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캔맥주 하나 때문에 아무렇지 않았던 사람이 좋아지기도 하는 일
에누리 없는 겨울인데, <봄밤> 때문에 다시 <봄밤>을 펼쳤다. 앞선 <봄밤>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소개되는 강미자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고, 뒤에 것은 이 영화의 원작인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봄밤>이다(이 소설은 2013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처음 실렸고, 나는 2016년에 단편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로 접했다. 실로 오랜만이다). <봄밤>은 중증 알코올의존증인 영경과 극심한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인 수환의 지독하고, 애절하며, 절절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물론 이건 완전한 신파, 통속, 순애보, 그래서 그런 것이라면 말만 들어도 낯간지러워 손사래를 치며 완강히 저항할 법한데, 웬걸. 완전 반대다. <봄밤>은 밑도 끝도 없이 가슴을 울리고, 때리고, 먹먹해지고, 멍해지게 한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봄밤>이 있다. 영화와 소설 둘 다 김수영의 동명의 시를 품었다. 영화는 이 시를 좀 더 극적으로 가져와 시를 읊조리고 낭독하는 것으로 설명의 말을 대신한다. 음률이 되고 시가 되려 한다. 마음을 치는 강렬한 울림이 되려 한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오오 봄이여/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김수영의 시 ‘봄밤’ 일부
그러다 자연스레 권여선 작가의 신작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봄 이 지면을 통해서도 소개한 바 있는 <각각의 계절>(2023, 문학동네) 이후 또 어떤 작업을 이어오고 있을까. 근작은 <술꾼들의 모국어>(2024, 한겨레출판)다. 현재까지 작가의 유일한 산문집으로 알려진 <오늘 뭐 먹지?>(2018, 한겨레출판)의 개정판이다. ‘작가님, 누가 술꾼 아니랄까 봐.(웃음)’ 작가의 애독자라면 잘, 벌써, 이미 안다. 술꾼을 자처하는 나는 흥취를 이기지 못하고 냉큼 책을 손에 넣었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내고 인터뷰나 낭독회 등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 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충고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앞으로 당분간은 술이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소설을 쓰겠다고 술김에 다짐했다. 그래서 그다음 소설을 쓰면서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지인들은 벌써 내가 소설에서 못 푼 한을 산문에서 주야장천 풀어내겠구나 걱정들이 태산이지만 마음껏 걱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을 걱정하든 그 이상을 쓰는 게 내 목표다. 아, 다음 안주는 뭐 쓰지?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들어가는 말 ‘소설가의 미식법’ 중-
‘아니, 작가님, ‘들어가는 말’부터 벌써 맛있으면 어떡해요.(웃음)’ 아껴 읽고 싶은데 아껴 읽을 수가 없게 생겼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작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딱 알맞은 자신만의 제철 안주 일체를 하나씩 꼽아가며 그에 얽힌 일화, 그 안주를 알게 된 경위, 사연, 사람, 기억을 솔직 담백 유머로 ‘맛들어지게’ 버무려냈다. 어떤 안주는 직접 해 먹는 법까지 신나게 들려준다. 속칭 ‘요알못’인데 작가님 따라 안주나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호기가 생긴다. 그러니 이 책 맛이 보통이 아닌 게다.
읽고 있으면 절로 신이 난다. 겨울이니까, 겨울 맛에 해당하는 4부 ‘목에서 손이 나오는 겨울 첫맛’부터 읽기 시작해 봄, 여름, 가을로 들어서고 5부 ‘나의 별미 별식’에 이르니 입맛이 확, 싹, 막 돈다.
술맛을 기가 막히게 잘 아는 독자라면, ‘술꾼들의 모국어’에 흠뻑 빠질 게 확실한데 술맛을 모른다고 해 주저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냥 맛있는 것을 좋아해도 되고, 그저 소박하니 기쁜 일 하나 생각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딱이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170쪽)
술도 안주도 그런 것을 위함일 테니.
덧. 이 맛깔나는 에세이집 초판본에는 작가의 초단편소설 <자전거, 캔맥주 그리고 곰>이 곰살맞게 실려 있다. ‘고작 이깟 캔맥주 하나 때문에 좋았던 사람이 싫어지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았던 사람이 좋아지기도 하죠.’ 서점에서 책을 사서 나오다 말고 조갈이 나서 냉큼 이 소설부터 캔맨주 마시듯 시원하게 읽어버렸다. 고작, 이깟, 캔맥주가 벌인 요상한 일이라니. 그런 일이고, 그럴 일이다. 겨울, 바람이 차다. 술 한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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