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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엘라를 떠나는 존 갈리아노,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2024.12.12

마르지엘라를 떠나는 존 갈리아노,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오늘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늘 속죄할 것이며,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특히 제가 창의적인 목소리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렌초 로소(Renzo Rosso)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존 갈리아노가 메종 마르지엘라에 안녕을 고하며 남긴 말입니다. 마르지엘라가 속한 OTB 그룹의 CEO, 렌초 로소 역시 “존 갈리아노와 함께한 10년은 제 삶 중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말했죠. 갈리아노는 자신의 미래에 관한 루머가 여기저기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때가 되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며 정확한 거취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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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몸담았던 하우스를 떠나는 ‘천재 디자이너’가 그릴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며, 그의 삶과 커리어를 되돌아봅시다.

후안 카를로스 안토니오 갈리아노 기옌

1960년 11월 28일, 지브롤터반도에서 후안 카를로스 안토니오 갈리아노 기옌(Juan Carlos Antonio Galliano Guillén)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태어납니다. 훗날 우리가 ‘존 갈리아노’라고 부르게 되는 디자이너의 탄생이었죠. 그의 아버지는 영국 출신 배관공이었고, 어머니는 안달루시아 출신의 플라멩코 강사였습니다. 갈리아노의 가족은 1966년 런던으로 이사를 갔고,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이스트 런던 대학교에서 섬유 디자인을 전공하죠. 1980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입학한 뒤 존 갈리아노는 18세기 말 프랑스 제복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졸업 컬렉션 ‘Les Incroyables’은 프랑스혁명에서 영감받아 완성됐죠. 영국의 부티크, 브라운스(Browns)가 해당 컬렉션을 통째로 구매한 일화 역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존 갈리아노의 1985 F/W 컬렉션. Getty Images

졸업 후 갈리아노는 런던의 이스트 엔드에 자그마한 창고를 대여합니다. 그는 곧 이 창고를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의 ‘헤드쿼터’로 탈바꿈시켰고요. 패션계는 갈리아노를 ‘영국 패션계의 신동’이라고 불렀습니다. 1987년에는 영국패션협회 선정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수상합니다. 1994년, 1995년, 1997년에도 상은 존 갈리아노의 몫이었습니다.

John Galliano 1994 F/W RTW. Kim Weston Arnold
John Galliano 1994 F/W RTW. Kim Weston Arnold

평론가들의 찬사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존 갈리아노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89년에는 파리 패션 위크 중 쇼를 선보이며 새로운 시도에 나서기도 했죠.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 존 갈리아노는 파산했고, 런던을 떠나 파리에 정착합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와 전설적인 에디터, 안드레 레옹 탈리(André Leon Talley)였습니다. 갈리아노가 쇼를 열 수 있도록, 사교계 명사 상 슐룸버거(São Schlumberger)에게 그녀 소유의 18세기 저택을 무상으로 대여해달라고 요청하죠. 슐룸버거는 이를 수락했고, 갈리아노는 1994 F/W 시즌 중 그녀의 저택에서 자그마한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케이트 모스, 크리스티 털링턴, 나오미 캠벨 등 당대의 슈퍼모델들이 오직 갈리아노를 위해 무상으로 런웨이에 올랐고요. 1990년,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하루에 1만 달러도 벌지 못할 거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 걸 떠올려보세요. 당시 슈퍼모델들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존 갈리아노가 모두로부터 얼마나 사랑받고 기대받던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방시,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다

디올 2010 봄 꾸뛰르 쇼 피날레 중. Getty Images
디올 2006 가을 꾸뛰르 컬렉션 중. Getty Images
디올 2002 가을 꾸뛰르 컬렉션 피날레. Getty Images
Dior 2004 Spring Couture. Kim Weston Arnold

1995년 7월, 존 갈리아노에게 ‘구세주’가 나타납니다. LVMH 그룹의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였죠. 그는 존 갈리아노를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합니다. 영국 출신 디자이너가 프랑스의 럭셔리 하우스를 맡은 최초의 사례였죠. 갈리아노는 지방시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1996년 10월 메가 하우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됩니다. 그는 특유의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컬렉션을 선보이며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 재학 시절부터 ‘과거의 의복’에 빠져 있던 그답게 일본의 게이샤, 네페르티티(Nefertiti),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했죠. 쇼 컨셉에 맞는 의상을 입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은 당시 존 갈리아노만의 시그니처였고요.

200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다

존 갈리아노 일생에서 가장 격정적인 시기를 꼽으라면,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일 겁니다. 2009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수여했죠.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 나머지 알코올에 중독된 것이죠. 2011년은 존 갈리아노에게 ‘몰락의 해’였습니다. 마레 지구 한복판에 위치한 카페에서, 갈리아노는 술에 잔뜩 취해 옆자리 커플에게 반유대적 발언을 쏟아냅니다. 술에 잔뜩 취한 갈리아노가 “나는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영상은 전 세계로 퍼졌고, 2011년 2월 경찰에 체포됩니다. 디올이 존 갈리아노를 해고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요. 이후 존 갈리아노는 정신적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며 자취를 감춥니다. 2011년 케이트 모스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고, 2년 뒤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컬렉션 디자인에 잠시 참여했을 뿐이죠.

마르지엘라, 그리고 재기

Margiela 2015 F/W RTW. InDigital Media
마르지엘라 2024 봄 꾸뛰르 컬렉션 중. Getty Images

2014년, OTB 그룹의 CEO 렌초 로소는 존 갈리아노를 메종 마르지엘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했습니다. 풍파를 겪은 존 갈리아노는 디올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죠. 더 이상 화려한 의상을 입고 피날레를 장식하지도 않았고, 미디어와의 인터뷰 역시 꺼렸습니다. 그럼에도 갈리아노의 디자인은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마르지엘라의 2024 봄 꾸뛰르 컬렉션은 ‘패션사에 길이 남을 쇼’라는 찬사를 받았죠.

오늘 새벽, 마르지엘라와의 이별을 알린 존 갈리아노는 인스타그램에 장문의 성명을 남겼습니다. 그는 2014년 렌초 로소로부터 디렉터 부임 제안을 받은 뒤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르탱 마르지엘라로부터 “하우스의 DNA를 원하는 만큼 활용하세요. 자신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DNA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세요. 당신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겁니다”라는 조언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패션계로 복귀할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회고했죠. 10년이 넘도록 마르지엘라를 성공적으로 이끈 존 갈리아노는, 이제 다시 한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또 어떤 브랜드가 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맞이하게 될까요?

사진
Getty Images, InDigtal Media, Kim Weston Arnold
출처
www.vogu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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