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버티는 일상, ‘돌과 연기와 피아노’
국제갤러리 서울점에서 오는 1월 26일까지 열리는 박진아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 퍽 흥미롭습니다. ‘돌과 연기와 피아노’. 이는 작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돌’은 작가가 2023년 부산시립미술관 그룹전을 준비할 때 발견한 모습, 즉 미술 공간을 뜻합니다. ‘연기’는 국제갤러리 레스토랑 주방의 풍경이고요. ‘피아노’는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피아노를 만드는 독일의 슈타인그래버 공장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각각의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가에게 더 중요한 건 각각의 공간성 혹은 장소의 특성과 거기서 우연히 발견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회화로 되살아난 이 존재들을 통해 관람객이 감각하게 되는 시간성이기 때문입니다.
박진아 작가는 스냅사진을 활용해 일상의 평범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 장면을 캔버스에 재구성하는 회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3년 동안 집중해온 새로운 연작을 중심으로, 제목의 카테고리로는 묶이지 않는 그 외의 장면도 중간중간 등장합니다. 매우 큰 유화도 있고, 자그마해서 더욱 품고 싶은 수채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연작이 이질적이지 않은 건, 바로 작가가 바라보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박진아 작가의 작업에는 늘 어떤 특정 장소, 즉 백스테이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너무 순간적이라 당사자도, 보는 이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죠. 그래서 작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이들의 모습을 포착하고, 기억하며, 소환해, 캔버스에 되살립니다. 즉 일상에서 거의 흐르다시피 하는 찰나의 시간성을 바로 회화적인 시간성으로 전환하는 작업인 셈이지요.
각각의 작품은 작가가 회화성을 어떻게 실험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당연히도 각 현장은 그 공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몸짓과 제스처를 통해 차별화됩니다. 곧 이들의 다채로운 동작은 곧 이 세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죠. 작가는 이들의 각기 다른 포즈를 균형 있게 캔버스 위에 재배치하면서 실제 시간을 초월하는 회화만의 시간을 직조합니다. 그 과정에서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 같은 전통적인 구획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회화의 가능성이 자랍니다. 어떤 그림에는 같은 사람이 연속 동작을 하듯 두 번 등장하고요,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현장의 도구가 차지합니다. 즉 특별한 내러티브가 없는 박진아의 그림 속에는 이들의 일상적인 몸짓, 널브러진 전선, 눈부신 조명, 심지어 주방에서 피어오르는 아주 작은 불길조차도 세계에 생기를 부여하는 일종의 사건이 됩니다. 무엇 하나 과한 것도 없고, 쓸데없이 자리한 것도 없이, 모든 것이 회화적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예술에 일조하고, 모든 순간이 예술이 됩니다.
“나는 사이의 시간을 그립니다.” 기자 간담회에서 박진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식하지 못하는 그 사이의 시간에는 정말이지 많은 것이 녹아 있죠. 특히 그것이 일터, 즉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이라면 더더욱 그럴 겁니다. 자기 일에 대한 약간의 자부심, 어쩌면 조금의 매너리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려고 애쓰는 최소한의 책임감이 만들어낸 빛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대단할 게 없는 이들의 동작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듯, 우리의 작은 몸짓이 삶이라는 시간을 채우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한옥 전시장 뒤편에 걸린 작품 ‘경험 쌓는 피아노’를 꼭 놓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곧 세상에 나올 피아노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마지막 테스트에 몰입하는 어느 베테랑의 인상적인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전시장 밖에서만, 한발 떨어져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이런 회화적 풍경이 우리에게 건네는 대화가 되는 그 순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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