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를 안방에 침투시키는 기발한 방법
<옥씨부인전>(JTBC)은 ‘이름도, 신분도, 남편도, 모든 것이 가짜였던 외지부 옥태영(임지연)과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예인 천승휘(추영우)의 치열한 생존 사기극’으로 요약된다. 배경은 조선의 이름, 풍습, 제도를 모방하지만 정통 사극의 정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즉 유사 조선이다. 설정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데, <옥씨부인전>은 여기에 의외의 야심을 더했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올해 공개된 어떤 현대극보다 현대적이다.
<옥씨부인전>은 유사 조선에서 소외된 다양한 인물을 그리고 희망을 제시한다. 주인공 구덕이는 똑똑한 노비다. 게으르고 멍청한 아씨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글, 셈, 수예 등 양반이 독점하는 기술도 터득했다. 포악한 노주에게 항거하고 도주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화적 떼에게 살해당한 충청도 양반 자제 옥태영의 신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다른 노비들이 연대해 구덕이의 도주를 돕는다. 구덕이에서 옥태영으로의 신분 전환은 주인공의 정의로움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옥씨 집안 안방마님(김미숙)은 구덕이의 과거를 알고도 손녀의 대체자로 받아들여 애정을 퍼붓는다. 일종의 입양이다.
주인공의 첫사랑 천승휘는 양반 도련님으로 자랐지만 예인이 되고 싶었다. 신분 질서에서 어긋난 그의 욕망은 ‘광증’으로 치부된다.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천승휘는 집을 나와 전기수가 된다. 천승휘가 전기수로 이름을 떨지자 아버지는 집안 망신이라며 그를 파문한다.
구덕이는 옥태영이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양반에게 차별받는다. 사람들은 그가 화적 떼에게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몸이 더럽혀졌을 것’이라 수군댄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은 ‘환향년’이라 무시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일본군 위안부도 오랫동안 비슷한 시선을 겪었다. 태영을 향한 양반들의 억측과 비아냥은 이처럼 유서 깊은 여성 혐오 행태를 지목한다.
다른 양반들이 옥씨 집안을 트집 잡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집안은 신분을 초월해 인간을 존중하는 가풍을 지녔다. 그들의 인본주의는 다른 양반들의 폭거에 걸림돌이 된다. 신분 세탁 후 숨어 지내던 구덕이는 친한 노비들이 위기에 처하자 각성해서 진정한 옥태영으로 거듭난다. 양반의 지위와 법전 해독 능력을 이용해 노비를 돕기로 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의 실체를 아는 하인조차 태영을 진정한 ‘아씨’로 인정하게 된다. 엘리트 지배층의 자격을 묻는 대목이다.
또 다른 인본주의자이자 법치주의자 현감 성규진(성동일)은 옥태영을 외지부로 발탁하고 자기 아들과 결혼시킨다. 외지부는 <조선변호사>(MBC, 2023)로 먼저 알려진, 법무사나 변호사 개념의 직군이다. 태영의 결혼을 통해 드라마가 아우르는 소외층은 노비, 여성, 서자, 예인에서 한 뼘 더 확장된다. 현감의 아들 성윤겸(추영우)은 성소수자다. 그는 폭력에 노출된 어린 성소수자를 모아 자기방어술을 가르친다. 2차 성징이 애매하게 발현되는 바람에 양반 집안에서 쫓겨난 크로스드레서를 아동 인신매매 현장에서 구해내기도 한다. 옥태영과 성윤겸은 섹스는 할 수 없지만 아웃사이더끼리의 연대감을 바탕으로 결혼을 한다. 조선판 <대도시의 사랑법>(2024)이다.
옥태영이 성소수자 변론에 주저하자 성윤겸은 일갈한다. “노비 출신이라고 노비만 변론하냐.” 이 말은 옥태영을 다시 한번 각성시킨다. 태영이 모든 약자의 변호인으로 성장하는 모습, 윤겸이 성적 자기 결정권과 소수자 인권을 주장하는 장면, 전통 질서의 수호자인 현감이 공권력과 부성애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은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감성으로 납득하게 되는 내용이다. 흔치 않은 소재를 시치미 뚝 떼고 감쪽같이 오락에 녹여내 용감하다기보다 짓궂다는 감상이 들 정도다. 가히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안방에 침투한 퀴어 서사다.
물론 이런 메시지 전달 전략이 성공하려면 먼저 드라마가 재미있어야 한다. <옥씨부인전>은 볼거리가 많고 위기와 유머의 배합이 좋은 드라마다. 분위기 변주가 잦지만 임지연, 성동일, 김미숙, 김재화 등이 노련한 연기로 윤활제 역할을 한다. 옥태영 캐릭터가 공감을 쌓아갈수록 그의 신분이 언제 들통날지 모른다는 긴장도 커진다.
방영 중반에 접어들면서 <옥씨부인전>은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반정으로 집권한 왕은 공포정치를 실행 중이고, 지역 비리 카르텔과의 알력 싸움에서 패배한 현감은 전 재산을 잃고 파직된다. 옥태영은 현감과 식솔들을 구하기 위해 양반들의 비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역적 누명을 쓸까 봐 도망친 남편 성윤겸을 대신해 그와 닮은 첫사랑 천승휘가 태영을 조력하면서 신분 사기극이라는 주된 테마도 스릴을 더해간다.
총평을 하자면 <옥씨부인전>은 시대극의 형식을 빌려 오늘날에도 유효한 약자의 연대와 승리, 엘리트의 역할, 기득권의 부패와 폭력 등을 의미심장하게, 한편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드라마다. 멋진 시도다.
<옥씨부인전>은 총 16부작으로, 11월 30일부터 토, 일 밤 10시 30분 JTBC에서 방송되고 있다. 티빙과 넷플릭스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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