그 광경을 지켜봤다. 각자 새로운 식사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즐거운 연구였다.
찾아보니 아나나스는 ‘파인애플’이라는 뜻이다. 어떤 의도로 이런 이름을 지었나?
Elena ‘아나나스(Ananas)’는 영어권, 아시아권을 제외한 많은 국가에서 똑같이 파인애플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우리가 ‘음식’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로 문화적·언어적 장벽을 넘어 활동하는 팀이기에 그런 비전을 전달할 수 있는 간단명료하고 매력적인 이름을 골랐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아티스트 듀오’라고 적혀 있다. 스스로를 푸드 스타일리스트 혹은 설치 예술가 중 어디에 더 가깝다고 여기나?
Elena 둘 다! 최근에는 조형 작업을 넘어 영상, 공간 디자인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관람객은 우리가 준비한 공간에서 음식을 통해 오감을 자극하는 경험을 누릴 수 있다.
연분홍색 캐비아, 바질로 덮인 진녹색 초콜릿, 돌멩이로 깨 먹는 옥수수 비트구이, 소금 산에 올린 양배추쌈, 2m 버섯 조명 기둥 등 무엇 하나 평범해 보이는 것이 없다. 메뉴와 디스플레이 방식에 대한 기발한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
Verónica 건축가, 화가, 조각가 등 온갖 영역에서 활약하는 예술가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 초기에는 네덜란드 음식 아티스트 마레이에 보헬장(Marije Vogelzang)의 작업물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의 작업 중 관람객의 눈을 가리고 몸을 포대기로 감싼 다음 구멍이 뚫린 마스크를 통해 음식을 맛보게 한 ‘입을 위한 스파 트리트먼트’ 작업이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훌륭한 영감은 나를 키워낸 여성들로, 특히 할머니의 요리법을 곧잘 떠올린다. 멕시코 북서부와 해안에서 공수한 농수산물을 재료로 즐겨 활용하는 이유다.
Elena 나 역시 피스타치오, 장미수, 사프란 같은 아르메니아에서 자주 쓰는 재료를 자주 연상한다. 이색적인 맛이 만나면 독특한 맛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재료를 정한 다음에는 메뉴를 구상하는데, 뻔한 말 같지만 대부분의 영감은 일상생활에서 비롯된다. 브랜드와 협업할 때는 특정한 테마에서 시작하지만, 창의적 자유가 주어지는 경우에는 건축물이나 자연의 질감, 최근 관람한 전시, 고민거리, 반려동물 등 소소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모두 영감으로 삼는다.
메뉴를 선정할 때 맛과 멋의 균형은 어떻게 맞추나? 창작 프로세스가 궁금하다.
Elena “전시 작품 중 일부인 줄 알았다” “보기에만 멋질 줄 알았다”는 관람객의 품평을 들을 때 짜릿하다. 중요한 건 음식이 단순한 장식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먹을 수 있고, 의미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식용 재료와 비식용 재료를 결합하게 된 사연이다. 순간적으로 이목을 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케이터링의 본질은 ‘인상적인 첫맛’임을 잊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는 맛의 조합이 꽤 괜찮다고 여겨도 실제로 만들어보면 상상과 다를 때가 많으니 주의도 필요하다. 늘 팀원들과 함께 도전하고 실험한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과일, 채소, 해산물 등 변질되거나 상하기 쉬운 재료를 즐겨 활용하는 듯하다. 작업실 주방에서 행사장으로 운반하기까지, 보존을 위해 특히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Elena 우리 역시 재료 컨디션이 최우선이다. 특히 설치 작업을 위해선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식재료가 쉽게 부서지거나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3D 프로그램을 활용해 모든 것을 측정하고, 제 위치에서 잘 기능하는지 확인한다. 모든 것이 렌더링 치수에 정확히 맞는 상태로 탄생한다. 대부분의 이벤트는 하루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식재료를 신선하게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도 전략적으로 고려한다. 신선도는 안전 관리 규정을 준수하는 팀원이 면밀하게 체크하고 있다.
그동안의 작업물을 모은 아카이빙 북을 드리스 반 노튼 갤러리에서 전시했고, 해머 미술관(Hammer Museum)에서 몬탈바 건축 그룹(Montalba Architects)과 협업 전시를 열기도 했다. 불과 3년 만에 예술과 패션을 넘나드는 클라이언트가 많이 생겼다고 들었는데 가장 도전적이었거나 인상적인 프로젝트는?
Verónica 지난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램버트 앤 필스 스튜디오(Lambert & Fils Studio), DWA와 함께 5일간 식전주를 활용한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상상한 것보다 큰 규모의 작업이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됐다. 팀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갈 뻔했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무엇보다 처음 참석한 대규모 디자인 박람회에서 우리만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어 기뻤다.
Elena 지난해에는 아나나스 아나나스 DNA에 충실한 테이블웨어 컬렉션을 출시했다. 커틀러리, 볼, 플레이트 등 총 7피스로 구성했는데 모두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 지역에서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가 우아한 디너 파티 자리에 제격이다.
평소 어떤 메뉴를 즐기나?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즐겨 찾는 식당도 궁금하다.
Elena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정말 좋아한다. 유년 시절 기억을 상기하는 메뉴이기도 하고, 특별한 유대감을 간직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요즘 카페와 와인 바를 겸하는 업장이 부상하고 있는데, 그중 실버레이크에 자리한 바 세코(Barr Seco)는 베로니카와 내가 정말 애정하는 곳이다. 빵과 레몬 버터가 아나나스 아나나스 식기에 담겨 나오기도 한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는 보통 롤로(Lolo)로 향한다. 킨칸(KinKan), 바루(Baroo), 아나잭 타이(Anajak Thai)의 오마카세도 정말 훌륭하고, 쫄깃한 베이글을 만드는 커리지 베이글(Courage Bagels)도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하루 만에 설치와 철거가 이뤄지는 작업을 반복한다. 아쉬움도,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다.
Verónica 음식을 활용하는 예술에서 음식물 쓰레기는 분명히 큰 도전 과제다. 우리가 소개하는 음식은 단순히 집게로 집어서 접시에 담아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손을 써서 식재료와 소스를 뒤섞도록 유도하거나, 접시 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게 구성한다. 식물 기반의 원료를 활용한 바이오 수지로 제작해 생분해 폐기가 가능한 와인 잔을 쓰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체감하게 하는 설치물을 통해 관람객에게 문제의식을 전한다. 그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조금이나마 변화와 개선의 여지를 만들 수 있는 틈을 노린다.
Elena 그런 모든 고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선보이는 건 순간이지만 관람객이 그 순간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고 여기면 더없이 성취감을 느낀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조용한 공간에 남은 부스러기와 잔재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VL)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사진
- PIA RIVEROLA
- 글
-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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