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정신과 모험이 엮어낸 하이엔드 울
트렌드가 요약되지 않는 요즘 주목받는 것은 소재다. 전통 기술과 하이테크, 장인 정신과 모험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새로운 사인을 보낸다.
유난히 덥던 지난여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상학자들은 올겨울 역대급 한파를 예측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피 애호가인 나는 한파 소식이 언제나 반갑다. 옷장에 걸린 다양한 모피를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골프 라운딩을 나가도 부담 없을 만큼 평년을 웃도는 영상의 기온 때문에 모피가 나의 데일리 룩이 되지 못한다. 기온과 상관없이 12월 1일이 되면 ‘준비 땅’ 하고 밍크부터 챙기던 나였지만 뒤늦게 클래식한 울의 매력에 빠져 일상을 더 가볍고 포근하게 지내는 중이다. 게다가 모피처럼 호사스럽지 않으면서 따듯하고 세련된 울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모피 이상의 역할을 해준다.
하이패션의 울타리 안에서 울, 캐시미어 하면 로로 피아나, 에르메스 같은 유명 라벨부터 떠올린다. 넓은 의미로 울은 동물 털로 만든 모든 소재를 말한다. 어떤 동물에서 얻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지는데 메리노 울, 램스 울, 셰틀랜드 울뿐 아니라 염소나 알파카, 비쿠냐, 토끼, 낙타 등 일부 다른 동물의 털로 만든 모헤어도 모두 울에 포함된다. 특히 부드럽고 가볍고 따듯한 메리노 울, 램스 울 등은 모두 하얀 양털로 생산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농가에서는 울 염색이 용이한 흰색 양을 선호했다. 어두운색 울의 열성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일부 양은 사육자가 외면했다. 그런데 로로 피아나가 선보이는 ‘페코라 네라(Pecora Nera)’는 어두운색의 희귀한 울로 만든다. 회장 피에르 루이지 로로 피아나(Pier Luigi Loro Piana, 1924년부터 시작된 로로 피아나의 유산을 1970년대 아버지 프랑코 로로 피아나(Franco Loro Piana)에 이어 계승한 둘째 아들로, 좋은 원단을 식별·소싱·가공하는 분야에서 아버지의 전문 지식과 노하우를 능가했다고 평가받는다)는 1990년대 말 뉴질랜드에서 양모를 생산하던 피오나 가드너를 만났다. 그는 곧 피오나 가드너가 생산하는 검은색 천연 울의 진귀한 매력에 빠졌다. 1983년 다섯 마리의 유색 양을 물려받은 피오나 가드너는 어두운 털을 지닌 양과 이 양에서 나오는 다양한 자연 색상에 매료됐다. 피오나는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품종개량에 전념해 검은색과 회색, 갈색 털을 가진 독특한 양을 키웠다. 피오나의 혁신과 헌신은 이윽고 울 제작의 노하우, 즉 울을 분류하고 양 품종을 개량하는 특별한 분야의 출발점이 됐다.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색 울이라는 독특한 유산을 토대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피에르 루이지 로로 피아나는 그녀와 2002년 협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선구적인 안목과 능력,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으며 유색 메리노 양의 품종을 개량한 용기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두운색 울의 품질과 색상 강도를 높이기 위한 품종개량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모든 결과는 양 사육자들이 결함으로 여겼던 것을 아름다움으로 재발견한 한 여성의 혜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3년부터 로로 피아나는 가드너 일가가 생산하는 어두운색의 페코라 네라 울을 전량 구입하는 유일한 구매자가 됐다. 물론 이 과정은 세심한 주의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로로 피아나는 양을 기르는 방식부터 원단을 제조하는 과정까지 아웃소싱 없이 본사에서 직접 관리한다.) 각 로트마다 부여되는 울의 고유한 컬러 팔레트는 팀 간의 긴밀한 협업이 이뤄져야 자연스러운 색조와 무결성이 유지된다. 이렇게 탄생한 페코라 네라는 기능적이면서 아름답다. 또 무척 가볍고 편안해 실용적인 반면 검은색, 갈색, 회색 메리노 양모의 자연스러운 색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패턴과 질감은 트렌드와 로고로는 표현할 수 없는 클래식 감성을 드러낸다.
변화무쌍한 날씨, 갈수록 심플한 세련미가 요구되는 유행의 흐름에 따라 고급 소재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시즌리스’한 모던함을 유지하는 하이엔드 울이 정답이 될 수 있다. 클래식하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더하면 요즘 유행하는 어떤 아이템과 매치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예측 불가능한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 옷이 변화하듯 옷장을 구성하는 우리의 생각도 유연해질 때다. 특히 요즘처럼 춥지 않은 겨울엔 더더욱. (VK)
- 패션 디렉터
- 손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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