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남자, ‘나의 완벽한 비서’
똑똑한 여성 커리어 우먼이 등장하는 오피스물은 K-드라마의 베스트셀러다. 하지만 이런 장르에서 여주인공의 카리스마에 보조를 맞추는 성숙하고 현대적인 남성상을 로맨틱하게 연기할 매력적인 남자 배우는 드물다. 이준혁이 한지민의 비서로 출연하는 <나의 완벽한 비서>(SBS)는 그래서 흥미롭다.
<열혈사제 2> 후속으로 1월 3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이 작품은 가제가 <인사하는 사이>였다. 가제가 ‘헤드헌팅’이라는 직업물 요소를 강조했다면 <나의 완벽한 비서>라는 지금 제목은 전통적 성별 상하 관계가 반전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로맨스로 시선을 모은다.
여주인공 강지윤(한지민)은 헤드헌팅 회사 대표다. 인력 정보를 수집하고 이직을 설득하는 일에는 능하지만 고객이 없을 때면 소지품도 제대로 못 챙기고 자기 차도 헷갈리는 ‘허당’이다. 거기다 성격이 까다로워서 비서 구하기가 어렵다.
1~2화에서 지윤은 대기업 임원을 스카우트하려다가 그 회사 인사 팀 직원 유은호(이준혁)와 마주친다. 은호는 헤드헌터가 멀쩡한 직원을 빼내 기업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지윤은 이 일로 은호에게 앙심을 품는다. 한편 은호는 지극정성으로 회사 임원을 붙잡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상치 못한 반전이 벌어진다. 이 일로 퇴사한 은호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지윤의 비서가 된다.
드라마 초반 분위기는 좋다. 지윤은 악랄한 인재 사냥꾼처럼 보이지만 해외 기술 유출도 불사하는 경쟁사와 달리 정도를 지키는 타입이다. 경쟁사 대표 김혜진(박보경)과 지윤은 과거 함께 일한 선후배 사이다. 2화에서 혜진의 부당 행위에 항의하려고 옛 회사를 방문한 지윤은 ‘살인자’, ‘배신자’ 등 수군거림을 듣고 공황에 빠진다. 둘 사이에는 모종의 원한이 있는 듯하고, 이들의 경쟁을 통해 헤드헌터의 세계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질 예정이다.
남자 주인공 유은호는 회사에 다니는 이유가 돈만은 아니라 생각해서 자신이 관리하는 임직원에게 무형의 복지를 제공한다. 한국 오피스 드라마에서는 일은 잘하지만 인정머리 없는 ‘실리주의자’ 대 감성이 이성에 앞서는 ‘이상주의자’ 구도가 흔하다. 은호 캐릭터는 지윤의 반대급부이긴 하나 답답한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윤보다 합리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은호는 중요한 시기에 육아휴직을 했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괴롭힘당한다. 은호의 실적에 무임승차하려다가 실패한 상사가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 하는 언행은 K-직장인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현실을 잘 포착한 예리한 각본이다.
모처럼 잘 짜인 오피스물을 보는 재미와 더불어, 로맨스의 주역인 한지민과 이준혁의 합도 좋다. 지윤은 ‘돈값’ 못하는 사람에게는 냉정하지만 나름의 의리와 따뜻함이 있다. 초반 암시에 따르면, 그가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과로를 하는 배경에는 개인적인 상처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아픔을 못난 성격의 핑계로 쓰지 않는다. 한지민 특유의 스마트하고 성숙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지윤과 잘 어울린다.
유은호는 싱글 대디다. 그의 집은 아이 스티커, 장난감 때문에 알록달록하지만 생활용품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다. 요리 실력은 수준급이다. 게다가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잘 챙긴다. 지윤의 비서로 취직한 은호는 즉각 대표실의 서류 더미를 정리하고, 헤드헌팅 관련 서적을 독파한다. 지윤의 직업을 폄훼한 것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사과한다. 성격은 침착하다. 과장되거나 모난 구석이 없다. 한국 드라마에서 실로 오랜만에 보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파트너로 삼기에 이상적인 남자 주인공이다.
이준혁은 이마를 드러내고 수트를 입은 <비밀의 숲> 시리즈 이후 여성 팬의 호감도가 급상승한 배우다. 반려견을 추모하기 위해 모바일 게임을 제작하거나 동요를 만드는 등 독특한 창작 활동으로 자기 세계가 뚜렷하되 무해한 남자라는 이미지도 생겼다. 최근 인상적인 장면은 <나의 완벽한 비서> 홍보를 위해 유튜브 ‘나래식’에 출연했을 때다. 외모 구박을 받는 게 일종의 고정 롤이 되어버린 박나래가 자신을 “(프로레슬러) 브록 레스너 스타일”이라고 자조하는데도 이준혁은 분위기에 휘말리지 않고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거나 “요정 같으시다”라며 화제를 넘기려 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화법이 몸에 밴 듯하다. 여러모로 이준혁은 준비된 ‘로코’ 배우인데, 최근 인터뷰들에서 “시체도 없고 피도 없으니 신기하다”고 했을 정도로 이 장르 주연이 오랜만이다. 이번 캐스팅은 그에게도, 작품에도 좋은 선택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리얼리즘 드라마가 아니다. 극적 과장이 다분하고 코미디 요소도 있다. 어디선가 달려온 훤칠한 남비서가 쓰러지는 여상사를 공주님 안기로 받아내는 낯간지러운 장면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성격 파탄 난 재벌 2세가 아니라 현실 커리어 우먼이 이상형으로 삼을 만한 성숙하고 조신하고 일머리 좋은 남주인공이 있다.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남주인공상이다. 앞으로 지윤에게 감정이입할 시청자가 많을 걸로 보인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SBS에서 금요일 오후 10시, 토요일 오후 9시 50분 방송된다. 넷플릭스, 웨이브에서도 스트리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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