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대공’이 현대 서울에 나타난다면?
<지금 거신 전화는>(MBC)은 매우 경제적으로 재구축된 로맨스 판타지다. 당신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논리와 디테일의 허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뭐? 왜? 어때서?’라는 당당함 혹은 뻔뻔함이 이 드라마에는 있다. 그래서 부실한 완성도를 문제 삼을 의지가 생기지 않다. 완성도를 포기하고 나면 은근한 쾌락이 찾아온다.
이 작품의 배경은 현대 서울이다. 하지만 주인공 설정은 냉혹하고 화려한 ‘로판 대공’과 그에게 볼모로 잡힌 수수한 몰락 귀족 가문 양녀에 가깝다. 공화국의 법도 자주 무시된다.
오프닝에서 남주는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온다. 제작진은 백인 엑스트라를 투입해서 중요한 외교 모임 분위기를 내려 애썼다. 장내 모든 이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잘생긴 남주에게 탄복한다. 그런데 럭셔리해야 할 볼룸은 사진 촬영만을 위해 존재하는 웨딩 홀처럼 인위적이고 엑스트라도 듬성듬성이다. ‘이런 누추한 곳에 이런 귀한 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 미장센이다.
잠시 후 소재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비즈 달린 하이힐과 이브닝 파티에서 들기엔 다소 커 보이는 숄더백이 클로즈업되면서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귀한 신분을 흉내는 내지만 재력이 달리는 여주인공의 상태를 암시하나 싶은데, 이후 전개를 보면 제작진은 그냥 그 하이힐과 숄더백이 예쁘다고 여겨서 클로즈업했던 것 같다. 하여간 여주인공은 서울 대공, 아니 남자 주인공의 팔짱을 끼고, 남주는 “오늘 밤 우리 관계에 대해 어떤 오해도, 호기심도, 소문도 생기면 안 된다”고 근엄한 목소리로 입단속을 한다. 웹소설 표지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유연석과 채수빈의 비주얼이 이 장면의 유일한 설득력이다.
남주 백사언(유연석)은 방송 앵커 출신 최연소 대통령실 대변인이다. 대한민국 정치권 최고 스타고, 모든 여자들이 선망하는 남자다. 1회에서 그는 ‘아르간(아프간이 아니다)’에서 한국인이 납치된 사건을 수습하느라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지금 이 시간부로 정부 통제하에 한시적 언론 통제가 들어갑니다”라는 대사에서 말문이 막힌다. ‘엠바고’라는 무난한 용어를 놔두고 왜? 한국 정부라면 마음에 안 드는 언론사를 배제하고 소송을 걸지언정 ‘언론 통제’는 인정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 저 위험한 발언 앞에서도 기자들은 술렁거리기만 할 뿐 저항하지 않는다. 한국 언론 현실에 대한 고도의 풍자라면 좋겠지만 이 작가는 그냥 이게 남주의 카리스마를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백사언의 아내 홍희주(채수빈)는 수어 통역사다. 희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함묵증’에 걸린 척 입을 닫고 산다. 백사언은 원래 희주의 언니와 정략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언니가 결혼식 전날 도망을 가버렸다. 욕심 많은 희주의 어머니는 동생인 희주를 대타로 내보냈다. 일가친척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데, 어째서인지 그 비밀은 가족 몇 명만 안다는 설정이다.
백사언이 아르간 납치 사건 때문에 바쁜 사이 희주는 괴한에게 납치를 당한다. 괴한은 VPN과 음성변조 기술을 사용해 백사언에게 몸값을 요구한다. 세상 똑똑하고 협상 기술도 배웠다는 사언은 왜인지 괴한이 남성일 거라 확신한다. 괴한은 또 왜인지 피랍자인 희주에게 운전을 시킨다. 괴한과 백사언의 통화를 듣고 열받은 희주가 거칠게 과속방지턱을 넘고, 고작 그걸로 차가 저렇게 되나 싶지만 어찌저찌 사고가 나서 희주는 탈출 기회를 얻는다.
그 사이 백사언은 이유 없이 서울 시내를 난폭 운전하면서 성질을 내는데, ‘청와대 대변인이 칼치기를 하다가 경찰 단속에 걸렸습니다’라는 뉴스 따위는 겁내지 않는 것 같다. 장래 대통령감으로 촉망받는 엘리트 청년의 비행을 드러냄으로써 사회를 풍자하려는 의도면 좋겠지만, 역시 희주가 백사언을 동요하는 트리거임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다. 하여간 백사언은 무사히 집에 돌아온 희주를 보고도 왠지 자세한 내막을 묻지 않는다.
희주는 이 의문 가득한 상황을 이용하기로 작정한다. 역시 왠지 모르겠지만 희주의 손에 들어간 괴한의 휴대폰을 이용해 백사언을 협박해 정략결혼을 파기하려는 것이다. 이후에도 의문스러운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이쯤 되면 논리는 포기다.
대놓고 판타지, 막장, 병맛 혹은 키치가 아니라서 초반에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적응하고 나면 부실한 디테일은 오히려 시청자의 긴장을 낮춰주는 이완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상식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걸 일찌감치 인정하고 작품의 룰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이 가능한 건 충분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메인 스토리라인 덕분이다.
2회에서 우리는 서울 대공, 아니 백사언의 속내를 조금 알게 된다. 희주의 관점에서 그는 늘 쌀쌀맞고, 자신과의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다. 그런데 사실 사언은 정략결혼 전부터 희주에게 관심이 있었다. 희주의 언니가 정략결혼을 거부하자 사언은 직접 신부 교체를 요구했다. 희주가 재계 딸들 사이에서 기피 대상 1호인 망나니 재벌 2세에게 시집갈 처지라는 걸 알고 구원자로 나선 것이다. 1회에서 희주를 죽이겠다는 범인과의 협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시체를 가져와라” 했지만 희주가 진짜 납치를 당했었고 그로 인해 몸에 상처가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기도 했다.
주인공이 차갑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한 타입임이 밝혀지면서, 작품의 러브 스토리는 본격 궤도에 오른다. 앞으로 남주가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 사랑을 암시하는 순간마다, 그가 영문 모르는 여주인공을 보호하는 장면마다, 시청자는 짜릿한 흥분에 빠질 것이다. 2회 말미에 남주의 사무실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지면서 협박범 흉내를 내던 여주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지만 그게 지금 대수인가. 스릴러는 곁가지일 뿐, 중요한 건 그들이 사랑을 확인하는 여정이다.
<지금 거신 전화는>은 로맨스의 자극을 위해 다른 모든 걸 포기한 드라마고, 그래서 경제적이고, 그래서 영리하다. 성인 여성의 길티 플레저라 불릴 만하다. 장르에 정확히 들어맞는 유연석과 채수빈의 연기, 그들 사이 케미스트리가 지대한 역할을 한다.
<지금 거신 전화는>은 총 12부작으로, 2024년 11월 22일부터 금·토요일 오후 9:50분 MBC에서 방송되고 있다. 넷플릭스, 웨이브, 시리즈온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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