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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서는 신예은의 20대였다

2024.12.24

허영서는 신예은의 20대였다

미지의 세계를 활보하는 기개. 신예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바야흐로 〈정년이〉 너머를 향한다.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 피천득 ‘새해’

새해처럼 새롭고, 봄비로 꽃을 피울 배우 신예은

 

요즘 식욕을 잃었다고요. 먹는 즐거움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오히려 즐기고 있는걸요. 지금은 살이 많이 빠진 상태지만 얼마 전까지 살이 너무 쪄서 걱정이었거든요. ‘이때가 기회다’ 싶어 식욕이 감퇴한 시기를 최대한 활용해보려고요.

올해 다시 학교(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 4학년)로 돌아갔죠. 학교생활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커 보여요.

청춘이라는 치열하고 순수한 시기에 애정이 커요. 친구들과 학식 먹고, 수업 끝나고 피곤해서 “다음 수업 가기 싫다” 툴툴대는 그런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으면 ‘10년 뒤에는 지금을 그리워하겠지’라는 애틋함이 커져요. 당시에만 당당하게 입을 수 있는 ‘과잠’, 봄이 오면 동아리 홍보 열기로 뜨거워지는 운동장··· 최근에는 눈이 엄청 많이 내린 날, 삼삼오오 모여 눈사람을 만드느라 열심인 후배들을 보는데 그 장면이 진짜 예쁘더라고요. 한참 동안 지켜봤어요. 같이 만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웃음)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이 교차하는 시점입니다. 12월과 1월 중에서는 어떤 달에 마음이 기우나요?

1월요! 12월은 뭔가 마무리하는 느낌이잖아요. 마무리, 끝, 저는 그런 게 싫거든요.

2024년에는 무엇에 특히 감사했나요? 아마도 <정년이>로 큰 사랑을 받은 것?

그게 가장 감사하죠. 또 하루하루 크게 요동치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간 것, 주변 사람들 아프지 않고, 2025년에 열다섯 살이 되는 우리 집 강아지가 건강한 것도 감사해요.

넥 스트랩 맥시 드레스는 가브리엘 리(Gabriel Lee), 녹색 가락지와 버선은 차이 김영진(Tchai Kimyoungjin), 비단신은 윤의한복(Yunui Hanbok), 붉은 매화를 수놓은 댕기는 서담화(Seodamhwa), 창덕궁 건축 연도가 새겨진 전통 문양 금색 귀고리와 이어커프는 아틀리에 다린(Atelier Darin).

<정년이>는 많은 걸 해내야 했던 작품이죠. 그만큼 ‘해냈다’는 뿌듯함이 정말 클 것 같아요.

촬영 끝난 날은 확실히 해방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방송이 끝나는 날엔 모든 게 과거로 묻히고, 다 잊힐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하지만 다 떨쳐냈죠. 지금은 막바지 촬영 중인 드라마 <탁류>를 잘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고를 수 있어도 ‘허영서’를 택할 거라 단언할 만큼 역할에 애정이 깊었죠.

연기에 대한 고민도 컸지만, 무엇보다 실제 저와 너무 비슷한 인물이라 마음이 갔어요. 영서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정년이처럼 자유롭게 연기해보고 싶었고, 주변에서 “너 정말 영서 같다”고 하면 그게 과연 칭찬인지, 내가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지 헷갈렸죠. 허영서라는 역할이 참 좋으면서도 영서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들었던 많은 생각이 새로운 고민거리가 됐어요.

라이벌 의식과 무대 강박, 애정 결핍 등 허영서를 괴롭힌 감정 중 특히 공감이 간 것은?

사실 영서는 극 중에서 누구보다 많이 흔들리는 인물이에요. 끊임없이 주변에 휩쓸리는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유일한 친구죠. 그 꺾이지 않는 마음에서 동질감을 크게 느꼈어요. 많은 사람이 제 필모그래피 중에서 <더 글로리>의 박연진과 허영서를 악역이라는 동일 선상에서 자주 비교하는데, 사실 영서가 연진이보다 더 무섭고 센 사람이에요. 단단하고 강인하죠.

싱글 브레스트 테일러 재킷은 와이씨에이치(YCH), 오버핏 셔츠와 타이는 잉크(Eenk), 팬츠는 코스(COS), 글레이즈 스퀘어 로퍼는 자크뮈스(Jacquemus), 비취 나비, 산호 매미 뒤꽂이는 윤의한복(Yunui Hanbok), 비녀는 차이 김영진(Tchai Kimyoungjin), 색동 방석은 스튜디오 아록(Studio Aaroc).

영서가 엄마에게 진심을 터놓는 장면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장면이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고요. ‘우리 영서 자랑스럽다’ ‘우리 딸이 최고다’ 그 한마디를 듣겠다고”라고 말하는 대목 말이에요. 같은 배우 입장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어 연기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나요?

저는 오직 제 만족 때문에 연기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데뷔하고 대중에게 평가를 받게 되고, 타인의 인정으로 상을 받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내가 좋다고 연기하는 시기는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강해졌죠. 다음에 더 성장하겠다는 말도 조심스럽더라고요. 성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요즘은 제 연기로 희열을 느끼고, 행복해하죠. 뿌듯해하기까지 하는 팬들의 감정 하나하나가 다 크고 소중하게 다가와요. 그런 것들을 좀 더 드리고 싶다는 책임감을 떠올리면 영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아요.

지금은 충분히 즐기며 연기하나요?

음, 즐기는 순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순간도 있어요. 하지만 아흔아홉 번 즐기지 못했더라도 한 번 즐기는 게 좋아서 지금까지 연기를 해왔어요.

<정년이>를 촬영하며 그 ‘한 번’을 경험했나요?

모르겠어요. 촬영 기간 동안 퇴근길에 딴생각이 안 들고 잠을 푹 잤어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플라운스 맥시 드레스는 자크뮈스(Jacquemus), 비취 나비, 구름문, 산호 매미 뒤꽂이는 윤의한복(Yunui Hanbok), 비녀는 차이 김영진(Tchai Kimyoungjin).

음악, 미술, 분장과 의상 등 많은 면에서 매력을 인정받은 작품입니다. <정년이> 관련 유튜브 콘텐츠에는 아직도 뭔가를 더 보여달라는 팬들의 성원이 뜨거워요.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신선함과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저도 방송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와닿는 것이 많았어요. 정지인 감독님과 안무 선생님, 무대연출 선생님들의 도움이 엄청났다는 뜻이겠죠. 한국인으로서 자부심도 느꼈어요. 위대한 예술의 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시청자분들도 그런 몰입감을 즐겁게 여기신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칭찬이나 반응이 있나요?

사실 제 ‘은하수(신예은의 팬덤명)’ 팬분들이 나이가 어린 편이라 평소 걱정 섞인 잔소리를 종종 건네요. 저 때문에 공부도 못하고 일찍 자지도 못하니 부모님들이 저를 싫어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언니, 우리 엄마 아빠도 언니 좋대”라는 댓글이 정말 기분 좋았어요. “야, 고맙다, 이모한테 감사하다고 전해줘”라고 웃으며 대꾸했죠.

극중극인 <자명고>의 가다끼(악역) ‘고미걸’로 등장했을 때 보여준 강렬한 분장도 잊을 수 없어요. 의상과 메이크업에서 힘을 많이 받는 편인가요?

네. 역할도 그렇지만 저라는 사람도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에 따라 인상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 편이에요.

허영서가 맡은 네 인물 중 <바보와 공주>의 온달을 ‘베스트 캐릭터’로 늘 꼽더군요.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는 인물이라 연기하며 행복했다는 말에서 따뜻한 성정이 느껴졌어요.

나부터 행복해야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어요. 물론 내가 행복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면 더 좋겠지만요. 내가 순간을 충분히 즐기는 상황에서 상대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기쁨을 <바보와 공주> 무대에서 많이 느꼈어요.

서울시 무형문화재 엄익평 옥장의 호박 쌍가락지는 가원공방(Gawoncraft).

겉보기엔 털털하고 긍정적이지만 새로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토로합니다. 매번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말이죠.

새로운 촬영 환경은 물론이고 이사하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낯선 인연을 대하는 일은 더 어렵죠. 거기에 관련해서는 요즘 한 선배님의 말씀이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래도 먼저 다가가봐. 그 용기와 마음을 싫어할 사람은 없어”라는 조언이 크게 와닿았거든요. 늘 타인이 불편해할까 봐 조심스러웠는데 고민하면서 조금씩 갈피를 잡는 중이에요.

고민이 생기면 주변에 조언을 구하는 편인가요?

아뇨.(웃음) 고민이 해결된 상태에서 “사실 한동안 이런 고민에 시달렸다”고 털어놓는 편이에요. 지금 이 순간 힘들게 느껴지는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죠.

<정년이> 메이킹 영상을 보니 그래도 김태리 배우와는 진지한 속내부터 실없는 농담까지 많은 얘기를 주고받더군요.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끝은 있다. 중요한 것은 다 끝났을 때 후회하지 않는 거다.” 촬영이 정말 힘들었을 때 태리 언니가 한 말인데 지금 딱 기억이 나는군요. 그 후로 삶이 녹록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려요.(웃음)

<정년이>보다 한발 앞서 존재감을 알린 <더 글로리>는 충격적인 활약이 돋보였지만 아역 출연이었죠. <정년이>를 통해 확실히 한 단계 뛰어넘었나요?

아니라면 내숭이고 가식일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와’ 그런 것도 아니에요. 정말 감사하며 좋은 결과를 냈다는 걸 충분히 체감하고 행복하게 누리지만, 저는 앞으로도 똑같을 거예요. 똑같은 마음으로 다음 스텝을 밟을 거고요.

깃털 장식 포인트의 트위스트 오픈 백 드레스는 로에베(Loewe), 흰색 버선과 검정 비단신은 차이 김영진(Tchai Kimyoungjin), 엄익평 옥장의 머리꽂이는 가원공방(Gawoncraft), 신윤복의 ‘미인도’가 그려진 부채는 윤의한복(Yunui Hanbok).

다음 스텝은 <탁류>입니다. 2025년 디즈니+에서 공개될 액션 사극으로 로운, 박서함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추죠. 어떤 기대감으로 출연을 결심했나요?

일단 존경하는 추창민 감독님과 꼭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7년의 밤>(2018) 등을 연출했죠.

맞아요. 감독님께서 엄청 섬세하고 디테일하세요. 그 과정을 열심히 따라가며 감독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이 작품의 가장 큰 배움이 거기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이번에 맡은 장사꾼 ‘최은’은 거세게 현실과 맞서는 명랑한 인물이라 출연작 <꽃선비 열애사>(2023)에서 맡았던 소녀 가장 ‘윤단오’가 떠올랐어요.

하지만 현장에서는 완전히 낯선 느낌이 들어요. 그 독특한 현장감을 보시는 분들도 분명 느끼실 거예요. 미장센이 정말 아름답거든요. 모니터링할 때마다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데, 얼른 보여드리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배우가 된 후로 크게 흔들리거나 휘청거린 적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천직이기 때문일까요? 배우의 삶에 대한 확신을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요?

저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할 때,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이 길에 대한 확신이 강해져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로 누군가에게 힘이 될 때 뿌듯하죠.

긴 커프스 장식 실크 블라우스는 렉토(Recto), 테일러드 베스트는 가브리엘 리(Gabriel Lee), 붉은 노리개와 버선은 차이 김영진(Tchai Kimyoungjin), 은색으로 칠한 이은상 도예가의 달항아리는 레인하우스(Lanehouse).

다양한 운동과 요리에 도전하고, 시간을 알차게 쓰는 모습에서 굉장한 의욕을 안고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패션에 대해서는 어떤 즐거움을 느끼나요?

패션은 저에게 미지의 세계였어요. 데뷔하고 나서 조금씩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죠.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의 패션 관련 계정을 여러 개 눈여겨보며 감각을 습득하는 중인데, ‘핏’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무심하게 청바지를 입어도 태가 나면 멋지죠. 그것과는 별개로 집에 가지런히 정렬된 맨투맨, 트레이닝복, 잠옷, 알록달록한 양말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요.

‘태리 언니’에게 쓴 생일 편지에 “다른 친구들이랑 놀지 말아요. 질투 나니까”라며 귀여운 애정을 드러냈더군요. 편지를 통해 자주 마음을 전하나요?

말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편지를 써요. 저에게 편지는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혹은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만 활용하는 수단이죠. ‘생일 축하해’나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식으로는 절대 편지를 쓰지 않습니다. 만약 제 편지를 받으시는 분이 있다면, 정말 사랑한다는 걸 알아주세요.

왠지 글씨도 예쁠 것 같아요.

맞아요. 헤헤.

배우로서 앞으로 어떤 새로운 미션이 주어질까요?

최근 ‘버블’에서 어떤 팬이 그러더라고요. “허영서는 신예은의 20대였다.” 그 말을 되새기며 2025년은 저의 30대를 열어주는 시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직 서른이 되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그만큼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연기 폭도 더 넓어지고, ‘진짜 어른’처럼 보이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2025년에 딱 한 가지는 무조건 이루어진다면, 어떤 소원을 빌 건가요?

졸업요!

진심이죠?

정말이에요. 요즘 학교에 가면 학번이 ‘1’로 시작하는 사람이 저뿐이라 몹시 부끄럽거든요. 졸업식 때 학사모 던지는 게 삶의 가장 큰 로망인 만큼 꼭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2025년에 학사모를 던지는 제 사진이 인스타그램(@__shinyeeun)에 업로드된다면 ‘좋아요’ 눌러주세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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