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빈 “뭐든 ‘해볼게요’라고 답하며 여기까지 왔어요”
잔뜩 무르익은 기운. 다채로운 낯을 띤 채 찬란한 쪽빛 세계를 유영하는 이주빈.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 피천득 ‘새해’
새해처럼 새롭고, 봄비로 꽃을 피울 배우 이주빈
‘클래식 블루’를 팬톤이 올해의 컬러로 선정한 2020년, ‘Simple is the best’라는 이유가 뒤따랐다. “시대를 초월한 푸른 색조인 ‘클래식 블루’는 단순하고 우아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때 신뢰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합니다.” 하늘과 바다, 청바지의 존재감에서 느껴지듯 블루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바탕이다. ‘믿고 보는 배우가 되겠다’는 말이 배우에게서 가장 흔히 듣는 포부라는 것을 감안하면 레드보다는 블루가 배우의 색으로 더 적합하지 않을까. 첫 <보그> 촬영에 임한 이주빈에게 한 점의 얼룩도 없는 푸른 세상을 선물했다. 많은 것을 포용하고, 파도처럼 대담하며, 편안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블루. 아직 많은 것을 알진 못하지만, 왠지 그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물론 파랑은 이주빈의 ‘퍼스널 컬러’와는 거리가 멀다. “시원하고 차가운 색깔을 좋아하지만 제게 잘 받는 색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푸른 계열의 옷은 전부 옷장에 걸려만 있어요. 평소 촬영할 때도 따뜻한 톤을 주로 활용하는데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파란색 옷을 마음껏 입어서 좋군요.” 이주빈의 음색은 차분하고 명징했다. 유도된 흐름에 쉽게 휩쓸리지 않으며, 시종일관 솔직한 태도다. 새해가 되자마자 마지막 화에 이른 여행 예능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 로맨틱 이탈리아>에서 보여준 모습도 마찬가지. 낯선 환경의 장벽 앞에서 언제나 직접 몸으로 돌파하는 쪽을 택하는 이주빈의 도전 정신은 답보 상태에 이를 때마다 새로운 물길을 터주며 모두의 숨통을 틔웠다. “뭐든 몸으로 부딪치는 스타일이거든요. 성격도 급하고 결단도 빨라요. 생각은 결국 돌고 돌잖아요. 그 시간에 직접 하는 게 낫죠. 좋게 표현하면 리더십 있고, 안 좋게 말하면 단순 무식합니다.(웃음)” 그러나 예능 프로그램으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주빈은 만능에 가까운 캐릭터다. 빠른 눈치와 언어 센스로 위기를 넘어서고, 숨겨둔 캠핑 장인의 면모를 발휘하는가 하면, 모두를 태운 승합차를 구불구불한 산비탈에서도 매끄럽게 견인하고, 몸보다 큰 배낭을 메고 항상 맨 앞에서 무리(라미란, 곽선영, 이세영)를 이끌었다. 그런 무심한 내공에 반한 이는 ‘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반짝이는 눈으로 주시하던 이세영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여름에 다녀온 여행이었는데 여전히 생생해요. 방송에 비친 제 표정을 보면서 ‘저 때 되게 좋았나 보나’ 돌아보기도 하죠. 이탈리아 소도시를 골목골목 다니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람들의 여유로운 일상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좋았어요.”
배우로서 행적을 되짚기 전에, 우리는 한참 동안 여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적 친분을 쌓으려 찬찬히 살핀 이주빈의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눈에 띈 사진은 전 세계 곳곳의 하늘과 바다, 도시와 녹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주빈의 직업관 이면에는 더 크고 너른 것이 깔려 있음이다.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이요? ‘뭐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다.’ 과거에는 굉장히 계획적이던 성격도 여행을 하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쪽으로 바뀌더라고요. 이젠 자기 합리화를 꽤 잘해요.” 미국에 있는 가족은 가장 친근한 동행이다. 어렸을 때는 지붕이 내려앉을 정도로 다투던 세 자매는 떨어진 시간과 거리만큼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키워가고 있다. “내년에 방영할 <이혼보험>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3주 정도 여유 시간이 주어져서 동생과 캐나다로 로드 트립을 떠나려 했어요. 그런데 촬영 직전에 덜컥 모험을 감수하기가 걱정돼서 단념했죠. 내심 아쉬워요.” 엄마를 위한 생애 첫 크루즈 여행을 비롯해 이주빈의 생각과 마음, 근육에 고스란히 스며든 지난 여행의 기억은 필요한 순간마다 소환되며 삶에 추진력을 더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시작한 배우의 길에서 성실히 전진하는 이주빈의 마음가짐도 여행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작품과 역할을 만날지 한 치 앞을 모르잖아요. 느낌은 좋았지만 막상 해보니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고, 기대감이 크지 않았는데 아주 좋을 수도 있죠. 그런 의외성이 재미있어서 계속 연기에 도전해요.” 내가 이주빈의 존재를 처음으로 의미심장하게 감지한 시점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2022)이다. 힘없는 조폐국 직원에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스톡홀름’이라는 코드명으로 강도단에 가담한 그는 수줍지만 강인해서 전종서, 장윤주, 임지연, 김윤진 등 개성 강한 배우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보여줬다. 물론 만만한 도전은 아니었다. “엄청난 사랑을 받은 원작도 있고, 노출 장면도 있어서 참여 자체가 미션이었어요. 끝까지 촬영을 마칠 수 있게 도와준 생각은 ‘최선을 다했는데 평가가 별로면 내가 못한 거지 뭐’ ‘그때 가서 관둬도 늦지 않아’였죠. 제게 부여된 감정선이 원작보다 한국 버전에서 자세히 그려지는 것도 운이 좋았고요.”
토네이도처럼 출렁이는 드레스, 잔뜩 부푼 플리츠 드레스, 쿨한 데님 톱과 팬츠··· 촬영 내내 이주빈의 푸른 활약이 계속됐다. 피사체의 다양한 얼굴과 이미지를 상징하는 각양각색의 탈을 흥미롭게 다루며 이주빈은 긴 팔다리를 집중력 있게 움직였다. 두 편의 차기작(<트웰브>와 <이혼보험>) 촬영을 병행하는 시점에 진행된 화보였기에 문득 참을 수 없는 하품이 흘러나오긴 했지만. 미세하게 충혈된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한 순간에는 차가운 인상이 엿보였다. “제 얼굴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눈에서 느껴지는 힘이 있다고들 하더라고요. 미세한 표정과 근육까지 너무 민감하게 신경 쓰지 않아도 매력을 느껴주시니 조금 더 편하게 얼굴을 쓰려고 해요.” 카메라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농축된 경험치가 배어났다. 2017년 드라마 <귓속말>에서 비서 역할로 데뷔하기 전까지 배우가 되길 꿈꾸다 뷰티와 한복 모델 등으로 활동하며 10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온 결과다. “남보다 늦게 연기를 시작한 만큼 조급함이 컸어요.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최대한 많은 현장과 캐릭터를 경험해야겠단 판단이 섰죠. 뭐든 ‘해볼게요’라고 답하며 여기까지 왔어요.” 이후 여신, 퀸카, 첫사랑 등 유난히 아름다운 외모로 주목받는 역할이 그에게 주어졌다. “너무 어렵더라고요. 한 친구에게 ‘예쁜 연기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아주 인상적인 답변을 들었어요. ‘그건 네가 하는 게 아냐. 주변 사람들이 널 예쁘게 봐주면 퀸카가 되는 거야’라고요.(웃음) 그때 연기는 함께 하는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미워할 수 없는 하향세에 놓인 셀러브리티를 연기한 <멜로가 체질>(2019)은 한동안 가장 고마운 기회로 꼽은 작품. 칼질과 타로에 능한 걸크러시 횟집 사장으로 나온 웹드라마 <가두리횟집>(2020) 역시 배움이 컸던 작품으로 회상한다.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았거든요. 스스로 의심했는데 결국 다 하더라고요. 이후 해보지도 않고 의심하지 않기로 했어요.”
성실함만큼 다행히도 기회의 파도가 차근차근 밀려왔다. 그 앞에서 이주빈은 언제나 필사적으로 몸을 던지며 직접 경험하고 깨닫는 쪽을 택했다. 꾸준한 여행을 통해 얻은 스스로의 지혜였다.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 <눈물의 여왕>과 1,1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범죄도시4>로 배우로서 뿌듯한 2024년을 보냈을 때도 그는 “이제 시작”이라며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물론 고생을 많이 했죠. 운동을 좋아하는데 체력의 한계를 느껴서 마(동석) 선배님 복싱장에서 줄넘기 트레이닝도 시작했을 정도예요. 이제 시작이에요. 여태까지 짧은 호흡으로 통통 튀는 매력을 보여주는 신 스틸러 역할을 자주 맡았다면 앞으로는 주연으로서 완전히 다른 호흡과 밀도로 연기해야지 싶어요. 처음부터 다시 경험하고 배우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습니다.”
2025년, 히어로물 <트웰브>와 드라마 <이혼보험>에서 이주빈은 주역으로 활약한다. <범죄도시4>에 이어 반가운 인연을 이어가게 된 마동석을 필두로 박형식, 서인국, 성동일 등이 출연하는 <트웰브>는 액션에 대한 갈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작품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코리안 히어로물이에요. 일종의 히어로인 ‘12천사’가 액션 연기를 거뜬히 해내야 해서 처음으로 액션 스쿨도 다녀요.” 또 다른 차기작 <이혼보험>도 장난기 넘치는 이동욱, 이광수, 이다희 배우와 함께 최고의 분위기에서 촬영을 이어가고 있다. “경력도, 나이도, 막내인 저를 다들 잘 챙겨주셔서인지 <이혼보험>을 촬영하며 연기가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중심이 잡힌 느낌이랄까요.”
아직 배우의 삶이 100% 믿기는 것은 아니다. 성실한 직업인으로 연기에 임하는 이주빈은 여느 직장인처럼 일과를 완수하기 위해 분투하고, 노동 이후의 꿀 같은 휴식을 그리며 촬영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런 삶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12월도, 1월도 촬영 때문에 정신없이 지나가겠지만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아요. 오히려 요즘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고요. 바쁜 와중에도 풍경 좋은 곳에서 햇볕을 쬐며 커피 한 잔 마시는 삶이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1월 1일에는 쉴 수 있겠죠?” 처음 느낌 그대로 맑고 단단한 목소리. 여전히 짙푸른 쪽빛 세계를 뒤로한 채 이주빈이 믿음직한 눈빛으로 내일을 채색한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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