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프리즈 런던 2024’에서 발견한 미술계의 변화

2024.11.28

‘프리즈 런던 2024’에서 발견한 미술계의 변화

‘프리즈 런던 2024’는 경기 침체의 우려에도 구력을 잃지 않았다. 현장에서 놀라웠던 점은 한국 작가들의 저력이다. 페어장에서 한국 작품에 주력하는 갤러리도 늘었을 뿐 아니라 런던 전역에서 양혜규, 이미래 등의 작가를 조망하는 전시가 이어졌다. 세계 미술계의 프런트 로가 바뀌고 있다.

경기 침체와 아트 바젤 파리라는 라이벌을 양어깨에 짊어진 채 개막된 프리즈 런던이지만 일정 수준의 판매고를 달성했다.

‘경기 침체에도 아트 페어는 성공할 수 있을까?’ 이는 거의 모든 아트 페어 주최 측과 갤러리의 고민일 것이다. 게다가 프리즈 런던은 2022년 시작한 아트 바젤 파리(지난해까지 정식 명칭은 ‘파리 플러스 파 아트 바젤’이었다)라는 강력한 라이벌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실제 프리즈 런던을 건너뛰고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한 갤러리스트와 컬렉터도 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10월 9일 VIP 프리뷰를 포함해 13일까지 열린 프리즈 런던은 지난 20년의 구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올해 프리즈 런던은 43개국 160여 개 갤러리가 참여했고, 9만여 명이 다녀갔다. 한눈에 들어온 가시적 변화는 페어장 구성이다. 스튜디오 비트윈(A Studio Between)이 디자인했는데, 신생 갤러리와 작가들을 선정해 보여주는 ‘포커스(Focus)’ 섹션이 전면에 나섰다. 보통 페어장 뒤쪽에서 컬렉터를 기다리던 부스인데, 이번엔 중앙 복도를 따라 배치되어 관람하기 용이했다.

프리즈 런던은 메인 섹션 외에도 ‘포커스’, 작가가 다른 작가를 지목해 솔로 부스를 선보이는 ‘아티스트-투-아티스트(Artist-to-Artist)’, 로스앤젤레스 해머 미술관 큐레이터인 파블로 호세 라미레스(Pablo José Ramírez)가 총괄해 디아스포라 도자기 작품으로 구성한 ‘스모크(Smoke)’, 세계적인 작가들의 한정판 작품만 내거는 ‘에디션즈(Editions)’ 섹션으로 구성했다.

페어장이 들어선 리젠츠 파크에는 드넓은 잔디 위로 조각품이 자리했다. 이 ‘프리즈 조각(Frieze Sculpture)’ 섹션에는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티에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 줄리아나 세르케이라 레이치(Juliana Cerqueira Leite), 나라 요시모토(Yoshitomo Nara) 등 작가 20명이 참여했다. 이들의 조각품은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한 관람객은 “공원에 쓰러진 나무가 작품인가 싶어 크레딧을 찾았다”며 농담을 했다.

가고시안이 선보인 캐롤 보브의 컬러풀한 강철 숲 같은 조각품은 첫날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

리젠츠 파크를 가로질러 20여 분 걸어가면 20세기 후반까지의 작품을 엄선해 선보이는 ‘프리즈 마스터스(Frieze Masters)’ 전시장이 나온다. 입구에 들어서자 가고시안의 널찍한 부스에 산업 디자이너 마크 뉴슨(Marc Newson)의 기념비적 의자 ‘Lockheed Lounge’(1986)와 ‘폐품 조각가’라 불리는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의 금속 조각품이 맞이했다. 사실 프리즈 런던 부스에서는 포커스에 자리를 내주느라 가고시안은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 선보인 캐롤 보브(Carol Bove)의 강철 숲 같은 색색의 조각품은 첫날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셀피를 찍은 장소일 거다.

아트 페어는 판매고가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날 하우저 앤 워스가 마스터스에서 아실 고키(Arshile Gorky)의 ‘The Opaque’(1947)를 850만 달러에 판매하며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 외 대부분은 수억 원대에 머물렀다. 타데우스 로팍은 마르타 융비르트(Martha Jungwirth)의 작품을 43만 유로에 팔았다. 타데우스 로팍의 큐레이터는 인도, 동남아시아, 중동, 남미 등 비유럽권에서 온 컬렉터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고 회상했지만,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북미 출신 컬렉터들이 큰손이었죠.”

페이스 갤러리의 로버트 롱고(Robert Longo)는 60만 달러, 마스터스에서 오스본 사무엘 갤러리는 헨리 무어(Henry Moore)의 청동 피규어를 140만 파운드, 바스티안 갤러리는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그림을 130만 유로에 판매했다. 리만 머핀은 현장에서 제작한 작품을 포함해 빌리 차일디시(Billy Childish)의 신작 14점을 5만~10만 달러에 매진시켰다. VIP 오픈 당일, 사람들이 갑자기 한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뮤지션이자 아티스트 빌리 차일디시가 푸른색 점프수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채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프리즈가 작품에 집중한 전시였다면, 페어장을 나오면서부터는 갤러리와 미술관이 이 기간에 맞춰 준비한 특별전을 통해 지금 가장 뜨거운 작가를 확인하고, 전문적인 큐레이션까지 더해 한층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번 프리즈 기간에 가장 좋았던 전시는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개인전이다.

뮤지션이자 아티스트 빌리 차일디시의 라이브 페인팅. 리만 머핀은 빌리 차일디시의 신작 14점이 매진됐다고 발표했다.
리젠츠 파크에 전시된 리비 히니(Libby Heaney)의 조각품 ‘Ent- (non-earthly delights)’(2024)는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1490~1510)에서 영감을 받았다.
갤러리현대는 이승택, 이강소, 이건용, 신성희, 김창열 등을 비롯해 다음 세대를 견인하는 김민정, 유근택, 도윤희 작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프리즈 마스터스의 페이스 갤러리 부스. 올해 프리즈 마스터스는 장 미셸 바스키아, 얀 브뤼헐, 폴 세잔, 프란시스코 데 고야, 데이비드 호크니, 에두아르 마네, 쿠사마 야요이, 박서보 등의 역사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청나라 시대 도자나 파라오의 무덤에서 볼 법한 역사 유물도 즐비했다.
작가가 다른 작가를 지목해 솔로 부스를 선보이는 아티스트-투-아티스트 섹션에서 잉카 쇼니바레(Yinka Shonibare)가 셀렉션한 넨기 오무크(Nengi Omuku)의 작품을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런던 버몬지에 자리한 화이트 큐브로 향했다. 화이트 큐브는 스타 갤러리스트 제이 조플링(Jay Jopling)이 설립해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갤러리다. 지난해 9월 서울 신사동에도 문을 열었고, 런던에는 버몬지와 메이슨 야드에 자리한다. 버몬지 근처에서 진 양조장을 운영하는 지인은 “몇 년 전만 해도 ‘밤길을 조심’해야 했던 버몬지가 이제 화이트 큐브 덕에 ‘힙’한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이트 큐브는 수장고 개념으로 쓰던 이곳을 갤러리로 확장했다.

트레이시 에민의 개인전 <I Followed You to the End>에선 회화 40점과 조각 2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전시명과 같은 제목의 ‘I Followed You to the End’(2024)는 거대한 여성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압도적인 크기의 조각품으로 전시장 한가운데 자리한다. 그녀의 페인팅은 늘 그렇듯 사랑, 삶, 죽음을 탐구하며 과감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심연을 건드린다. 자전적인 회화 작품에선 잉글랜드 켄트주 마게이트에 위치한 자택의 방이 자주 등장하는데,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자취방과 그곳에서 겪은 사랑과 회한, 변해가는 몸이 절로 떠오른다. 특히 최근 암 투병 중 소변 줄을 찬 모습을 담은 영상 작품은 지독하리만큼 생생했다.

회화 속 인물의 얼굴이 거의 뭉개져 있는 이유를 묻자 화이트 큐브의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알렉스 오닐(Alex O’Neill)은 트레이시 에민의 폭발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민의 커리어는 페인팅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나의 회화 작품을 완성하는 데 수년이 걸리죠. 그린 뒤에도 다시 하얗게 덮어버리고 또다시 시작하거든요. 그때마다 작품에 감정을 표현한다기보단 토해낸다는 편이 맞을 거예요. 종종 울부짖을 정도죠.” 전시 관람을 마치고 화이트 큐브 수장고를 방문했다. 천장까지 수십 점의 작품을 아이 다루듯 보관하고 있으며, 데미안 허스트가 포름알데히드로 작업하던 공간도 있다. 운 좋게도 그곳에서 2023년 박서보 작가가 별세하기 직전 ‘신문 묘법(Newspaper Ecriture)’으로 완성한 회화를 볼 수 있었다. 신문 묘법은 1970년대 박서보 작가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 연필 묘법으로 그리다가 닦을 것이 필요해 신문지를 사용한 데서 시작됐다. 캔버스를 한지로 싼 다음, 신문지를 풀로 붙여 그 위에 오일을 뿌리고 연필로 작업한다. 암 진단을 받고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작품에 매진할 때 여러 묘법을 시도하다 수십 년 전 신문 묘법을 떠올려 완성한 유작이다. 이 작품들은 화이트 큐브 뉴욕에서 2025년 1월 11일까지 전시된다.

무엇보다 프리즈 런던 기간에는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테이트 모던의 층고 35m에 이르는 터빈 홀에는 파이프와 연결된 7m 길이의 터빈이 크레인에 매달려 거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천장에 달린 쇠사슬 54개에 곳곳이 찢기고 구멍 난 공사판 가림막 조각이 늘어져 기괴한 이미래의 설치 작품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현대자동차와 테이트 모던이 함께한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Hyundai Commission: Mire Lee: Open Wound)>다. 오프닝 날, 터빈 홀은 방문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시는 3월 16일까지 이어진다. 정희민 작가는 타데우스 로팍 런던에서, 유귀미 작가는 알민 레쉬 갤러리 런던에서, 설치미술가 정금형은 런던 현대미술관(ICA)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 35m 높이까지 이미래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이 개인전 오프닝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런던 지점에서 열린 정희민의 개인전 .
리젠츠 파크에 전시된 파니 파랄리(Fani Parali)의 ‘Aonyx and Drepan’(2020). 작가가 조각 작품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퍼포먼스를 시도하고 있다.

그중 가장 화제가 된 전시는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양혜규: 윤년(Haegue Yang: Leap Year)>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양혜규의 작품을 망라한다. 2018년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개최된 <양혜규: 도착 예정 시간(ETA) 1994–2018> 이후 열리는 최대 규모 전시다. 18년 만에 ‘사동 30번지(Sadong 30)’(2006)를 재해석해 전시했는데, 그 시절 양혜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작가는 없다고 단언했다. “앞만 보고 가는 스타일이거든요. 오히려 주변 지인들이 이 작업을 보면서 감정이 올라왔죠. 저는 오히려 전시 오픈이 다가올수록 차가워집니다.”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커미션 작품 ‘농담濃淡진 소리 나는 물방울–수성 장막(Sonic Droplets in Gradation–Water Veil)'(2024)은 현재도 이어오고 있는 ‘소리 나는 조각’(2013~) 연작의 일환으로, 청색과 은색 스테인리스 스틸 방울을 금속 링으로 엮은 커튼 형태의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작가가 헤이워드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 융 마(Yung Ma) 등 관계자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는 것. “작품을 만드는 것과 전시를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일부러 손을 떼려고 노력했어요. 저는 인털로쿠터(interlocutor, 대담자)가 되었죠. 큐레이터가 작품에 대해 물으면 저는 답변만 하고, 그들이 작품 셀렉션부터 디스플레이, 전시 구성을 결정했어요. 이것이 저의 ‘성숙도’예요. 여기서 성숙도라 함은 전시의 소유권을 나눠 갖고, 오히려 큐레이터에게 더 많이 준 것을 말해요. 이번 전시가 만족스럽냐고 묻는다면 ‘그렇다’이고, 여기서 만족감은 소유권을 양도하는 결정 덕분에 느끼는 거죠.” 그렇다면 끝까지 넘길 수 없는 소유권은? 작가가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건 없어요. 조금 있으면 죽을 건데요, 뭐.”

AI 시대에 오히려 원시적이고 무속적인 형태를 짚풀 꼬기처럼 노동 집약적인 방법으로 보여주는 이유가 궁금했다. 작가는 디지털 데이터를 프린트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린 여전히 엔트로피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AI를 공부하고 있지만 기계에 의한 완전 자동화는 불가능하더군요. 전시를 위해 3D 프린팅을 할 때도 오류가 나면 리부팅하고, 작업물의 실밥을 떼는 등 여전히 인간의 노동이 필요했어요. 우리가 ‘고급 예술’이라고 부르는 영역은 거대 자본과 폭발적인 이노베이션(Innovation)이 아니라 작은 유니티(Unity)가 할 수 있는 극한을 보여주는 분야예요.”

갤러리가 문을 닫은 오후 7시, 나는 런던 대학의 바르부르크 연구소로 향했다.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에서 만난 김홍희 미술사학자의 컨퍼런스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지낸 그녀는 1980년대 이후 한국 미술가 44명의 작품 세계를 해석한 책 <페미니즘 미술 읽기: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를 출간했는데, 그 영문판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오후 7시가 되기 전 좌석 50여 석은 국내외 관람객으로 꽉 찼고, 늦게 온 이들은 뒤에 서서 들어야 했다. 김홍희 미술사학자는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인사를 시작으로, 윤석남부터 김아영까지 한국 미술사를 이끌어온 여성들을 이야기했다. 말미에는 나혜석 작가의 ‘Nude’(1928)와 ‘Self-Portrait’(1928)를 화면에 띄운 채 좌담이 이어졌다. 우테 메타 바우어(Ute Meta Bauer) 사우디아라비아 현대미술 비엔날레 예술감독, 이연숙 평론가, 미술가 신미경과 김아영이 참석했다. 객석을 돌아보니 모자를 쓴 이미래 작가도 보였다. 프리즈 런던 2024를 통해 아트 페어의 현재를 알아보기 위해 떠난 런던행은 한국 작가들이 세계 미술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VK)

버몬지에 자리한 화이트 큐브에서 열린 트레이시 에민의 개인전. 중앙의 대형 조각품은 ‘I Followed You to the End’(2024).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양혜규의 작품을 망라한 전시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렸다.
피처 디렉터
김나랑
사진
Courtesy of Frieze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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