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남자에 찬탄할 준비
남자에 감탄하고 사랑하던 시절이 부끄러웠다. 젠더 감수성에 반한다며 모두를 무성의 생명체로 대했다. 그렇게 놓친 아름다움을 안타까워하며 남자와의 재회를 준비하다.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은 슬픈 남자였다. 고(故) 송해 선생님이 한창이시던 1995년, <전국노래자랑>의 야외 무대. 이너 없이 베스트만 입은 남자 초대 가수 셋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랑했던 나의 마음속에~.” 후에 R.ef의 이성욱임을 알게 된 청년의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노래는 R.ef 1집의 세 번째 히트곡인 ‘상심’이었다. ‘고요속의 외침’ ‘이별 공식’으로 먼저 주목받은 그룹이었는데, 정작 나는 발라드를 부르는 이성욱의 아련한 눈동자에 빠졌다. 써놓은 팬레터를 차마 부치지 못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깨닫고 울던 여중생은 다음 해 데뷔한 H.O.T.로 치유됐음은 물론이다.
유전자에 슬픈 남자라는 취향이 새겨졌는지, 나는 언제나 주인공보다는 옆에 선 ‘서브 남주’를 좋아했다. 주인공보다 완성형의 재능과 재력, 외모를 지녔지만 대기만성형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마는 이들. <드래곤볼>에선 손오공이 아니라 베지터를, <슬램덩크>에선 강백호가 아니라 정대만을, <원피스>에서는 루피가 아니라 조로를 보면 뭉클했다. 슬픔을 들키지 않기 위해 냉정하거나 배타적이어야 했던 이들. 지금 옆에 있는 남자 친구도 어쩌면 그의 슬픔에 끌렸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인생을 구하겠다는 모성애는 아니고, 깊은 우물 같은 그의 상심이 안쓰럽게 다가왔다. 가슴에 우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것이 내 눈에 더 깊어 보인다면 인연이다. 그렇게 믿고 그와 4년째 만나고 있다.
갑자기 웬 남자 타령인가 싶지만, <보그> 2월호로 기획된 ‘옴므’ 사진을 보며 이 멋진 생명체에 대해 써보고 싶어졌다. 남자, 오래 잊은 단어다. 내가 남자를 너무 오래 안 만났나. 말해놓고 보니 사귀는 연인에게 미안하지만, 그는 늘 있는 ‘존재’이니 남자와는 별개다. 오히려 그 때문에 남자라는 존재를 부러 잊은 면도 있다. 연애 초반에는 그이만으로 충족되었고, 그 후에는 다른 이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플라토닉 불륜 같다고나 할까.
며칠 전 나는 뭇 남성 사이에 있었다. 집들이였다. 10여 년 전 동호회에서 우연히 만난 동생들과 1년에 두세 번 단톡방에 소식을 이어갔는데, 소년 같던 그가 벌써 결혼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나를 초대했다. 신혼집에 들어서니 10년 새 사회인 태가 역력해진 동생들과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 ‘남자’들은 가위로 오린 종이 인형처럼 이질적이어서, 나의 사회성은 잠시 고장 났다. 그러고 보니 남성 무리와 목적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지 꽤 됐다. 신혼집에 대한 칭찬과 호스트 부부의 연애사를 한창 나누던 중, 누군가 “누나는 뭐 하시는 분인지”라고 물었다. “그냥 회사 다녀요.” 애써 호의를 건넨 종이 인형은 나의 시원치 않은 대답에 화제를 연예 뉴스로 돌렸다. 내가 무심하려고 작정했다기보단 갑자기 모인 그들의 시선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식은 음식에 헛젓가락질을 부단히 했다.
그럴 일인가.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되짚었다. 젠더 감수성이란 용어에 ‘가열차게’ 올라탔기 때문일까? 수년간 남녀 성별 구별 자체를 잊으려 애썼다. 남성을 남성으로 보지 않고, 여성을 여성이란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며, 모두 동일하고도 각각 독립된 존재로 여기도록 유도했다. ‘저 남자는 참 남성미가···’라는 식의 생각이 떠오르면 세차게 물리면서 자책했다.
여성 패션지를 거쳐오면서 편집부 동료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당연히 여성이란 성별로 대하지 않았다. 같은 노동자로, 선배와 후배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광고 팀이나 인사 팀 등 회사와 업계에서 만나는 남자들 역시 그저 동료이자 인력이다. 종종 일터에서 만나 결혼하는 이들을 보면서 신기했을 만큼, 나는 주변을 무성으로 대해왔다. 우린 모두 다, 돌을 이고 오르는 시시포스의 후손일 뿐이라며. ‘인간성’이 별로거나 좋은 사람이 있을 뿐.
에디터로서 만나게 되는 잘난 그들은? 강동원이나 필릭스라면? 내겐 미켈란젤로가 빚은 다비드 조각상이다. 훌륭한 유산이라고 인정하지만 애초에 문화재보호법을 어길 생각이 없는. 우주가 빚어놓은 그들은 그 세계에 존재했고, 지구인으로서 응원을 보낼 뿐 사랑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성욱 이후로 연예인 때문에 울어본 적 없다. 최대 팬질은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듣는 거였다. 작품 속 배우는 멋지지만, 현실의 그를 좋아하진 않았다. 남성 여성을 떠나 애초에 나는 누군가에게 감탄할 자세가 안된 걸까. 어릴 적 회사 면접에서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누구예요?”라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답해서 떨어진 적 있다. 며칠 후 면접관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제가 말하지 않으려다 하는 건데요.” 이 문장으로 시작할 때부터 괜히 열었지 싶었다. “에디터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배우가 한 명도 없다니 충격이었어요. 우리는 누군가를 찬탄하고 파고드는 마음이 필요해요.” 한마디로 직무 유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답변을 쓰려다가 몇 번이고 지웠다. 그녀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나도 남자에 관한 기사를 주야장천 쓰던 시절이 있었다. 남자 잡지에 근무하며, 이달의 남성을 선정해 그의 눈동자 색깔부터 담배 피우는 손가락 포즈까지 묘사하는 연재도 했다. 그 시절엔 남자만 생각했다. 요즘은 누가 멋진가. 남자들이 뭘 궁금해하고 누굴 좋아하고 무엇을 갖고 싶어 하나. 그러던 어느 날, 구독자 선물을 고민하던 편집부는 코튼 100% 흰색 브리프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진지하게 몇 수의 면으로 할지 고심하던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견을 구하는 편집장에게 나는 “음··· 흰색은 때 타지 않을까요?”라고 답했고, 그는 내가 궤도에서 벗어났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남자들의 멋진 브리프 세계에 가닿지 못한, 정확히는 하얀 브리프가 극대화할 남성의 몸을 떠올리는 것이 나답지 않다고 여기며 퇴사했다. 그 후 남자는 내 관심사에서 더 멀어졌고, 젠더 감수성의 압박 시기가 왔고, 남자 친구가 생기면서 그 무리에 대한 관심을 끈 것이다.
새삼 남자를 떠올리는 요 며칠, 잠들었던 남성 찬가가 갑자기 깨어났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일이었나 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리플리: 더 시리즈>를 뒤늦게 보면서 영원불멸일 캐릭터 리플리와 디키에 다시 빠져들었다. 처음엔 리플리 역의 앤드루 스콧을 보며 ‘이마가 다소 넓다’ 싶었다. 전에 리플리를 연기한 맷 데이먼이나 알랭 들롱과 비교하며 그의 매력은 대관절 무엇인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점차 구글에서 그를 검색하고 있었다. 극 중 리플리는 17세기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을 찾아다닌다. 카라바조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하던 중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9~1610)을 그린다. 그림 속 머리가 잘려 일그러진 다윗의 얼굴은 카라바조 자신이었다. 모두를 속이고 디키를 죽인 리플리는 카라바조에게 자신을 더 이입한다. 볼수록 앤드루 스콧은 카라바조가 그린 명화처럼 보였다. 슬프고도 우아했다. 극 중 친구들이 저렴한 취향이라고 비웃던 보라색 페이즐리 가운을 입었을 때조차.
그리고 그 눈빛은 아름답다. 2024년 버전 리플리를 보기 전에 이런 감상을 언제 마지막으로 떠올렸었나. 은색 하이힐이었다. 샤프심처럼 가늘고 긴 힐이었다. 밑창은 땅에 발 디딜 일이 없는 이들을 위한 것처럼 미끈하고 유약했다. 실용성은 차치하고, 결정적 한순간을 위해 신발장에 고이 모셔둘 구두였다. ‘나 대신 열심히 일할 신발은 얼마든지 있잖아’라고 말하는 구두를 나는 결국 신어보았다. 샤프심에 몸을 지탱하자 발목이 발레리나처럼 치켜 올라갔다. 직원이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신어보니 왼발 엄지발가락이 좀 아파요.” 모든 사람은 짝짝이다. 눈도, 얼굴도, 발 크기도. 직원은 이런 말로 날 설득할 생각 없었다. 내가 아름다움보단 편한 것을 찾는 부류임을 알았나 보다. 그리고 또 무엇이 아름다웠나 되짚어보니, 실물로 영접한 디터 람스의 턴테이블이었다.
남자는 앤드루 스콧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로 인해 주드 로와 맷 데이먼이 주연한 2000년 작 <리플리> 때문에 떠난 이탈리아 여행을 상기했다. 영화 촬영지라는 풍문으로 찾아간 이스키아섬에서 나는 실사판 디키를 만났다. 별 이유 없이 이국의 작은 섬으로 이주한 미국인 한량. 섬 아래쪽 바다 온천은 그와 같은 한량들 집합소였다. 다들 뜨거운 태양에 몸을 데우다, 다시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갔다. 래시가드를 입은 건 나뿐이었다. 실사판 디키는 느릿하고 친절한 말투로, 내가 꽁꽁 싸맬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며 피부를 걱정해줬다. 몇 시간째 그는 별일을 하지 않았다. 주어진 것만 충분히 즐기는 태도가 부러웠다. 노을이 지고 그가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급할 게 없다는 듯이 살짝 비틀리게 서 있는 몸을 빛이 타고 흘렀다. 역광으로 선 그는 점차 오렌지색으로 타올랐다. 아름다웠다.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미술품 감상에 가까웠다. 나폴리로 떠나는 항구에서 그와 나는 페이스북 주소를 주고받았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느긋한 태의 오렌지색 몸은 기억난다. 이런 아름다움을 애써 무시하고 구두와 턴테이블만 바라보다니. 세상의 반인 남자들에게 재회를 신청하려 한다. 죄책감 없이 찬탄할 준비와 함께.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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