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움직임 그 사이 비디오, 빌 비올라 개인전 ‘Moving Stillness’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점철된 다사다난한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빌 비올라(Bill Viola)의 개인전 <Moving Stillness>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빌 비올라는 1970년대 초부터 비디오를 본격적인 미술 매체로 다루면서 현대미술의 일부로 온전히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명실상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지요. 국제갤러리에서 내년 1월 26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지난 7월 작가의 작고 후 한국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인데요. 생전에 빌 비올라는 “기술은 나에게 영적인 힘”이라고 강조하며, 내면의 삶이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영상 작업을 선보였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유명작 또는 대표작이라기보다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작업 세계의 근간이 되는 초·중기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평생 ‘영상의 구도자’로 살았던 그가 초창기에 이 비디오로 과연 어떤 다양한 실험을 했는지, 특유의 영적인 영상이 어떻게 발아하게 되었는지 등을 목격할 수 있는 자리인 셈이죠. 일곱 점의 영상 중 네 작품은 한국에서 공개된 적 없는 작업이라니, 더욱 기대가 됩니다.
로비에는 작가가 시러큐스 대학교를 졸업한 해인 1973년에 만든 초기작 ‘Information’이 환영의 신호를 보냅니다. 당시 기술적 오류에서 착안, 아예 비정상적인 전자신호를 ‘연주’하듯 만들어낸 작업으로, 작가는 “전자 매체의 (속성뿐 아니라) 물리적 존재에 대한 탐구”라 설명했죠. 매우 새로운 형태의 추상적 표현이라는 평가도 얻었는데, 과연 옛날 TV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미지는 지금 봐도 신선합니다. 이어 K1 바깥방에 놓인 두 점의 브라운관 작업은 이런 초기 실험이 어떻게 차근차근 발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네 편의 영상으로 구성된 ‘For Songs'(1976)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다채로운 실험으로, 저는 ‘비디오로 그린 초현실주의적 우화’라 명명하고 싶군요. 시간을 일종의 물질적 재료로 활용한 ‘Ancient of Days'(1979~1981)는 엔지니어들과의 협업으로 도출한 새로운 기술을 통해 시간의 주관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작업입니다.
한편 3개의 LCD 패널이 삼면화를 연상시키는 ‘Poem B (The Guest House)'(2006)는 이번 전시의 ‘최신작’입니다. 빌 비올라의 인장이나 다름없는 슬로모션이 영상과 회화의 중간 상태를 우아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이 영상은 어느 여성의 비밀스러운 기억의 파편, 슬픔이라는 감정의 구조를 생생하게 들여다봄으로써 고통과 초월, 공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카메라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에 있다. 그렇기에 비디오카메라야말로 인생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작가의 철학을 증명하는 작품이죠. 이토록 강렬한 숭고함이 느껴지는 건, 그의 말대로 우리 인생이야말로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게다가 앞에서 언급한 두 점의 브라운관 작업과 같은 전시장에 놓인 풍경은 빌 비올라 특유의 미학이 무수한 실험을 통해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빌 비올라는 지난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의 대표 작가이기도 합니다. 당시 ‘Buried Secrets’라는 제목으로 선보인 다섯 점의 영상 중 하나인 ‘Interval’을 이번에 비로소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영상을 본다’가 아니라 ‘영상을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합니다. 한쪽에서는 조심스럽게 제 몸을 닦고 있는 남자가 등장하고, 맞은편에는 식별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다양한 이미지가 펼쳐집니다. 상반된 에너지, 평화롭거나 혼란한, 신체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이미지가 번갈아 전환되며 이 공간에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데요, 갈수록 그 전환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초당 최대 30개씩 쏟아지는 이미지가 만들어낸 강한 섬광 안에서 이성과 감각이 일체화되는 순간을 맛볼 수 있습니다. 빌 비올라의 작업은 ‘감각과 의식을 확장한다’는 평가를 늘 받았는데요, 그 의미를 바로 이렇게 나의 신체를 통해서 직관적으로 경험합니다.
한편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제작된 중요한 초기작 ‘The Reflecting Pool’도 놓칠 수 없습니다. 물웅덩이를 향해 도약한 남자의 정지된 포즈가 인상적인 이 작업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거나 멈추게 하거나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하나의 이미지로 합치는 등 시간이라는 재료를 물리적으로, 자유자재로 탐구하는 작가의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물이 외부 세계와 내적 세계의 경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영적인 재탄생을 은유한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 작업 이후 작가의 다양한 작업에서 물이 정화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자 탄생, 부활, 죽음을 의미하는 요소로 자주 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연못에 빠져 익사할 뻔한 어린 시절 경험을 자주 언급하며, 그때 목격한 물속 세상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크나큰 영감을 받았다고 얘기하곤 했지요. 특히 물에 뛰어드는 이 남자의 행위를 두고, 작가는 “한 사람이 자연의 세계로 (승화되어) 다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런 점에서 일종의 세례”를 의미한다고 작업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업은 바로 K3에서 만나는 ‘Moving Stillness: Mount Rainier 1979’입니다. 전시장에 아예 물이라는 실질적 요소를 영상과 함께 도입한 일종의 혼합 설치 작품인데요. 제목의 레이니어산은 워싱턴주에 있는 산봉우리이자 휴화산으로, 산의 존재 자체가 고요한 아름다움과 극적인 역동성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물웅덩이 위에 떠 있는 큰 스크린에는 산을 찍은 영상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상을 스크린이 아니라 물 표면에 바로 투사했다는 게 굉장히 특징적입니다. 즉 영상이, 이미지가 수면에서 반사되어 스크린에 가닿는 형식이죠. 그리하여 파동에 따라 수면에 스크린의 산 형태도 함께 일렁이고, 산의 단단한 이미지나 개념도 같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작가는 평생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인다는 믿음으로 작업해왔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산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The mountain never moves, only your mind does)”라는 메시지를 담아, 세상의 불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자체를 사색하도록 만듭니다.
문제의 산 이미지는 약한 파동에는 살짝 흔들리지만, 강한 파동에는 아예 그 형태를 잃고 급기야 추상 이미지로 변합니다. 요동치며 흔들리던 산이 제자리를, 제 모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짧지만 결코 짧지만은 않습니다. 빌 비올라의 영상 작업을 만난다는 건 곧 세상의 흐름과는 다른 속도의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50여 년 전, 아무도 비디오라는 기계가 예술적 매체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던 그때 그 시절을 지나, 우리는 이제 아무도 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술은 시대의 발전과 발맞추지만, 인간의 사색과 사유는 기술과 시대를 모두 초월합니다. 시적인 영상을 통해 이 진실을 일깨워준 작가는 우리 곁에 없지만, 작품은 남았습니다. 작금의 시대에 만나는 그의 작업은 시대착오적이기에 더욱 혁신적으로 다가옵니다. 빌 비올라가 현대미술사에 남긴 유의미한 시도를 숙고하며 그의 작업 세계와 반갑게 조우하고, 그렇게 작가를 추억합니다. ‘움직이는 고요(Moving Stillness)’가 선사하는 선물 같은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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